졸업한지 6년만이었다. Y로부터 한 번 뵐 수 있겠냐며 연락이 왔다. 안 그래도 어떻게 지내나 간간이 궁금하던 차였다. 매년 이백 명이 넘는 아이들을 십수 년간 마주하다보면 이름만 들어서는 선뜻 떠오르지 않는 아이들이 다수다. 하지만 Y는 잘 잊히지 않던 아이들 중 하나였다. 반장이다 학생회 간부다 요직을 맡아 하고, 학예회 때 댄스 공연을 주도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옮기는 솜씨가 뛰어난 아이였다. 대구에 있는 대학교로 진학한 후에는 별다른 소식을 들을 수 없었는데, 이렇게 먼저 연락을 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흔쾌히 응했다.
오랜만에 만난 Y는 변함없이 다부진 인상이었다.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놀라운 소식 하나를 전했다. 투고를 통해 한 출판사와 출간 계약을 하게 되었고 현재 원고를 재작성하는 중이라는 거였다. 학창 시절에도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종종 하던 Y였기에 더없이 축하할 일이었다.
“주제는 가난이에요. 가난 속에서 성장해온 한 청년의 사실적인 기록물인 셈이죠.”
가난이라니, 그래, 아버지가 시각 장애인이셨지. Y는 학교 근처의 공공임대아파트에 살았고, 기초생활수급자였으므로 학비와 급식비를 비롯한 교육비 일체를 지원받고 있었다. 내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본인이 먼저 자세히 터놓지 않는 이상 더 깊이 캐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창 예민할 나이였다. 무엇보다 그런 파편적인 정보들로 Y에게 섣불리 동정심을 가져서는 안 되었다. 다만 막연히 생각했다. 어려운 환경이지만 잘 자랐구나, 기특하고 대견하다, 역시 고통은 성장의 동력원인가….
Y가 한 편의 글을 보여주었다. 글에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Y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시각 장애인이 되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아버지는 그 후 알콜 중독자, 우울증 환자가 되었고 술 좀 그만 마시라고 말하는 어린 Y에게 소주병을 던지기도 했다. 수시로 난동을 부리고 경찰서를 들락날락하는 아버지를 원망하던 Y는 다른 지역의 대학으로 진학했고, 어머니마저도 더 이상의 동거를 거부하며 집을 나가자 작은 집에는 아버지만 남겨졌다. 알콜중독치료병원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던 아버지는 결국 Y의 방에서 번개탄을 피워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모든 기억은 상흔이었다. 토해내듯 뱉어낸 삶의 단면들은 갓 쪼개진 유리 파편처럼 거칠고 날카로웠다. 길지 않은 글이었지만 Y가 통과해 온 삶의 순간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어쩐지 빠르게 훑어 내리기 미안한 글이었다. 물밀듯 밀려드는 한 생애를 감당하느라 자주 멈칫하며 아주 오랜 시간 글을 읽었다.
Y에게 물었다. 여태껏 너를 지탱해온 힘은 뭐니. 글쎄요, 자존심인 것 같아요…. 피할 수 없었던, 결코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던 불우한 삶의 조건들 속에서 자신과 타인에게 인정받고 승인받고자 분투하는 한 인간을 떠올렸다. 막연히 고통은 성장의 동력원이라 여겼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에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말은 어떻게 들릴 것인가. 손쉽게 고통의 자산화를 들먹이며 '개천에서 난 용'이 되라고 응원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고통의 자산화는 결코 말처럼 쉽지 않고, 개천을 떠난 용은 개천에 남겨진 절대 다수의 생명체들과 영영 단절되는 것 같아 어딘지 석연찮았다.
Y는 아버지 장례식을 치르지 않았다. 뼛가루가 된 아버지를 할머니 무덤 옆에 묻은 것이 장례 절차의 전부였다. 지인들에게 아버지의 사인을 차마 말할 수 없어서였다. 있는 그대로 자기를 드러내지 못하고 응당 나누어야 할 슬픔을 혼자서 삭이며 Y는 오랜 시간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아버지의 죽음 뿐 아니라 제 삶의 면면을 불특정 다수의 대중들에게 털어놓으려 하고 있다. 내가 그에게 가장 먼저 해주어야 할 말은 말해줘서 고마워, 였다.
고통을 언어화하는 것에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가. 고통을 직시해야만 말이 되고 글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기록은 결코 한 개인의 것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가난이라는 삶의 조건과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으므로. 그래서 나는 더욱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할 것이다. 무심히 제거되고 배제되어온 목소리를 Y가 당당히 내어주기를. 단순히 ‘개천에서 난 용’이 되어 성공담 제조에 일조하지 말고, 지천에 널린 개천의 사정을 소상히 알려 주기를. 실제 삶을 동반하지 못한 공허하고 시혜적인 조언들을 곡진하고 예리한 관점에서 조목조목 반박해 주기를.
지난 시간들을 유보 없이 찬찬히 응시하기로 한 Y의 용기에 더없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언젠가 한 번 Y를 꼭 안아주고 싶다. 그가 용기 내어 말하고 쓰는 동안, 나도 내내 함께 하며 온 몸으로 듣고 볼 준비를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