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지런한 편은 못된다. 그렇다고 게으르지도 않다. 자주 일을 미루지만 기한이 있는 경우엔 어지간하면 그 안에 해낸다.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여유를 부려본 적도 없지만 대체로 제 시간에는 도착했다. 언제나 경계에서 서성이다 가까스로 데드라인 직전에 안착하는 식이랄까. 학창시절에도 지각으로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기억은, 다행히 없다. 물론 제일 먼저 교실 문을 열어본 경험도 전무하지만. 만년 지각생들이 선생님께 혼날 때 마다 도대체 쟤들은 왜 저러나, 예사로 혀를 찼다. 용케 피했으나 어쨌든 남의 일이었으므로.
그런데 교사가 되고 보니 지각은 남의 일도, 예삿일도 아니었다. 지각생이 많은 반치고 잘 굴러가는 반은 없으니까. 카리스마도 요령도 없던 발령 초기, 우리반 지각생 지도에 골몰해 있던 내게 한 선배 교사가 흘리듯 말했다. 애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뭐겠어. 학교에 오래 붙잡혀 있는 거야. 끗발이 안 서면 몸으로 때우는 거지, 뭐. 샘이 좀 힘들긴 하겠지만.
그리하여 그해 우리반 지각 벌칙은 야간자율학습 1시간 연장이 되었다. 1분만 늦어도 얄짤없다는 담임의 엄포에 교실은 일순 술렁였다. 10여 년 전만 해도 1,2학년은 야간자율학습 후 9시 하교가 기본값이었는데, 10시가 돼서야 고3 선배들과 함께 귀가할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가혹한 처사이긴 했다. 한 달 간 꼬박꼬박 그날의 지각생들과 함께 10시까지 연장 자습을 했더니 ‘독한 선생’으로 소문이 났다. 아이들은 등교 시각을 칼같이 준수하기 시작했다. 단 한 명만 빼고.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그 애의 얼굴, 아마도 함께 보낸 시간이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히 많아서겠지만. 슬프게도 아이의 적응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부모님도 어쩌지 못하는 늦잠꾸러기에 천성도 여유만만이었으니, 아침잠 10분을 포기 못하는 대신 연장자습 1시간을 달게 받아들이기로 작정한 듯했다. 호기롭게 시작한 일이었으나 갈수록 내 마음이 삐뚤어졌다. 저도 미안한지 고개를 푹 떨군 녀석을 보면서 짐짓 쾌활하게 “오늘도 10시까지!”라고 했으나, 속으로는 ‘이게 진짜 날 엿 먹이려고 그러나.’ 싶었으니까. 결국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3학년 자습감독 선생님의 양해를 구한 뒤 3학년 교실에서 자습하게도 해 봤다. 선배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아이는 참으로 꿋꿋했다.
지지고 볶고 하는 통에 1년이 훌쩍 지나고, 나는 드디어 해방되었다. 다름 아닌, 내가 내뱉은 말로부터. 내 다시는 이런 방법 쓰지 않으리, 단단히 결심하던 차에 그 애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과 함께 한 연장자습 덕에 성적이 많이 올랐어요. 이건 뭐,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어쨌든 그 방법은 추억 저편으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체력도 체력이거니와 무엇보다 야간자율학습 자율화 시대가 아닌가. 학원이다 과외다 바쁜 아이들을 억지로 학교에 붙잡아 뒀다가는 부모들로부터 항의 전화를 받을지도 모를 일.
한 번은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학급규칙을 정할 수 있도록 했다. 지각, 청소, 자리배치 등 학급 운영의 주요 항목들을 나누어 안건 별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의견을 수렴했다. 기대 이상으로 잘 해내어 기특하다 싶었으나, 딱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지각 벌금제였다. 차곡차곡 모아서 맛있는 걸 사먹을 테니 벌금 통장도 만들어 달란다. 모아봤자 얼마나 모은다고, 참으로 야무진 꿈이었다. 그런데 웬걸, 벌금이 차곡차곡 모이더니 10만원을 넘어서는 거였다. 결국 아이들의 요구대로 학급파티까지 벌였으나 나는 내내 찝찝했다. 아이들의 심리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나만 아니면 돼, 하는 이기주의와 잘못의 교정보다는 당장의 편이를 좇는 일차원적인 발상, 딱 그 어디쯤이었다. 사실 벌금의 대부분은 몇몇 고정된 녀석들의 지갑에서 나왔는데, 어째 그 놈들이 갈수록 뻔뻔해졌다. 학급파티 날에는 자기가 쏘는 양 의기양양해져서는 거들먹거리기까지 했다. 벌금을 걷는 과정은 또 어떠한가. 야무진 총무가 도맡아 하든, 담임이 팔 걷고 나서든 그건 참말로 못할 짓이었다. 1분 늦었으니 100원 내라는 식의 치졸한 돈거래가 오가는 교실이라니.
벌금제는 결코 최선이 아님을, 더군다나 학교 현장에서 수용하기엔 너무도 교육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용돈이 넉넉한 아이들은 그깟 돈 몇 푼 내고 지각에 대한 면죄부를 당당히 얻어갔다. 사정이 여의치 않은 아이들은 기를 쓰고 등교 시각을 준수해야 했다.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할 교칙이 아이들의 지갑 사정에 따라 차등화 되어 버렸다. 자율성을 주겠다 해놓고 제동을 거는 꼴이 될까봐 여차저차 넘어 갔는데, 그건 나의 불찰이었다. 교사로서 아이들을 계도할 기회를 놓쳤고, 1년간 교실 속 불의를 방관했다. 그 기억은 내 교직 생활의 깊은 상처로 남아 버렸다.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쳐 최근에 써 본 방법은 ‘삼진아웃제’라는 거였다. 지각 횟수 3번이 모일 때마다 나름 의미있는 과제를 부여했다. 시 암송, 좋은 글 필사하기, 성찰의 일기 쓰기, 체력 단련, 재능 기부, 선생님 돕기를 포함한 총 9가지였다. 9회 말 게임 아웃―9개의 과제를 모두 수행한 경우―시엔 문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가정방문을 하겠다고 했다. 가정방문이요?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창 예민하고 숨길 게 많은 사춘기 아이들에게 결코 달갑지 않은 일임이 뻔했다. 설마 그런 일이 생기겠어, 하는 마음으로 내건 공약이었는데 결국 설마가 사람 잡는 일이 벌어졌다. 다들 나의 공약 이행 여부를 예의 주시했다. 가기로 했으니 가야지, 태연히 말했다. 당사자만 여전히 못 믿겠다는 얼굴로 나를 멀뚱히 바라봤다.
아이의 어머니와는 이미 전화 통화를 여러 번 한 사이였지만, 얼굴을 마주하는 대화는 또 달랐다. 얘가 어릴 때는 곧잘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곤 했거든요. 그런데 중학교 때 친구를 잘못 만난 이후로 영 삐뚤어져 버렸어요. 절도 사건에 휩쓸려서 경찰서를 들락날락거리기도 했고요. 이제 공부랑은 아예 담 쌓은 것 같아요. 음악할 거라고 난린데, 왜 자기를 예고에 안 보내줬냐면서 우릴 원망하네요. 둘 다 아이 등교시간보다 일찍 출근하다 보니 자꾸 이런 일이 생깁니다. 선생님 뵐 면목이 없네요…. 부모와 담임 교사의 대면을 바라보고 섰는 아이의 모습이 어쩐지 안 돼 보였다. 한껏 순해진 어깨와 눈빛이 마음 한 구석을 저릿하게 했다.
반복된 지각은 하나의 외현일 뿐. 성적이 잣대인 곳에서 무능력한 존재로 치부되고 문제아로 낙인찍히는 경험이 누적되는 동안 아이는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았다. 들어도 아는 바 전혀 없으니 수업시간 내내 엎드려 있고, 오기 싫은 발걸음 억지로 끌고 오느라 맨날 늦었던 거다. 힘든 마음 헤아려 주며 토닥이다가 그래도 자퇴할 거 아니면 졸업하는 날까지 학교 규칙은 준수하자고 덧붙였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니까. 더 좋은 결론을 찾지 못했으니까.
10여 년의 교직 생활 동안 내가 깨달은 것은 지각생 없는 반이란 불가능한 이상이라는 거다. 지각 지도엔 별다른 묘책이 없다. 단순히 지각 행위만을 질책하고 바로잡으려 드는 건 미봉책에 불과할 뿐. 표면적인 것 너머에는 항상 무언가 있다. 세심하게 살피고 살뜰히 물어가다 보면 알감자가 줄줄이 엮여 나오듯 생각지도 못한 사정과 까닭이 고개를 내밀 수도 있는 일. 지각생 없는 반을 만드는 걸로 교사 리더십을 증명하려 들지 말고, 품이 넓은 반을 꾸려가기 위해 애써야겠다. ‘늦었으니까 남아’, ‘늦었으니까 돈 내’ 이런 거 대신 왜 늦었는지부터 물어야지. 뭐라고 하든 일단은 끝까지 들어줄 것. 퍼질러 앉아 떼쓰는 어린 아이, 품에 앉고 궁둥이 토닥여주는 엄마의 마음으로. 덩치만 컸다 뿐이지 아직은 어린 것들이니까.
9개의 과제 중에 시 암송을 할 때면 이 시를 자주 활용했다. 이장근 시인의 청소년 시집 『나는 지금 꽃이다』에 실린 「미지수」라는 시.
나는 미지수다
x이거나 y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하루하루 잘 풀면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오답은 아니다
풀이 과정이 맞다면
그땐 답을 의심해야 한다
세상의 답이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미지수다
굉장히 복잡한 문제에 둘러싸여 있다
공식도 통하지 않는다
말썽을 피우는 건
나를 포기해서가 아니다
나는 나를
푸는 중이다
지각한 아이가 시 암송을 잘 해내고 나면 칠판 한 쪽에 이 시를 적어두고 반 전체와 공유했다. 저마다의 복잡한 문제에 둘러싸여 골머리를 앓고 있는 아이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이 적게나마 위안이 되기를 바라며. ‘말썽을 피우는 건 나를 포기해서가 아니다. 나는 나를 푸는 중이다.’라는 마지막 구절을 아이들이 기억해 주면 좋겠다. 세상의 답이나 정해진 공식 앞에서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도록. ‘도대체 쟤는 왜 저러나.’ 대신 ‘쟤도 나름 애쓰는 중일 거야.’라며 품을 키울 수 있도록. 나도 열심히 숙제를 푸는 중이다. 지각을 줄이는 제일 좋은 방법은 학교가 ‘가고 싶은 곳’이 되는 거니까. 적어도 ‘가기 싫어서 발걸음이 안 떼진다’라는 말이 나오면 안 될 테니까. 흠, 이거 아주 어려운 문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