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 『해피랜드』를 읽고
오랜만에 한적한 지하철 타고 집에 가는 길
발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알았습니다
발치에 바다가 흐르고 있다는 걸
부서지면서 솟구치는 파도의 포말
희푸른 바닥에 별들이 빼곡이 박혀 있었습니다
들여다볼수록 뭍별로 반짝이는 점들
은빛 새떼 되어 희푸른 바닥을 날아갑니다
주둥이 벌리고 끽끽대며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들
산 입에 넣어줄 쓰라린 것들 물고 돌아가는
새들은 말이 없습니다 해지고 뜯어지며
바닥을 치는 날갯짓
은하수 구석지에 사는 거주자들, 우리는 한 바퀴 도는데 2억 광년씩 걸린다는 태양계에 교대 근무하러 왔구나, 쉴 새 없이 돌고 도는 우주의 맷돌, 날마다 황도대를 따라 돌며 스스로를 돌리는 시간의 부스러기, 달이 흘려주는 창백한 젖줄에 입 맞추며 허우적거리다 불어터지고 버티고 튕겨 나가면서 바닥을 날아가는,
별들의 몸에 지워지지 않은 상처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밀면서 밀착하고 부딪치고 흔들리면서 온 힘 주어 딛고 선 흔적들
각진 바다에서 수평으로
더불어 날아가는 은빛 점 점들
- 「지하철 바닥의 새떼」
지하철 바닥이 어땠더라…. 시 내용을 바탕으로 기억을 더듬어본다. 인터넷 검색창에 ‘지하철 바닥’이라고 치니 관련 이미지들이 쏟아진다. 푸른 바탕에 무수히 찍힌 흰 점들. 낯설고도 익숙하다. 수없이 보았을 테지만 무심히 지나친 것들이 어디 그뿐이랴.
시인의 시선을 찬찬히 따르는데 그 흐름이 참으로 경이롭다. 지하철 바닥에서 바다를 보고 별을 보더니 은빛 새떼에 이어 우주에까지 눈길이 닿는다. 해지고 뜯어진 날개를 퍼덕여 새끼들 먹일 것 물고 돌아오는 말없는 새떼들. 지하철 속, 밀면서 밀착하고 부딪치고 흔들리면서 온 힘 주어 딛고 섰을 무수한 이들이 보인다. 스스로를 부수는 우주의 맷돌질은 은하수 구석지에 사는 거주자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남기지만, 그들은 여전히 더불어 존재한다. 수직의 비상 대신 바닥을 치는 수평의 허우적거림으로.
비약과 환상 속에 서슬 퍼런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은빛 새떼와 상처 입은 별들, 은하수 구석지에 사는 거주자들은 지상의 숱한 무명씨들이다. 태양계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태양이 아니라 그들일지도. 맨눈으론 보이지도 않는 뱃속의 억조창생이 뇌를 움직이듯이(「생각하는 발」중에서), 은사시나무 한 그루가 저마다 팔랑거리며 반짝이는 이파리들로 존재(being)하듯이(「인류, Human Being」중에서).
지하 원룸 앞 콘크리트 틈새에서
광대나물이 얼굴을 든다 부서진 벽돌에 눌리며
냉이 이파리가 펴지고 반쯤 뽑혀 비스듬히 누운
나무 위에서도 이끼는 푸르다 나는 모른다
지난 겨울 지하를 흐르던 씨앗과 물방울들의 연대
땅 위로 솟구친 너의 비밀
- 「우화」 중에서
모른다고 했으나 시인은 알고 있다. 광대나물과 냉이 이파리와 이끼의 비밀에 대해서. 그들을 생(生)하게 한 것은 작고 낮은 것들의 연대라는 것을. 같은 시에서 말한다. ‘수직이 수평을 지배’하는 현실에 관해. ‘위조된 믿음을 재생산하는 거대한 첨탑, 예배당 같은 것들’, ‘네모난 지식을 주입하는 학교’, 그리고 ‘건물 안에 갇힌 국가’ 등은 우리의 삶을 수직으로 짓누른다. 그럼에도 ‘부패도 비리도 해먹을 방법도 알 길 없는 문서 밖 존재들’이 생을 붙들고 있고, ‘벌레와 이끼들의 집이 되는 흙과 나무’ 같은 것들을 종교로 삼는 이가 있다. 수평의 시선으로 연대하고, 의심과 항거로서 삶을 데우는 존재가 수직의 힘을 이내 무력케 할 것이라 믿는다.
저 입이 닫힌 것들 대가리가 무와 양파와 함께 끓고 있는
가난한 밥상머리를 구수하게 물들였다
바스라져 가루가 된 멸치들이
참치도 살 오른 방어도 아닌 것들이
농어도 튼실한 연어도 아닌 것들이
이 작은 은빛 몸체들이 곡괭이와 용접기와 호미를 쥔
광부와 선반공과 농부의 굽은 무릎과 손가락 마디마디
단단한 뼈가 되어주었다 으샤으샤 함께 멸치 그물을 털던 어부들처럼
말없이 문 앞에 박스를 놓아두고 간 택배기사처럼
밟고 지나가도 다시 꼿꼿이 고개 드는 질경이 방구장이
눈에도 안 띄는 비단풀 빈대풀
그까짓 것, 것들,
저 작은 것들이 모여
- 「그까짓 것, 것들」 중에서
‘그까짓 것, 것들’이 더없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열거된 낱낱의 존재 앞에 엎드려 절하는 시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시대의 언어와 사고에 젖어, 저들에게 무람없이 ‘하찮음’의 딱지를 붙이며 살아온 것은 아닌가 돌아본다. ‘나는 한낱 위대한 풀이었다’(「인류, Human Being」중에서) 라는 시인의 외침 앞에서 한없이 경건해지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