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문틈에 대한 단상
‘틈’이란 단어는 참으로 야릇하다. 국어사전에서는 틈을 이렇게 정의한다. 1. 벌어져 사이가 난 자리. 2. 모여 있는 사람의 속 3. 어떤 행동을 할 만한 기회 4. 사람들 사이에 거리. 이렇게 총 네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벌어져 사이가 난 자리’는 관음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모여 있는 사람의 속’은 부대끼는 살갗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행동을 할 만한 기회’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사람들 사이에 거리’, 이것은 가장 에로틱하다. 거리가 있다는 것은 나와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는 타인이란 개념을 만들어내고, 에로스의 필요충분조건이 된다.
여기에 ‘문’이란 단어가 붙었다. 문이란 건, 공간과 공간을 잇는 존재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장 에로틱하다 했듯이, 공간과 공간 사이에 위치한 문이란 것도 다분히 에로틱하다. 문틈, 이 자그마한 틈새는 분절된 공간의 공기가 유일하게 소통하는 곳이다.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오롯이 딴 세상인 두 공간. 이 이질적인 두 공간이 유일하게 문틈을 통해서만 호흡한다. 문틈 사이로 보는 풍경은 마치 다른 세상을 탐닉하는 듯한 감정을 일으킨다. 그야말로 에로틱하다. ‘지금, 여기’의 현존감이 발현되는 게 아우라라면, 문틈은 이 아우라를 장치로써 에로티즘을 더욱 증폭시킨다.
에로티시즘의 창시자 바타유는 에로티시즘의 관건은 긴장감이라 했다. 각각의 공간이 나뉜 채로, 오롯이 문틈만이 그 공간들 사이의 긴장감을 주고받는다. ‘문틈’, 야릇을 넘어 야릇야릇한 단어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문틈, 이 사이로는 과연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더욱 더 좁아진 시야는 긴장감을 증폭시키기 적당하다. 젊은 시절 해리슨 포드가 매력적인 영화 <위트니스>(1985)의 도발적 사건 역시 문틈으로 목격한 사건에서 시작된다. 문틈 사이로 보고 있는 나는 저절로 비밀스러워진다. 거기서 오는 긴장감, 그것이야말로 야릇야릇한 에로티시즘이다.
문틈은 비닉(秘匿)의 공간이다. 그렇기에 관음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것은 벤담이 제시한 판옵티콘의 특성이기도 하다. 나는 드러나지 않은 채 문틈 사이로 모든 걸 지켜볼 수 있다. 내 존재가 들키지는 않을까 하는 긴장감. 나는 모든 걸 지켜본다는 우월감. 복합적인 감정이 이 공간을 야릇야릇에서 이상야릇으로 변화시킨다. 다시 한 번 바타유를 인용하자면, 에로티시즘은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가리느냐를 고민해야 한다. 문틈이 판옵티콘보다 에로틱한 까닭이다.
에로티시즘의 핵심은 ‘무엇’을 보여주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보여주느냐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문틈 사이로 보는 것이 훨씬 더 에로틱하다. 앞서 얘기한 특성들 때문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에로틱하다는 게 꼭 야한 걸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에로티시즘은 흥분이다. 어떤 도발적 사건이 흥분시킬 수도 있는 것이고, 어떤 사물 혹은 사람이 그럴 수도 있다. 사람의 나체 같은 것만이 에로틱한 게 아니다. 확실한 것은, 문틈 사이로 보는 것들은, 거진 다 에로틱하다는 거다. 문이라는 게 어디론가 가는 길이라면, 문틈은 에로티시즘으로 가는 길이다. 문틈은 그 자체로 참으로 야릇한 공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