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달, 『눈,물』, 창비, 2022
한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눈으로 만들어진 아이, '눈아이’였다. 자신의 온기로 인해 자신의 아이가 사라져 버릴까 봐 여자는 아이를 품에 안을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때, 아이를 녹여버릴 바깥의 봄이 성큼성큼 그들 곁으로 몰려온다. 여자는 아이를 지키기 위해 ‘문 바깥’의 눈을 끌어와 아이 앞에 담을 쌓지만, 몰아치는 봄의 기운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다.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초록 잎들을 바라보며 아이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트리고, 여자는 어떻게든 아이를 지키고자 자신의 온몸으로 틈새를 막아본다. ‘문 바깥’의 세상에선 그곳의 무성한 초록을 두려워하는 아이의 오열이 들리지 않는다. 그곳의 무심한 초록을 막아보려는 여자의 몸부림이 보이지 않는다.
여자는 ‘문 바깥’에 뿌려져 있는 전단지 더미를 발견한다. 봄의 온기에도 녹지 않을 얼음집, <언제나 겨울>을 홍보하는 전단지. 이를 한참 바라본 여자는 콰직, 전단지가 구겨지는 소리와 함께 결심을 내린다. 금방 돌아온다는 말을 아이에게 남긴 채, 여자는 길을 나선다. 아이를 '눈아이'로서 지켜줄 <언제나 겨울>을 아이에게 가져다주기 위해서.
한참을 달린 여자는 드디어 ‘문 바깥’의 경계에 도착한다. 빼곡히 세워져 있는 커다란 장벽들. 울퉁불퉁 튀어 나와 있는 무수한 실외기들이 규칙 따윈 없는 무늬를 이루고 있는 장벽들. 장벽 앞에는 반대쪽 너머에서 쏟아져 나온 쓰레기들이 가득 쌓여있고, 장벽과 장벽 사이에선 화려한 불빛이 새어 나와 흐르고 있다. 그 빛을 따라 그대로 여자는 미끄러져 달려들어간다. 장벽 너머의 안쪽, 황홀히 빛나는 도시 속으로.
온통 눈부시다. 눈이 아플 정도로 환한 빛은 하늘의 태양으로부터 온 그것이 아니다. 도시의 온갖 간판과 전광판들이 발하는 인공의 빛. 그 빛을 가능케한 형형색색의 광고들은 무엇이든 사고 갖고 누릴 수 있는 도시 속의 천국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두가 웃고만 있는 편평한 천국은, 모두가 똑같은 마음으로 똑같은 말을 하고 똑같은 모습을 하도록 이끄는 우리 사회의 표상처럼 보인다. 불안을 먹고 자라 불안을 키우는 사회. 더 많이 사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갖는 것을 미덕으로 권장하는 사회. 마땅히 지켜야 할 진실과 가치까지도 소비의 대상으로 삼는 사회. 사람과 사람을 잇는 손길과 온기마저 ‘돈’으로 그 가치를 매겨버리려는 사회. 사람을 ‘돈’으로 쉽게 사고 쓰고 버릴 수 있는 사회. ‘돈’에 의해 작동되고 지배되는 사회. 그리하여 ‘돈’이 모든 사고와 행동과 선택의 지표로 군림하는 사회.
자신의 것일 수 없는 세상을 힘겹게 통과해 겨우 찾아온 <언제나 겨울> 앞에서, 여자는 그만 얼굴을 감싸고 주저앉는다. 변치 않을 겨울의 냉기마저 돈으로 사고파는 이 도시가 요구하는 그 무엇도 여자는 갖고 있지 않기에. 한참을 슬퍼하다 다시 몸을 일으킨 빈손의 여자는, 기꺼이 도시의 쥐구멍으로 걸어 들어간다. 더 늦기 전에 아이에게 겨울을 사다 주어야 하니까. 더 늦기 전에 아이에게 겨울을 건네주어야 하니까.
무엇이라도 해서 조금이라도 벌려는 절박한 이들을 반기는 도시의 쥐구멍. 그곳을 통해 여자는 도시의 빛을 영원히 꺼지지 않게 할 온갖 궂은일들을 도맡게 된다. 그늘진 곳에서, 보이지 않는 무게를 지고, 끝이 없는 계단을 두 발로 걸어 올라가며. 도시의 사람들이 언제까지고 가능하다 믿길 바라는 ‘무분별한 소비와 폐기’를 자신의 온몸으로 선전하며.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도시가 여자에게 씌워놓은 아이스크림 모양의 인형탈 주위로 차가운 비가 쏟아져 내린다. 여자는 품 안의 아이스크림을 지키려 애쓰지만, 아이스크림은 이내 길바닥에 쏟아지고 그대로 녹아버린다. 녹아서 사라져 가는 것에 마음을 쓰는 건 오로지 여자뿐. 길을 지나는 사람들 모두가 녹아내린 그 위를 아무렇지 않게 밟고 지나간다. 여전히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사라져 가는 것의 오열이. 지키기 위한 이의 몸부림이.
여자는 다시 <언제나 겨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간다. 그 앞에서 여자는 주저 없이 행동한다. 온몸을 찌르는 고통을 견뎌내면서까지 여자가 구하고자 했던 여자의 아이. '눈아이'는 자신의 시린 냉기를 오래도록 품을 수 있게 됐을까. 다른 무엇이 아닌 그저 '눈snow’으로 오래도록 존재할 수 있게 됐을까.
책장을 덮고도 끝나지 않은 결말은 ‘문 바깥'의 무성하며 무심한 초록이 아닌, 소중한 것을 애써 지키려는 ‘문 안’의 마음들을 위로한다. 쉽게 쓰고 버리는 행위보다 어렵게 지키고 품으려는 행위를 향해 기꺼이 움직이는 몸들을 안아준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나 가려져 있는 누군가를 존귀하게 여기려는 몸들을 응원한다. 그 누구의 ‘진심’도 부정하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을 어루만진다. 지키고 싶은 것, 지켜야만 하는 것의 안부를 끊임없이 묻고 살피는 여자의 구슬픈 노래가 가닿는 곳은 어디일까. 상실과 변질이 크게 주목받지 않는 사회에서, 그럼에도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각자의 분투를 이어가고 있는 모든 이들의 가슴이 아닐까. 너를 너로 존재하게 할 냉기를 망설임 없이 선택하는, 차갑고도 따듯한 그 품으로.
여자가 아이를 위해 ‘문 바깥’과 ‘문 안’의 경계를 넘어설 때마다, 종이의 질감도 따라 달라진다. 보고 만지고 읽는 이들이 '눈,물'을 감각할 수 있도록 돕는 물성에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계절을 달리해 다시 볼 때마다, 나는 여자와 함께 '눈물'을 흘린다. 까끌까끌한 결을 애달프게 어루만지며. 매끈한 결 위에서 간신히 버텨내며.
* 안녕달, 『눈,물』, 창비,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