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밤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해 오길래, 지레 겁을 먹은 채로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을 더듬어 타닥 두 번 두드린다. 그럼 그렇지, 배경화면의 디지털시계가 자정을 넘어선 지 십수 분이나 지났음을 알려준다.
시계는 나를 비웃고, 나는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을 양 세기를 하고, 그럴수록 침대 위의 통찰력은 예리해져만 간다.
"어린이 여러분,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강한 어린이가 됩시다." 밤 9시 땡전뉴스가 곧 시작될 것임을 미리 경고하려는 듯 TV에서 흘러나오던 무가내하(無可奈何)식 취침 강요가 멸종한 지 아주 오래 건 만, 자정 전에 잠에 들지 못하는 날이면, 무슨 도덕적 해이 행위라도 저지른 듯 안절부절못해한다.
암막 커튼에 갇혀 내 몸을 휘감은 어둠, 시작점을 모를 불안한 생각의 쓰나미, 잠시후면 본색이 드러날 피곤함의 교활한 실루엣, 이 모든 것들에 짓눌린 불면의 밤에 나는 잠을 도둑맞고 중병을 앓아야 한다.
침대 위의 각성을 버티다 못해, 촌티 나게도, 몽유병 환자처럼 냉장고를 찾아가 찬물을 벌컥 마신다. 반의 반쯤 열린 거실 창을 통해 우연히 눈이 마주치고 만 아직도 환하게 불 켜진 다른 집의 거실 광채가 탁한 내 홍채를 푹 찌르고, 앰뷸런스인지의 사이렌 소리가 때마침 요란하게 들려온다. 오늘밤 제때 잠들었다면 모르고 비켜갔을 빛의 공해요, 소음의 공해다. 공해의 폐해가 크다. 거실 한쪽 구석탱이에 놓인 (인테리어용) 램프를 켜고 만다.
애써 외면하는 가족의 소음도 듣게 된다. 닫힌 방문 아래로 가늘고 선명한 불빛이 삐져나오는 아이 방에서 롤(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을 하다 무슨 불쾌한 상황에라도 처했는지 상스러운 장탄식도 같이 삐져나온다. 또 무엇과 맞닥뜨릴지 감이 없다.
미드나잇 오일을 켜면 밤 깊도록 책을 읽어야 옳은 법이거늘... 나는 애지중지 모셔둔 크리스털 와인잔을 꺼내려다 말고 물 잔을 집어 든다. 와인 따개의 스크루를 코르크에 박으려다 말고 캔맥주를 꺼내든다. 한 모금에, 불현듯, 문을 쾅 닫으며 제 방으로 들어가던 (철없는) 아이가 떠올라 맥주 거품으로 '인(忍)'자를 그린다. 칼날(刃)이 마음(心)을 겨눈다. 도저히 애정할 수 없는 얼굴과 짜증스러운 일이 떠올라 또 인(忍)을 쓴다. 이 꼴을 집사람이 본다면 쏟아낼 잔소리가 떠올라 ("밀크시슬 사 먹을 생각 말고 술이나 끊지?") 다시 한번 인(忍)을 적는다. 삼세 번이면 깨달음이 있어야 할터인데 그럴 조짐은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고 애매한 취기만 얻는다. 불을 밝혀도 이놈의 상념 공해는 어둠을 찾아 숨어들 줄 모른다.
맥주캔이 텅 비어 빈방에 든다. 'Sometimes I dream, I'm lost in time...'으로 시작되는 마리오 프랑굴리스(Mario Frangoulis)의 노래가 흐르도록 핸드폰을 연다. 그러다가, 'E non ho amato mai tanto la vita!'(삶이 이토록 절박한 때가 있었던가!) 토스카의 카바라도시가 울부짖는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잠 못 드는 밤에 대한 글쓰기를 끝낸다.
밤은 깊어도 서울의 하늘엔 별도 빛나지 않고, 이렇게 적어 올리는 내 글은 짧고 어렴풋한 반짝임 한 번 없이 끝 간 데 모를 암흑의 우주를 속절없이 떠돌 운명이겠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무기력하게도, 어두운 밤에 나를 맡기고 잠이 오길 기다리는 일뿐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