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여행 단편과 상념: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스페인 기타(Spanish Guitar) 여섯 줄이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Recuerdos de la Alhambra)을 노래하며 끝 모를 슬픔이 차오르는 듯 바르르 떨기를 계속하였다. 트레몰로 주법이라 불리는 환상적 핑거링은 더 이상 눈에 차지 않았고, 궁전 창 밖으로 달이 떠올라 알함브라의 버려진 은신처와 황량한 안뜰 위로 흔들리는 빛을 쏟아붓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먼 옛날 그라나다 땅을 쫓겨나던 무어의 왕이 내쉬었다는 깊은 한숨까지 떠올리기엔 기타 선율과 나 사이의 애잔함의 밀도가 너무도 짙었다.
알함브라 궁전이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던 어느 날 (천일야화 어딘가에나 나올 법한 이름의) 기타 연주곡을 처음 듣고는 뜻밖의 충격에 휩싸였다. 싸구려 통기타 하나와 기타 연주 교본 한 권을 사보았지만, 난 결국 악기에는 재능이 없었다.
오할라!(Ojalá, 스페인어로 '바라건대' 같은 뜻. '알라의 뜻대로'가 본래의 의미다)
두 아이에게 꽤 비싼 클래식 기타를 사주었다. 마침내, 큰아이에게서 놀라운 재능을 발견하였다. 어느 해인가 헤이그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아스투리아스(Asturias)를 연주하였고 "와아~" 환성이 들려왔다.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플라멩코 감성이 깊이 베인 아스투리아스도 물론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구긴 하였다. 바르셀로나 포블 에스파뇰의 '타블라오 데 카르멘' 2층 자리에 앉아 격정적 플라멩코 기타 연주와 무용수의 춤을 넋을 빼고 바라본 것이 어쩌면 아스투리아스의 영향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내 30센티미터 앞에서 듣기를 (아이 키우는 보상처럼) 소망하였고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어쩔 도리 없이, 장미꽃 활짝 피어나는 계절이 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2월의 어느 날 안달루시아 그라나다로 떠났다. 알함브라 궁전에는, 때로는 기운 달이 뜨는 순리처럼, 겨울도 있는 법이라 여겼다.
1469년 아라곤과 카스티야 두 기독교 왕국이 하나가 되었다. 이베리아에 이슬람 우마이야 왕조(756-1031)가 들어선 후 7세기 동안 레콩키스타(기독교 개종과 이슬람 축출)가 계속되자 이미 쪼그라든 나스르 왕조 그라나다 왕국은 더는 버티지 못하였다. 21대 보압딜왕(무함마드 12세)은 1492년이 되어 그라나다 무어인들(이베리아와 북아프리카에 살던 이슬람교도)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초승달이 십자가에 끝내 굴복하였고, 마지막 왕은 알함브라의 파괴를 막기 위해 스스로 그라나다를 떠나 아프리카 땅이 가까운 남(南)으로 향했다. 파둘 산 높은 곳에 이르러 조상 대대로 살아온 아름다운 산천과 무슬림의 무덤을 표시하는 사이프러스 나무와 피처럼 붉은 알함브라를 바라보며 불운한 왕은 피가 아닌 깊은 한숨(Suspiro del Moro)으로 한탄하였다. 남자의 어머니는 '여자처럼 운다'며 아들을 힐난하였다. 알함브라는 곧 영원히 사라졌다.
왕과 운명을 공유한 무어인들은 플라멩코 음악과 체스와 올리브와 살구와 대추야자를 선물처럼 남겨둔 채 아프리카 땅으로 돌아갔다. 남은 생은 그라나다와 알함브라 낙원을 그리워하는데 써야 했다.
멀리서 바라보이는 알함브라는 바깥세상이 섬세하고 은밀한 속살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산으로 보호되고 숲과 붉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채 시에라네바다 험준한 산맥에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에메랄드에 박힌 진주'라 불릴만하였다.
무어의 왕들은 기독교와의 갈등이 커지자 군사 거점 강화의 열망으로 알함브라를 건설하였고, 아이러니하게도 멸망 후에는 이슬람 통치의 가장 중요한 유물이자 스페인의 독특함으로 남았다.
매우 투박하게 보이는 정의의 문(Bab el-Sharia) 앞에 서서 마지막 무어 왕의 서글픈 이야기를 기억하였다. 슬픔인 듯 아닌 듯 행복인 듯 아닌 듯 눈물이 차오르지 않고서는 알함브라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채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심호흡 한 번 하고 나서 알함브라 빛깔의 높은 성벽으로 가려진 은밀함 속으로 진입하였다.
은밀한 곳에는 나사리 궁전이 근엄하게 자리하였고, 파르탈 궁전과 알카사바(요새)와 메디나(도시)가 있었고,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는 언덕이 있었으며, 좀 떨어져서 좀 더 은밀한 헤네랄리페 여름 궁전이 있었다. 2천 명 가까운 사람들이 이곳에서 살았다.
무어 왕의 궁전은 겉만 봐서는 그 속을 전혀 모를 일이었다. 흘낏 보고 지나쳐서는 아름답다고 하지 못할 (차라리 검소해 보인다고 해야 할 것 같은) 첫 꺼풀을 벗겨내야만 이슬람적이고 동양적이고 관능적이고 때로는 호전적인 어떤 아름다움이 비로소 보였다.
메수아르궁, 코마레스궁(유수프 1세 궁), 사자궁(모하메드 5세 궁)이 모여있는 나사리 궁전을 미로를 헤매듯 거닐다 보면, 벽과 천장과 바닥은 긴 거리 넓은 면적을 충분히 커버할 만큼의 무한한 디자인의 문양과 필리그리와 글자와 시적 구절로 정교하게 덮여 있었고, 텅 빈 공간은 휘황찬란한 색의 양탄자와 도자기와 정교한 무늬의 가구와 신기한 악기와 예쁜 꽃으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옛 무어 왕 중 한 명이 불쑥 나타난대도 전혀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코마레스 궁은 기독교의 위협을 압도하기 위해 거대한 탑을 세워 두고 있었다. 그 안으로 감추어둔 안뜰에서는 맑고 차가운 물이 분수로부터 솟아올라 물의 쉼터를 만들고 그 위로 탑과 (고행의) 일곱 개 아치를 그림자로 곱게 띄웠다.
안뜰과 (천국의 꽃) 아라야네스 정원과 순결한 물이 기막히게 조화를 이루는 구성이야말로 무어인의 영원한 낙원에 대한 꿈의 표현이라고 하였다. 이만하면 무어 왕의 은밀한 안식처에 우아함을 더하기에 부족함이 없겠다 싶었다. 귀한 물을 멀리 안뜰까지 끌어오는 고단함을 감당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왕뿐이었을 것이다.
사자궁의 기막히게 아름다운 후궁 처소 현관을 지나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우주를 세련된 솜씨로 갈가리 찢어놓은 듯한 무카르나스(모카라베. 동굴 종유석 같은 장식) 천장은 푸른빛, 금빛, 태양빛이 서로 다른 패턴으로 어긋나며 절묘한 조합을 이루어 천상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무어 왕의 권위가 그 아래에서 절로 강해지는 듯 보였다.
사자궁 아벤세라헤스 방의 무카르나스 천장도 황금빛과 에메랄드빛이 충돌하며 현란하게 빛났다. 신망 두텁던 아벤세라헤스 가문의 서른여섯 명 남자가 이방에서 참수되었다. 피가 사흘동안 안뜰로 흘러내렸다. 그 가문의 한 남자가 보압딜 왕의 후궁과 놀아나다 들켜버린 탓이었다. 이렇듯 잔인한 왕도 알함브라를 떠나면서는 눈물을 흘렸다.
아라베스크 문양과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시적 종교적 상징의 글자와 구절로 벽면이 가득 찼다. 왕을 축원하는 '저는 아침저녁으로 당신을 환영합니다. 축복, 번영, 행복, 우정의 언어로' 같은 비문 또한 빼곡하여 웅장한 광경을 만들고 있었다. 바닥 또한 독특한 색감과 질감과 패턴과 문양을 입고서 아름답게 빛났다. 천일야화에 나오는 궁전 하나를 여기로 옮겨놨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빅토르 위고도 마찬가지로 램프의 요정 지니가 궁전을 꿈처럼 장식한 뒤 하모니로 가득 채웠다고 하였다. 밤이면 마법의 대화가 들려오고, 달은 수천 개의 아랍풍 아치를 지나며 클로버 잎사귀 같은 실루엣을 흩뿌린다고 하였다.
나는 잘 움직이지도 못하고 침묵한 채 그저 놀란 눈으로 왕이 살던 은밀한 장소들을 응시하였다. 상아, 진주조개, 은으로 장식된 천장에서는 별이 빛났다.
알함브라 북쪽 능선의 헤네랄리페 별궁에는 여름이 되면 왕이 찾아들었다. 장미와 레몬과 오렌지 나무가 늘어선 향기로운 정원이 있었고, 길쭉한 아치 기둥 사이로 하늘이 보였고, 물은 운하와 분수를 따라 외딴 안뜰 속을 은밀하게 흘렀다. 은밀한 기쁨의 낙원을 훔쳐보는 내 시선은 한 곳에 심취하여 오래 머물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여기저기를 바쁘게 오가느라 혼란스럽기도 하였다.
석류. 장미. 재스민, 사이프러스와 레몬머틀이 시샘하듯 꽃을 피우고 자태를 뽐내는 은밀한 정원을 걷노라면, 밤이 되어 별과 달이 떠오르는 모습이 절로 상상이 되었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탐닉하기 위해서는 겨울이 아니라 이른 여름에 왔어야 했고, 낮에만 올 것이 아니라 밤에도 왔어야 했다.
마지막 무어 왕은 쫓겨나며 그라나다 백성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도록 간곡히 부탁하였다.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이슬람은 금지되었다.
카를 5세는 알함브라에 판테온을 본떠 새 궁전을 짓기 시작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흥미를 잃었다. 어떤 사람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기타 선율이 이 해괴한 궁전에 대한 분노라고도 하였다.
알함브라 끄트머리의 알카사바에 이르렀다. 기독교인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파수꾼이 성 밖의 동태를 살피던 탑이 장엄한 포즈로 서 있었다. 가이드는 알카사바가 아마도 로마 요새의 잔해 위에 지어졌을 것이라며 내 귀에 간신히 들리게 "오할라!"를 말하였다. 탑 위에는 유럽연합, 스페인, 안달루시아 깃발과 함께 빨강과 초록의 그라나다 깃발이 바람에 펄럭였다. 가까이의 알바이신(무슬림 거주지역)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알함브라를 두고 잃어버린 낙원이라고 말했다. 어느 시인의 표현 마따나 너무나 매력적인 슬픔이 나를 끌어들여 바늘에 꿴 실처럼 끌고 갔다. 알함브라 궁전 아치 창 밖으로 사크로몬테의 집시가 살던 곳을 바라보자 갑자기 플라멩코의 선율이 귓전에 부딪혔다.
밤이 되자 알함브라 궁전 텅 빈 창문을 통해 달빛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치 복도를 시종들이 지나갔다. 세상 모든 지혜와 예술이 낙원의 땅으로 떨어져서는 무어의 마지막 왕이 될 남자가 내쉬는 탄식의 한숨 곁을 맴돌았다. 나는 서서 꿈을 꾸었고, 꿈속에서 헤네랄리페 정원에 불멸의 장미 한 떨기가 밤사이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