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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밍드림 Sep 20. 2024

이교도의 신전에 이르러 테스는 마침내 업보를 끊었다

세계여행 단편과 상념: 영국 스톤헨지

영국 남서부 솔즈베리 평원을 지나다 보면 '스톤헨지(Stonehenge)'가 우두커니 서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가림막을 둘러치지 않아서 멀리서도 또 차를 타고 무심히 근처를 지나면서도 쉽게 바라보인다. 누가 언제 대체 왜 세워 놓았을지 그저 의아할 따름인 기괴하고 웅장한 돌덩이들이다.


스톤헨지를 처음 마주하였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거대한 돌덩이가 우뚝 서기도 했고 벌러덩 드러눕기도 하였으며, 다른 돌덩이를 받치고 섰기도 하였다. 둥글게 에워싸인 안쪽으로는 정체 모를 기운(氣運)이 가득 찼고, 바깥으로는 뫼뵈우스의 띠처럼 또 다른 기운이 끊임없이 휘감아 도는 상상이 절로 들었다.  


찌는 듯한 더위에 포털 사이트의 헤드라인 뉴스들을 대충 훑어내리던 2024년 8월의 어느 날, 스톤헨지의 가장 큰 블루스톤인 6톤짜리 제단석(Altar Stone)이 웨일스가 아니라 무려 750킬로미터나 떨어진 스코틀랜드에서 실어온 것이라는 과학학술지 네이처의 발표 기사에 눈길이 멈추었다.




'업'(業, 원인)의 시작과 예견된 '보'(報, 결과)


몰락하여 집안의 뿌리(더버빌家)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는 빈농의 장녀로 태어났으니, 여자는 무능력한 부모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거짓 가문(더버빌家)의 졸부이자 불한당 같은 남자 알렉에게 엮였으니, 여자는 처녀성을 잃어야 했다. 아이를 낳았지만, 며칠을 살지 못하였다. 이제 더는 처녀가 아니라는 굴레가 씌어졌다.


토마스 하디의 '테스'(더버빌가의 테스: 순결한 여인)를 처음 읽은 게 아마도 내 몸 안쪽에서 바람이 세게 불고 물결이 거치게 일렁이던 청소년 시기였을 것이고, 책장을 넘기며 고전소설에나 나올 법한 "쳇, 빌어먹을!" 뭐 그런 말을 때때로 내뱉었을 것이다.


테스는 연고가 없는 탈보테이즈 목장에 정착하여 소젖을 짜며 수치심을 잊으려 했으나, 운명처럼 만난 에인절의 구애에, 끝내 도덕적 저항이 욕망에 패배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의 영화 '테스(1979)'

첫날밤, 남자는 매춘의 과거를 고백하고는 "다행히도 나는 거의 즉시 내 어리석음을 깨닫고 깨어났다."라며 용서를 바랐고, 여자 또한 알렉과의 일()을 고백하며 동등한 용서를 구하였다. 하지만, 남자는 “지금의 당신은 다른 사람이오.”라며 (순결하지 못한) 여자를 부정하며 떠나버렸다.


"빌어먹을!"




돌무더기의 침묵과 희미한 암시


솔즈베리 평원에 이르자 그곳에선 4월의 바람이 쉴 새 없이 초원을 훑고 다녔고, 햇살은 아직 잠에서 덜 깬 작은아이의 살짝 찡그린 얼굴 표정만큼이나 나른하였다.

드넓은 초원 위에 덩그러니 놓인 스톤헨지는 바람을 살살 달래는 듯한 따스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마치 잘 짜진 코레오그래피(Choreography)에 맞춰 군무라도 추듯, 짧은 그림자를 땅 위에 떨구었다가 다시 돌덩이 특유의 빛깔로 빛을 반사하였다.



수많은 이들이 연구를 해 왔음에도 스톤헨지가 왜 지어졌거나 어떻게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어느 누구도 완전하게 설명하지는 못하였다. UFO 착륙장, 일식과 월식을 계산하는 컴퓨터, 드루이드(자연을 숭배하고 영혼의 불멸과 윤회사상을 믿는 켈트 신앙) 신전, 무덤, 인신공양, 다산(多産)의 상징, 아니면 치유의 성지...?


윌리엄 워즈워스의 "Pile of Stone-henge! So proud to hint yet keep thy secrets."라는 말마따나 스톤헨지 돌무더기는 들판의 한가운데 오만한 외로움으로 선 채로 지나는 바람에다 수천 년의 비밀에 대한 희미한 암시만을 툭툭 내던지는 모양새를 하였다.




업보(業報, '나를 무던히도 애 먹인 사람')의 살인


첫날밤의 비극처럼 에인절이 떠나버린 후 방황하던 테스는 알렉을 다시 만나 어쩔 도리 없이 (정조를 뺏은 자의) 정부(情婦)가 되었다. 그 후에야, 부쩍 수척해진 모습으로 에인절이 돌아왔다.


에인절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멀리 떠났던 나를 용서해 주겠소? 당신은-내게로 돌아올 수 없소?"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내가 죽는 게 아니라 에인절이 죽게 되었어요! 아, 알렉 당신은 내 인생을 산산조각내고 말았어요. 그토록 간절하게 빌었는데, 알렉 당신은 나를 또 이렇게 만들어 놓고 말았어요... 아 하느님 - 참을 수 없어요! - 참을 수 없어요!"


죄책감(업보)의 원인을 단칼에 제거해 버린 여자가 도망자가 되고마는 대목에서 나는 다시금 비탄을 내뱉어야 했다. "빌어먹을!"


The Heathen Temple (이교도의 신전)


다음 기둥은 따로 떨어져 있었다. 어떤 것은 돌 세 개로 대문 모양을 한 것도 있었고, 또 어떤 것은 바닥에 놓여서 그 사이로 마차가 지나다닐 수 있을 만큼 통로를 만들고 있는 것도 있었다. 광활한 풀밭에 이런 것들이 함께 모여 돌기둥 숲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 곧 분명해졌다.


"이건 스톤헨지야." 에인절이 말했다.


영화 '테스(1979)'

"이교도들의 신전이란 말씀이죠?" 


테스는 사실 이때 너무 몸이 피곤하여 바로 옆에 있는 장방형의 석판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영화 '테스(1979)'


"지금 생각이 나는데, 외가 친척 한 분이 이 근방에서 양을 쳤대요. 탈보테이즈에 있을 때 저보고 이교도 같다고 말씀하곤 하셨죠. 그러니까 전 이제 고향에 온 셈이네요."


"테스, 졸린가 봐? 당신이 누워 있는 곳이 제단 같은걸."


테스는 '무척 엄숙하면서도 쓸쓸한' 스톤헨지에 다다라 고통스러웠던 삶의 마지막 밤을 지냈다.




돌무더기의 참지 못할 숭고함


스톤헨지가 폐허가 된 것은 잉글랜드 공위(空位) 시대(인터레그넘, 1649~1660)에 청교도들이 이교도로 여겨지는 것들을 마구 파괴했기 때문이란다.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가 '숭고함'이라는 감각이 예술과 삶에서 '위험, 공포, 모호함과 거대한 힘의 느낌'에 의해 유발된다고 주장할 적에 '배치도 그렇고 장식도 그렇고 감탄할 점이라곤 하나 없는' 스톤헨지 돌덩어리가 내뿜는 거대한 힘이 그러하다 하였다.




업보(業報, 원인과 결과)를 끊어내다


"에인절. 전 차라리 기뻐요- 맞아요, 기뻐요! 이런 행복은 오래 계속될 수는 없었어요. 제겐 너무 과분했거든요. 전 충분히 행복했거든요. 그리고 이젠 당신이 저를 멸시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게 되었어요!"


여덟 시를 알리는 시계가 치고 몇 분이 지나 깃대 위로 무엇인가 서서히 올라가더니 바람에 펄럭이기 시작했다. 검은 깃발이었다.


테스의 영혼은 그 순간 바람을 타고 숭고한 힘을 지닌 스톤헨지를 찾아들어 영면을 구하였을 것이다. 나는 무너져 내려야 했다. "빌어먹을!"




섬뜩한 기억 끝의 신비로운 스톤헨지  


지어진 목적을 제대로 모르니, 가장 큰 미스터리는 스톤헨지를 이루는 거대한 돌들의 출처와 운송 방식에 관한 것이 된다.

스톤헨지는 최근까지 영국 웨일스 지역에서 가져온 '블루스톤'과 약 25km 떨어진 말러버 지역에서 가져온 '사르센석' 두 가지 종류의 돌로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던 것이 이번에 블루스톤이 스코틀랜드에 있던 돌이란 연구 결과가 나온 것이다. 5000여 년 전 신석기시대에 저 거대한 돌을 수백 킬로미터를 지나며 실어왔다니... 그냥 아서왕 전설 속 마법사 멀린(Merlin)이 마법으로 들고 왔다고 믿는 게 머리가 가벼워지는 편이지 않을까 싶었다.




테스의 비극적 이야기 때문인지 스톤헨지는 오랫동안 초자연적이며 섬뜩한 분위기의 장소로 기억되었다. 그러기에, 실존하는 스톤헨지를 마주하며 어린 나이에 느꼈던 슬픔을 돌덩이 위로 투영해 보고 싶었다.


정남(情男)을 죽이고 도망치다 붙잡혀 처형되고만 여인을 두고 순결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19세기의 작가를 생각하며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이제 다음 행선지 바스(Bath)로 떠나볼 시간이다.  돌아서는 등 뒤로 스톤헨지 돌덩이에서 뻗어 나온 4월 늦은 오후 무렵의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물론 한줄기 바람도 불어와 귀 밑을 스쳐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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