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어디까지 가봤니
겨울이 깊어가고 있었다. 쾰른을 지나 남남서로 이어진 연속적 구릉의 길은 온통 하양이었다. 특히나 높고 깊은 곳이 더하였다.
"무슨 생각해?"
보통의 남자가 우윳빛 거짓말을 섞어 대꾸하는 그 질문에, 뜻밖으로, 약간의 허세만을 집어넣어 대답하였다.
"멀리 가자."
도시는 숨 막히는 초상. 도시의 잔영이 지루함을 못 이기고 제 풀에 죽어나갈 먼 곳으로 가자 하였다.
"멀리? 심리적 거리는 무엇으로 잴까?"
광활한 검은 숲, 무성한 초원, 화산 호수 마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땅 속의 마그마, 그리고 성긴 마을들. 아는 이 몇이나 될지 모를 불칸아이펠*로 가는 길엔 초고속 와이퍼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세차게 눈이 내렸다. 복잡하게 얽힌 도시 문명을 애도하는 서설이었다.
"독일 어디까지 가봤니?"
산 너머 넘어 깊은 숲 속. 불칸아이펠에서의 사흘 동안 오직 우리만이 순수한 이방인이었다.
마을의 촌노만이 힐끔거리다, 참지 못하고, 살가운 오지랖으로 인사를 건네왔다.
화산지대 지킴이 마을 다운(Daun)을 지나고서도 십 리쯤을 더 파고들었다. 백작의 숲(그라펜발트) 어드메에서 클래식한 파흐베르크 양식 호텔 하나가 보란 듯이 출몰하였다. 하양이 빼곡히 내려앉아 촌스러움을 덮었다.
그때부터, 호텔에서도, 눈썰매장에서도, 이따금 들르는 마을에서도 우리는 철저히 외떨어져 있었다.
아이펠 수제맥주, 브랏카토펠(Bratkartoffeln) 감자, 슈바인스학세(Schweinshaxe) 돼지족발, 먹고.., 수영장, 눈썰매장, 놀고... 도시와는 확연히 다른 단순함의 반복.. 멀리까지 온 위안이었다.
창 너머 아름드리 전나무엔 흰 눈이 소복하였다. 한 바람이 불었는지, 겨울 까마귀가 날았는지, 눈 꽃송이는 이따금씩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할로겐 전등 빛을 받은 흰 천 테이블엔 백합 향기 그윽하였다.
케이크 한 조각, 콜라 두 컵, 카모마일 차 한 잔..
멀리 온 여행. 무상무념의 풍경을 배경으로 뜻밖의 발견을 하였다.
'행복'
여행이 뭐 아주 특별할 필요는 없었다.
사흘 째 되는 날 아침, 차 위로 소복이 쌓인 눈을 털어내기 시작하였다.
"비더젠(Wiedersehen).."
도시로 돌아갈 물리적 거리를 재는 거야 무척 쉬울 일이었다. 차창에 얼어붙어 벗겨질 생각이 전혀 없는 찌꺼기 눈 마냥 그곳에 붙들어 매이고만 싶었다.
서울엔 초복이 지났다. 매미 소리 들리는가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무척 더운 날들이다.
그런데, 빛바랜 사진 속엔 아직 눈이 내린다.
아주 뜻밖으로, 절묘하게,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어느 대목을 떠올린다.
"사랑이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걸까요, 아니면 바보들만 사랑에 빠지는 걸까요?..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서로 불이 붙을수록 더 영리해지고 약아지며 지능적으로 술수를 쓰는 연인들 중에서도 특히 남자 쪽이 저는 아주 궁금하답니다."
내가 영리하고 약았을 적엔, 아주 먼 옛날이었고..
시큰둥한 거짓으로 "무슨 생각해?"에 대답할 적엔, 또 옛날이었고..
아예 대답하는 방법을 잊어버렸을 적엔..
눈 내린 사진 속으로 기억이, 생각이, 시간의 순서를 따라 차례대로 내려왔다.
그리고, 지금.. 그날의 여행이 내게 준 것.
'미안함'
멋쩍음에 내뱉어 보았다. "독일 어디까지 가봤니?"
그러길래, "희망은 과거에서 찾는 거야."
*불칸아이펠(Vulkaneifel): 벨기에 동부와 독일 서부에 걸친 낮은 산과 구릉지의 아이펠 화산지대. 아직 활동 중이다.
*마르(Maar): 지하수와 마그마가 만나 만들어진 수증기가 폭발하여 형성된 화산 분화구 호수. 세계적으로 불칸아이펠이 가장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