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한국항공 013편의 추락 사고로 인해 220여 명의 승객과 승무원들의 구조 작업이 한창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이곳 김포국제공항은 짙은 안개에 둘러싸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현장에는 013편 비행기 동체에 불길이 치솟고 있으며 경찰과 소방 인력이 투입되어 구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여러 여건으로 인해 구조 작업에 차질을 빚고 있지만, 대거 인력이 투입되어 사태를 진정시키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현장 취재에 KBC 리포터 문안개였습니다.”
TV 속 화면, 안갯속에서 불길이 솟구치며 화면 밖의 사람들에게도 열기를 전달한다. 그 화기를 느낀 시청자들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수많은 구조 인력이 들러붙어 013편의 동체를 절단하고 있다. 작업이 어려운지 몇몇 구조대는 진땀을 훔친다. 날카로운 전기톱 소리와 함께 불꽃이 공기를 가르며 터지고 강렬한 파열음을 낸다. 그곳은 공포와 혼란에 잠식된 지옥 그 자체였다. 각종 방송사에서는 앞다투어 실시간으로 중계했고,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불안과 애도가 뒤섞였다. 11월 19일. 전국이 푸른 물결에 휩싸였다.
기상나팔이 울리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늑장을 부린 탓에 종만은 선임에게 뺨을 두어 대 맞았다. 벌겋게 물든 뺨 자국이 마음에 스며든다. 지옥 같은 이곳을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종만은 하루빨리 이곳에서 탈출하여, 잘 빠진 정장을 입고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를 희망한다. 젊은 사장. 종만이의 욕심이다. 그는 아버지 인맥으로 좋은 대학교를 입학할 수 있었다. 사회에 만연하게 퍼져있는 학연과 지연은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이들에게는 최고의 무기였다. 가난한 이들이 외치는 소리는 그에게는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다. 지난 사회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이곳은 계급이 전부인 또 하나의 작은 사회. 아침이면 기상나팔 소리에 까치집이 지었는지도 모를 밤톨 머리를 하고, 눈을 비비며 아침 점호를 시작한다. 분명 엊그제만 해도 친구들과 단란주점에서 양주를 마시며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던 허황한 시절이 눈앞에 선하다. 그들에게는 통행금지도 소용없던, 소위 ‘있는’ 사람들의 시대였다.
그렇지만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던 그때, 입대는 피해 갈 수 없었다. 모든 병사는 시위 진압을 위해 충정 훈련을 시도 때도 없이 실시했고, 사회와의 소식은 단절된 지 오래였다. 그런 무더운 여름, 종만은 훈련병으로 입대했고, 부모님과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멋진 입대식을 치렀다. 그 당시 동년배인 수많은 젊은이는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때, 종만이는 사치를 부리며 귀를 잔뜩 덮은 긴 장발의 머리를 끝까지 자르지 않았다. 세상 건방지고 무엇이든 다 이뤄내겠다는 표정. 그는 여느 젊은이들처럼 날렵한 턱과 생기 넘치는 표정을 가지고 있다. 코는 살짝 복이 담긴 모양이고 눈은 동양스럽게 생겼다. 그런 그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편이 될 수도 있으리라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다.
“야! 김종만, 이 새끼야! 빨리 안 일어나?” “쿵” “이병 김종만!” 방탄모에 머리를 휘갈겨 맞는다. 정면으로 맞은 머리통에 혹이 생기고 그 주변으로 작은 혹들이 여러개 볼록 솟는다. 종만은 이등병이다. 이등병은 늦잠을 자면 안 되거니와 소대 내에서 누구보다 먼저 깨어있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물으면 입대를 늦게 한 탓, 재수 없게 생긴 탓이다. 그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고참들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가 무너져 내리며 공포에 질린 표정을 보고 나서야 고참들의 마음은 누그러졌다. 가혹한 시간이 조금씩 바스러져 흘러간다. 몇 번의 뜨거운 비와 더위가 지나가고 한여름의 가왕 매미의 퇴장.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며 곧 매서운 추위를 실감케 하듯 아침저녁으로 서리가 내린다. 이등병 4개월 차. 오전부터 부대가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화개장터가 된 듯 시끌벅적하다. 때때로 따뜻한 마음으로 건빵을 챙겨주던 당직 근무자 박오식 병장이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종만에게 이야기한다. “야, 김종만! 너 행정반으로 가봐라.” 종만은 뒤이어 빠르게 관등성명을 붙인다. “이병 김종만! 알겠습니다. 행정반으로 가보겠습니다.” 복도를 지나 행정반으로 향하는 그의 그림자가 유독 무거웠다.
“똑똑” “충성! 이병 김종만! 행정반에 용무 있어 왔습니다. 용무는 행정반 출입입니다.” 문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작게 들린다. 시끌벅적한 틈 사이로 종만은 행정보급관과 눈이 마주친다. 보급관은 약간은 어색한 미소로 종만을 자리에 부른다. “종만이, 이리 와서 앉아봐라.” 그는 관등성명을 외치며 군기가 든 자세로 빠르게 자리에 앉는다. 보급관은 단둘이 비밀 이야기를 하듯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인다. 그 말을 몇 마디 듣던 종만은 보급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쓰러지며 드러눕는다. 그리곤 가슴을 부여잡고 오열한다. 고참들이 붙잡았지만, 충혈된 눈에서 서러운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테이블에는 휴가계가 내던져져 있다. 그 서류에는 상급자가 작성한 듯 허락한 사인이 보이고, 흐릿한 시야 사이로 사연이 드러난다.
‘휴가 구분: 경조사 휴가. 이병 김종만의 부친 및 모친 추락 사고로 사망’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힘내세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상주에게 다가와 말을 건넨다. 그는 기계처럼 절을 하고 움직인다. 무언가를 먹는 것에 대한 욕심이 없으니 무감각한 상태로 밥알을 입에 넣다가 무심히 다리 위로 흘린다. 그의 바지에는 밥알이 잔뜩 눌어붙어 있다. 부모의 영정 사진 앞에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림자가 온몸을 덮친 것 같이 새까맣게 죽어있다. 그가 삶에서 보았던 희망이 전부 사라졌다. 자신을 추스르고 성숙한 척하기에는 그는 너무나도 연약한 사람이었다. 그의 슬픈 마음은 채로도 걸러지지 않을 정도로 바스러져,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날짜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체감도 못 하고 시간에 대한 관념도 없었다. 그의 부모님 장례식장에는 군사경찰이 동원되었다. 탈영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종만에게는 그 작은 자유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11월 19일 세상에 이름만 남겨진 껍데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