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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 라치오주 피우미치노. 모스크바를 경유하고 다시 이어진 두 번의 경유. 총 28시간의 비행으로 그는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꿈의 도시. 모든 것을 잃은 그의 마음이 새롭게 꽃피기 시작했다. 종만은 한껏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건넨다. 현지인들은 작고 우스꽝스러운 동양인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때론 야유를 보냈다. 종이에 정성 들여 쓴 주소를 보고 찾아가는 데만 꼬박 하루가 넘게 걸렸다. 중간중간 그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종만은 개의치 않고 부푼 꿈을 마음에 가득 담고 서둘러서 걸음을 옮긴다. 해가 질 무렵 멀리서 져가는 노을을 품고 있는 중세의 마을이 너무나도 멋져 보였다. 그 모습은 청년의 가슴에 닿으며 뜨거운 열정을 샘솟게 했다.
손에 쥔 종이에 주소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마침내 찾아온 곳. 있어야 할 공장이 보이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건 작은 올리브 나무, 몇 마리의 당나귀들. 그리고 저무는 태양뿐이다. 조금 더 내려가 보니 폐허가 된 공장이 한 채 있다. 공장이라고 하기도 뭐 한 작은 비닐하우스 수준이다. 밤이 늦은 터라 종만은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기 위해 입구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온통 거뭇한 공장 안. 손으로 더듬거리며 방을 찾아본다. 문을 하나 지나고 걸어가는데 또 다른 문 아래 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온다. 나방이 빛을 보고 뛰어들 듯 그곳으로 향하다가 발에 무언가 채며 소리를 낸다. “덜그럭” 문 뒤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점점 가까워져 온다.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입구로 손을 더듬으며 도망친다. “벌컥” 문이 열리고 주변을 둘러보는 사람들. 시끄럽게 소리치며 입구 쪽으로 다가온다. 한참 주위를 빙빙 돌며 소리를 낸 정체를 찾아내려 애를 쓰는 모습이다. 그리고 입구 앞에 놓여 있던 장식장의 문을 연다.
그 안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청년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우습게 생긴 동양인임을 확인한 그들은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그를 향해 주먹과 발길질을 마구잡이로 던져댄다. 순식간에 피떡이 된 얼굴. 이대로 있다간 죽을 것만 같아서 웅크리고 있던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두어 명의 사내를 밀쳐내며 뛰쳐나온 종만은 입구를 향해 달리며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 맞으면서 다리가 부러진 듯하지만, 구타를 당하며 송곳에 찔리는듯한 고통에 비하면 참을만했다. 다급하게 입구의 문을 열고 외치는 한마디
“살려주세요! 여기 사…. 읍”
두 번을 말하기도 전에 누군가가 뒤에서 입을 막는다. 다시 시작되는 무차별 폭행. 점점 정신이 흐려지며 생과의 줄을 놓아가는 청년. 한동안의 구타를 끝내고 그들은 다 즐겼다는 듯 그를 발로 굴리며 바깥으로 내보낸다. 만신창이가 된 얼굴은 그의 신원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졌다. 반밖에 떠지지 않는 눈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그들은 마피아라기보다 그저 동네 양아치들 같았다.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그곳도 살던 곳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밤의 찬 공기에 몸은 점점 싸늘하게 식어가고 피 냄새를 맡았는지 몇 마리씩 몰려다니던 들개들이 주위를 빙빙 돌아다닌다. 그는 이대로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잃어간다. 빨갛게 멍울진 시야 사이로 점차 세상이 검게 물들어간다.
검은 공간에 온몸이 떠 있다. 무중력 상태인 듯 둥둥 떠다니다 이내, 통증이 느껴진다. 그리고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종만은 살아있음을 직감하고 눈을 번쩍 뜬다. 긴박하게 외치는 사람들의 말. 알아들을 수 없지만 매우 긴박하다. 상황을 파악하니 응급실인 듯하다. 길게 나 있는 복도를 통해 실려 가고 있다. 복도 끝 쪽, 통으로 된 큰 창문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곤죽이 된 상태의 모습. 그리곤 눈이 감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정신을 차린 종만. 긴급한 치료를 마친 상태로 팔과 다리, 머리에 붕대가 감겨있다.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어금니도 부러진 듯하다. 잠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는데 간호사들의 말이 들린다. 빗발치는 그들의 말 사이로 하나의 단어가 날리며 귀에 꽂힌다.
“유로” 이탈리아에 화폐 단위다. 아마도 돈을 이야기하는 듯싶었다. 종만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없었다. 그는 두 다리가 잘 움직이는지 확인해 봤다.’ 에이 씨, 걸을 수는 있겠네.’ 그러고는 잠시 간호사들이 없는 틈을 타서 병원에서 도망친다. 우습게 생긴 작은 동양인. 매우 다쳤지만,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끔 스쳐 지나며 그를 흘깃 보는 환자들만이 있을 뿐. 종만은 병원을 유유히 빠져나오며, 생각한다. ‘죽어야겠다.’ 그렇게 올라선 파브리치오 다리 위. 그곳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의 이름은 가브리엘라. 강한 사람 “영웅”을 뜻한다. 그녀는 나의 구원자다.
점점 낮아지는 기온에 식재료를 구하러 장터에 가는 일이 쉽지 않지만, 종만은 새로운 곳에 터를 잡은 지금을 사랑하기로 했다. 현재의 삶을 살아가며 요리를 통해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거나 슬픔을 덜어내어 주는 것. 그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고, 그것을 하고 싶었다. 종만은 요리를 통해 삶을 이해하고 성장하는 중이다. 식재료가 담긴 장바구니를 손에 들고 차가워진 다른 한 손은 입김을 불어넣어 온기를 전달한다. 가게 앞에 도착해서 칠이 다 벗겨진 문고리를 잡고 돌린다. 빨간색 문이 열리고 어스름한 가게 안이 점차 보이기 시작한다. 이윽고 주방의 문이 열리며 한 남성이 소리친다. “동양 꼬마! 늦었어.” 뒤에 몇 마디를 더 하는 듯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앞에 있는 남성을 쳐다본다. 하얗고 세로로 긴 길이의 모자를 쓴 셰프가 종만을 나무란다. 깔끔하게 세탁된 순백의 조리복을 입은 그는 수염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보드라워 보일 정도다. 모자 사이로 보이는 적갈색 머리카락, 진한 갈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키가 큰 그는 종만을 매우 깔보듯 쳐다본다.
이름은 안토니오. 가브리엘라의 아들로 어릴 적부터 그녀로부터 요리를 배우고 익혀 왔다. 지금은 기력이 점점 빠지고 있는 가브리엘라를 대신하여 이곳, 베네베네를 운영하고 있다. 그녀의 음식에서 생명을 느낄 수 있다면 그의 요리엔 생명과 예술이 담겨있다. 하지만 갑작스레 연을 맺게 된 종만을 굉장히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같은 나라 출신도 아닌 자주 마주칠 수 없는 키 작은 동양 청년. 그런 그가 상당히 거슬리는 모양이다. 아침부터 아주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으며 매일 종만을 괴롭힌다. 하지만 매일 저녁 할머니가 해주는 무심한 듯 따뜻한 배려가 담긴 요리를 맛보며 다양한 세상을 느끼고 치유를 받는다. 때로는 지상의 푸릇한 공간을 뛰어놀던 초식 동물의 세상을 느낄 수 있는 스테이크. 또 깊은 바다의 짠 내와 자유롭게 물속을 헤엄치는 모습을 담은 해산물 파스타. 진하고 여운이 감도는 요리를 맛보며 삶의 성숙함과 요리의 실력도 출중해지는 종만이었다.
이곳 베네베네에는 많은 손님이 드나들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입맛을 사로잡은 단골들이 많다. 그 단골들은 매주 주말 저녁 가족들과 함께 이곳에서 식사한다든지, 점심을 함께하며 단란한 시간을 보낸다. 베네베네가 주는 편안함은 혼자가 오던 여럿이 오던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이다. 마치 엄마의 품 안에서 즐거운 식사를 하던 그때처럼. 따뜻하다. 하지만 이렇게 잘 운영되고 있는 곳에서 불협화음이 시작되면 금세 표가 난다. 깔끔하고 정성이 담긴 안토니오의 요리들이 조금씩 신경질적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재료를 다듬는 종만의 불만도 가장 기본인 재료에 스며들었다. 그들이 내놓는 요리가 변하기 시작했다. 베네베네가 변했다. 맛이 없다며 돌아가는 손님들이 아주 가끔 생기기 시작했으며 식전에 내어주는 빵이 좀처럼 씹기 어렵게 딱딱해지고 있었다.
“어이, 동양 놈!” 안토니오는 종만에게 대부분의 호칭을 동양 놈이라고 불러댄다. 요리에 정성이 빠지니 그 안에 생명이 담길 리가 없었고 그것을 몰랐던 줄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점점 언성이 높아진다. 종만은 안토니오가 하는 말을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동양 놈이라는 단어를 귀에 피가 나도록 들어와서 이젠 익숙해진 단어가 되었다. 그렇지만 매번 들을 때마다 자존심이 상했다. 가브리엘라의 배려에 그동안 참아낼 수 있었지만, 점점 노쇠한 그녀는 가게에 나오지 않는 일이 잦아졌으며 다 꺼져가는 양초처럼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방,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던 그때. 안토니오가 소리친다.
“야! 동양인!” 안토니오의 신경질적인 호통에 더 이상 참지 못했던 종만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큰 소리로 외쳤다. “나 김종만이야!, 동양 놈이 아니라고!” 억눌린 마음이 얼마나 심했는지, 밖에 있던 손님들에게도 그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잠깐의 정적. 안토니오는 이탈리아 남부 사람이다. 남부 사람의 다혈질적인 성격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다. 그는 들고 있던 조리도구를 내던지면서 종만의 멱살을 잡아 올린다. 키가 작은 종만은 멱살을 잡히며 까치발을 들고, 목이 조이는지 얼굴이 점점 검붉어진다. 하지만 종만도 갱단에게 두들겨 맞으며 한층 강해진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불리한 체격에도 종만은 함께 멱살을 잡고 버텼다. 그리고 그 소란스러운 소리는 식당에 온 손님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불편한 조용한 실내. 오로지 주방만이 떠들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