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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만이와 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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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유현

시간이 흐르고 가브리엘라의 건강은 섭리에 따라 자연스레 녹이 슨다. 안토니오와 알레산드로 그리고 종만. 모두 그녀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특히 아들인 안토니오는 점점 다가오는 이별이 무섭고 두려웠다. 정해지지 않은 삶의 순간들이 그의 하루를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저녁 장사가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 손님들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향했고 종만과 안토니오 둘이 남아서 주방과 가게를 마감하고 있다. 이제는 제법 이탈리아어가 익숙해진 종만이 안토니오에게 말을 건넨다. “이봐! 안토니오. 밖에 식탁에서 잠시 앉아서 기다려주지 않겠어?” 그 말을 들은 안토니오는 궁금한 표정이었지만 알았다는 투로 손을 들었다 내리는 제스처를 한다. 주방을 나가며 그의 뒷모습에 그림자가 짙게 깔린다. 주방에 홀로 남겨진 종만은 무언가를 잽싸게 꺼내며 준비한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모습에, 어느덧 그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힌다. 프라이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얇게 두드린 고기를 올려놓는다. “차이의” 육질과 지방이 기름에 튀겨지며 구워진다. 고소하고 달큼한 향기가 가게 안에 퍼진다. 이쯤 되면 궁금해하며 주방에 들어와서 한소리를 떠볼만하지만, 안토니오는 그럴 여력조차 없다. 촉촉함을 담아 바싹하게 익혀낸 목살 스테이크의 빛깔은 묵직했다. 그리고 소금과 후추, 레몬을 얇게 저며서 툭 얹는다. 종만은 완성된 접시를 들고 식탁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앉아 있는 안토니오를 향해 간다. 자박거리며 식탁 앞에 도착한 종만은 접시를 안토니오 앞에 내려놓는다. 그러고는 그의 앞에 앉으며 이야기한다. “Mangiare(먹어)” 그제야 안토니오는 닫고 있던 후각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환상적인 냄새에 안토니오의 후각세포들이 춤을 추며 살아나기 시작한다. 입에 침이 고이기 시작하고 온몸의 감각이 열리기 시작한다. 슬펐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음식 생각으로만 가득 찬다. 종만에게 짧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gràzie(감사합니다.)”



종만이 만든 돼지목살 스테이크를 한입 크기로 썰어서 입안으로 가져간다. “팡, 팡” 바삭한 식감 사이로 육즙이 뿜어져 나온다. 어릴 적 가브리엘라가 해주었던 그 맛이다. 안토니오는 그녀와의 이별에만 빠져서 현실을 보지 못하고 소중한 순간들을 놓치고 있었다. 그리고 종만의 스테이크를 맛보며 그 사실을 깨우쳐간다. 앞에 앉은 종만은 어쭙잖은 단어들로 말을 이어간다. “안토니오, 나는 한국에서 부모님을 사고로 잃었다. 우연히 이탈리아에 오게 되었고 죽기 직전까지 갔지만 가브리엘라가 날 살렸다. 나 이렇게 여기서 요리하고 있다. 요리는 사람을 살린다. 나는 너에게 요리로 희망을 준다.” 마치 5살짜리 꼬마가 이야기하는 듯 어눌하지만, 감정 하나하나 눌러 담은 그의 단어에는 힘이 있었다. 그 힘은 안토니오의 마음에 닿는다. 사람을 살리는 요리. 가브리엘라의 신념. 그녀가 추구했던 방식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어받은 안토니오.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그녀와 함께 이곳에서 만들던 기억들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엄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의연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동안 버티고 버틴 마음들이 추억과 함께 쏟아져 내려온다. 종만은 말없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작은 위로를 전한다.



이탈리아 남부의 화창한 가을. 아직도 선연하게 떠올려지는 그녀와의 만남. 죽으려고 올라선 다리 위에서 자신에게 호통치던 가브리엘라. 그녀가 없었다면 종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국화를 한 송이 들고, 지난 자신의 모자람을 사랑하고 아껴주었던 그녀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헌화한다. 그 뒤에 따라오는 안토니오 밤새 잠을 설친 모양이지만 종만 과의 저녁 이후 그의 삶은 한층 나아졌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다. 주눅이 들지 않았으며 예전처럼 고결한 가브리엘라의 아들. 안토니오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녀의 관 위로 헌화와 깊은 추억 몇 방울이 떨어지며 번져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는 일은 쉽지 않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들의 마음속엔 그녀가 살아 숨 쉬며 이야기될 것이다. 가브리엘라의 장례식은 화창하고 높은 가을 하늘의 환대를 받으며 마무리되었다.



며칠이 지나고 종만은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도망치듯 떠난 그곳에서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삶은 언제나 마음먹은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이곳에서 배운 삶의 자세를 가지고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처음에는 서로 소원했지만, 가브리엘라를 사이에 두고 여러 사건을 거치며 형제가 된 안토니오와 깊은 우정을 나누며 포도주를 한잔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이탈리아 이름을 지어 준 베네 베네 단골 알레산드로와도 잔을 나눈다. 안토니오는 종만에게 이야기한다. “형제여, 죽기 전에 한번 봅시다.” 뒤이어 알레산드로도 종만에게 한마디를 한다. “알레산드로! 나도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한국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네. 언젠가 화창한 날에 다시 보자고!” 유쾌한 그의 말에 남부 사내들의 밤은 더욱 짙어진다. 해가 지고 깊은 어둠이 되도록 가게의 불은 꺼지지 않았고 창문이 이따금 열리며 가곡이 흘러나오는 소리만이 가을밤을 채웠다.



한국으로 들어온 지 일 년. 귀국하자마자 했던 일은 이탈리아에서 배워 온 신념을 펼치는 것. 종만은 도심지에서 작은 동네에 가게를 하나 마련했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꾸미고 벽엔 가브리엘라, 안토니오, 알레산드로와 함께한 추억들도 고스란히 사진으로 남겨놓았다. 빨간 체크무늬 식탁보에 이탈리아에서 보았던 비슷한 의자까지. 한국의 이탈리아 베네베네가 탄생한 순간이다. 매일 아침에 장터에 가서 신선한 재료를 사서 다듬고 요리를 내어 누군가의 삶을 비추어주는 것. 그것만이 알레산드로의 세상이다. 어느 날 새벽같이 일어나 장터를 향해 간다. 장터에서 질 좋은 해산물을 고르고 가격도 저렴하게 깎아서 수지맞았다고 생각하며 가게로 돌아가는 종만. 무엇이든 좋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한참 남았고 운동도 할 겸, 평소 가던 길 말고 다른 길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한강을 잠시 바라보며 다리 위를 걷고 있던 그때. 다리 위에 있던 한 소년을 발견한다. 햇빛에 가려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소년은 흡사 자기 모습과 아주 닮아있었다. 지난날 가브리엘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늘이 드리워진 소년에게 요리를 내어주려 걸어간다.


나는 생명을 불어넣는 요리사 알레산드로 김종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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