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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기차

프롤로그

by 노유현

늦은 밤 기차역. 차가운 커피를 손에 들고 간이 의자에 앉아 열차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남자. 내뿜는 입김이 하얗게 번지며 그 속에 담긴 고민이 흩어진다. 안내 방송이 흐른다. “22시 46분 강릉행 무궁화호 1446번 열차가 타는 곳 4번으로 들어옵니다.”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철길을 긁는 굉음과 함께 열차가 떠난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 근심만 남는다. 창밖으로 어둠과 노란 불빛이 흐른다. 도심은 멀어진다. 작은 마음의 방. 수십 개의 문들 사이로 남자는 나왔다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무언가를 찾는 듯 바쁘게 움직인다. 열차 안으로 어둠이 짙어진다. 누군가는 꿈나라를 탐험하고, 누군가는 깊은 상심에 빠져있는 기차. 기차는 누군가의 여정이자 삶이었다.



새벽 1시 30분, 찬 공기와 함께 제천역에서 한 여성이 탑승한다. 단발머리에 시원하게 뻗은 콧날이 인상적이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에 차가운 커피가 들려 있다. 그녀는 두리번거리다 자리 번호를 확인하고는 자리에 앉는다. 새벽의 찬 공기와 실내의 따뜻한 공기가 맞 닿아 창문에 김이 서린다. 여자는 손가락을 움직이며 글자를 써 본다. “김지수” 세글자의 이름을 쓰고는 창밖을 본다. 마음이 저릿한지 눈가에 그 이름이 맺힌다. 열차는 마음의 준비도 없이 다시 출발한다. 기다림은 온전히 사람의 몫이다. 기차는 누군가의 기다림이었다.



이른 새벽의 공기가 방울지며 창가에 맺히고 날은 서서히 밝아온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둘 눈을 뜨고 새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불편한 기색 없이 마음속을 한참 거닐다가 잠이 든 지수. 결국 수많은 마음에 방 중 자신이 찾던 방을 찾은 듯 고민 없이 일어난 모습이다. 곧 최종 목적지 강릉에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흐르고 마지막까지 꿈나라에 있던 사람들도 일어나서 내릴 채비를 한다. 여자도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는지 손거울로 얼굴을 살핀다. 그러고는 자신의 속내가 들킬까, 조금 부은 두 눈에 짙은 눈 화장을 그려본다. 강릉역에 열차가 정차하고 사람들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한다. 짐칸에 놓인 짐을 내리고, 군인들은 모자를 똑바로 고쳐 쓴다. 그렇게 사람들의 하루가 시작된다.



밤새워 마셔대던 커피가 한 모금이 남았다.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지 지수는 고개를 들어 한 모금에 커피를 털어 넣고는 음미한다. 식도를 따라 쭈욱 내려가는 커피. 적당히 운동이 필요했던 그의 목에 갑작스레 들어온 커피가 걸린다. 사레가 들리고 침을 흘리며 기침하는 지수. 기억을 잃은 듯 매번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지수는 역시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다. 기침하고 있던 그를 멀리서 누군가 흘긴다. 새벽녘 제천에서 탑승해서 창문에 글씨를 쓰던 여자. 지수에게 다가가는 그녀. 그리고 고개를 떨구고 기침하는 그에게 이야기를 건넨다. “괜…. 찮아요?” 떨림이 가득한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그의 귓가를 맴돌다가 흐른다. 익숙한 목소리. 애틋한. 보고 싶고 듣고 싶던 그 목소리. 사레가 들린 탓인지, 잔뜩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들며 그녀를 바라보는 지수.



“혜리야.” 진하게 밀려오는 그간의 그리움과 서러움. 그밖에 설명 못 할 여러 가지 것들이 뒤 섞이며 감정이 된다. 말라버린 눈가에 물밀듯 밀려오는 사랑. 세상이 갈라놓은,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둘. 얼떨결에 다시 만나는 순간은 예상하지 못했다. 억눌렀던 감정은 분수가 터지듯 터져 나온다. “보고 싶었어.” 지수가 입술을 가볍게 깨물며 말하자 혜리가 미소로 대답한다.” 알아,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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