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것들에 대한 집착
하나.
기억력이 더 좋았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기억력이 더 좋았더라면, 사는 모습이 지금보다는 덜 불편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더 많은 꿈과 기회를 붙잡고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삶에는 어떤 단단함이 묻어있어 보였다. 그리고 그 능력은 내가 가질 수 없는 먼 곳에 놓여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그 거리를 직접적으로 좁히는 법을 도무지 모르겠다.
어떤 사실을 오래 기억하는 것도 서툴지만, 워킹메모리는 특히나 끔찍한 수준이다. 내 정신은 극히 제한된 비좁은 영역에만 초점을 맞추고는, 그 밖의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것 같다. 평소에 워낙 잊어버리는 것이 많아서, 무사태평하게 잘 지내다가도 불현듯 불안감이 엄습할 때가 간혹 있다. 혹시나 삶에서 무언가 중요한 할 일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늘 애용하던 이어폰이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소지품을 잃어버리는 것은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번에도 문제는 역시, ‘도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늘 그렇듯, 퇴근 후 샐러드로 간단히 저녁을 해 먹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오디오북을 들으며 집 근처로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이어폰을 늘 두던 서랍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이어폰은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어디서 잃어버린 걸까? 마치 탐정이라도 된 듯이 내 행동의 순서를 꼼꼼히 재구성해 본다. 아마 산책길에서 집에 들어오기 직전 바닥에 떨어뜨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집 안에 없지. 하지만 그렇다면 서랍장 위에 이어폰을 올려놓은 내 일련의 행동들에 대한 기억은 전부 거짓이란 말인가? 그 순간, 혹시 내가 꿈이라도 꾸었던 것일까?
소지품을 잃어버렸다는 속상한 감정보다는, 그저 궁금해서 미치겠다. 이 좁은 공간 어디 갈 곳도 없는데, 그냥 사라져 버렸으니까. 혹시나 복도며 화장실이며 구석구석 다 찾아봐도 이어폰은 나오질 않았다. 마치 다른 차원의 공간이라도 열려 그 안으로 휙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결국 나는 똑같은 이어폰을 다시 구입했다.
둘.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의 두뇌는 경험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저장하는 게 아니라 영화 편집자처럼 끊임없이 자르고, 버리고, 순서를 바꿔서 새로 이어 붙인다. 즉 끊임없이 기억 조작 왜곡이 일어난다. 그래서 어떤 사실을 기억한다는 그 사실 자체를 우리는 믿을 수가 없다. 무언가를 기억하는 그 순간, 이미 그 자리에는 기억의 왜곡, 즉 망각이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기억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말은 그 대신 무언가를 잊어버렸다는 말일 수도 있다.
만일 망각이 기억보다 더 자연스러운 삶의 본질적인 측면이라면,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사실 자체가 더 특별한 사건이고, 따라서 무언가를 잊어버렸다고 해서 굳이 호들갑을 떨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자꾸 잊어버린다는 것은 분명히 불편한 일이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줄이느냐는 항상 과제거리이다.
내가 그런 약점을 보완하는 방법들이 몇 가지 있다. 누구나 다 쓰는 방법들이다. 일단 메모를 한다. 그리고 가끔씩 기억법을 사용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는 집안에 구획을 나누어 늘 놓던 자리에 물건을 놓는 습관이 있다. 물건을 정리하는 나만의 방식이 있는데, 어떤 물건의 자리를 지정해 주기보다는 그 물건이 놓여야 할 공간적 영역을 지정해 놓는다.
가령 펜이라면 책상 위 어느 위치에 있어도 상관없지만 책상 바깥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식이다. 나가는 순간 잃어버리니까. 그렇다고 너무 강박적인 방식으로 정리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력에 부담을 주는 또 다른 방식이다. 그렇게 물건이 제 영역에 놓여있기만 하다면, 그 안에서 아무리 무질서해 보여도 일절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내 방은 얼핏 보면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듯 조금 산만해 보이지만 나름대로의 질서 아래 잘 조직화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건정리도 기억을 관리하는 하나의 공간적인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어폰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 역시 늘 있던 자리에 머물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나도 사라질지 모르니까.
셋.
학창 시절 암기과목을 정말 힘들어했다.
그래서 공부를 나름 열심히 하는데도 성적이 늘 나빴다. 좋든 싫든 기억을 해야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이해하면 기억에 오래 남는다지만, 기껏 이해해 놓은 지식도 기억을 못 해서 적절한 순간에 적절히 써먹지 못했다. 내가 힘들어했던 과목 중 하나가 수학이었다. 사람들은 수학이 암기과목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내겐 그랬다. 공식을 외우고 익혀야 하니까. 그 공식을 익히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고등학교 두 번째 학년 첫 번째 중간고사 수학 시험에서 전교 꼴찌를 했다. 수학 선생님이 날 교무실로 따로 불러내렸고, 그 후 달마다 따로 대면 상담을 받아야만 했다.
워킹메모리가 워낙 빈약하다 보니까 무엇을 암기한다는 그 행위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래서 외국어를 배울 때도 단어장을 만들어서, 단어나 표현 자체를 따로 암기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여기에는 외국어 학습에 관한 나만의 원칙이 있는데, 모르는 단어를 미리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상황 속에서 먼저 맞닥트리고 곤란을 겪은 다음에야 비로소 사전을 찾아본다. 그러고 나서도 따로 외우지 않는다. 저절로 잊어버리게 내버려 둔다. 그리고 또 곤란을 겪고, 또 사전을 찾고, 또 잊어버린다.
그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생활 속에서 동기가 부여되고, 기억과 망각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 안에 단어나 표현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남게 된다. 결코 효율적인 방식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확실한 방식이다. 특별한 방법론도 아니다. 결국은 누구나 그런 식으로 배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런 식으로 유창함을 획득하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국 생활에서 최소한의 생존은 보장해 준다. 나는 그렇게 스페인어와 영어를 배웠고, 지금은 불어를 배우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힘들여 외우지 않으면 잊어버린다고 걱정을 표하지만, 내가 볼 땐 잊어버림에 대한 태도 차이인 것 같다. 나는 스스로가 기억력이나 암기력이 빈약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잊어버림을 친숙하게 대한다. 잊어버리고 나면 조금 짜증을 낼 뿐이다. 같은 단어를 바보처럼 맨날 찾고 또 찾아도 더 효율적으로 시간을 줄일 방법을 찾지도 않는다. 물론 지갑을 잃어버리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단어쯤이야 자꾸 잊어버려도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리지 않느냐고? 그 말도 맞는 말이지만, 독서실에서 암기장을 만들고 사전을 통째로 외운다고 외국어를 더 빨리 배우는 것 같지도 않다.
나는 그렇게 나쁜 기억력을 가지고도 외국어를 두 개나 배웠다. 내 안에서 기억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에 대해 조금 이해를 가진 덕분일 것이다. 기억을 잘한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한 번 척보고 줄줄 외워내리는 그런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재능을 지닌 사람들도 있다. 암기력이 좋은 사람들이 더 일찍 좋은 기회를 얻고, 워킹메모리가 좋은 사람들이 사회생활이나 업무에서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사회적 성취도 더 높다. 부러운 감정이 들기도 하지만, 자신과 거리가 먼 능력에 대한 시기심은 일찍 버리고,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핸드폰을 바꾼 지 몇 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번호를 외우지 못해 은행 같은 곳에서 종종 당황한다. 그렇다고 손바닥 같은 곳에 문신으로 새겨 넣을 수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온갖 종류의 사실들을 억지로 기억하려는 대신, 자연스럽게 기억되는 것들만 잘 챙겨 주기만 해도 삶을 꾸려 나가기에 충분할지도 모르겠다. 조금 불편할 뿐이다. 결국 약점이었던 수학도 그런 식으로 조금씩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대학에 들어갈 정도의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요즘은 다행히도 스마트폰이 기억에 대한 부담을 많이 덜어준다. 좋은 세상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일종의 통제 욕구일 것이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일은 분명 두렵다. 기억은 지식을 의미하고, 그 지식은 능력이나 재산이며, 또 권력이다. 또 자꾸 무언가를 잊어버리다 보면, 마지막에는 자기마저 잃어버릴까 두렵게 된다. 정체성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따라오고, 그 너머에 놓여 있는 소멸과 죽음의 이미지가 우리를 두렵게 한다. 무언가를 기억하려고 애쓰는 일은 삶 자체 놓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것과 같다. 기록을 하고 사진을 찍고, 작품을 남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사람이 그러한 활동들에 능숙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꾸준히 기억을 축적하고, 자신의 삶을 단단하게 다져나갈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기억을 그때그때 건져 올리고, 그 기억으로 그물을 짠 다음 그 위에 잠시 한숨 쉬며 머물다 갈 것이다.
전부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넷.
기억이란 정말 다루기 까다로운 대상이다.
이 모든 기억과 망각의 반복되는 삶의 구조 속에서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살다 보면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또 잊기 싫어도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다. 마치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있고, 원치 않아도 자연스럽게 가져지는 것들이 있듯이 말이다. 그렇게 기억은 항상 통제에서 벗어난다.
한 친구가 최근에 재즈를 새로 즐기기 시작했다며 로벤 포드 공연 영상 링크를 보내주면서 말한다.
"사람들이 왜 재즈를 듣는지 요새 좀 알 것 같아."
그 링크를 클릭하고 영상을 틀었다. 어디선가 귀에 익은 선율이 흘러나온다. 문득 어떤 기억이 스쳤다.
"재즈 좋지. 나도 한 십 년 전에 이 아저씨 연주 많이 들었던 듯."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십여 년 전에 그가 보내준 것과 정확히 똑같은 음악을 그 친구에 권했다가 욕을 ‘뒤지게’ 얻어먹었던 사실은 굳이 밝히지 않았다.
낚시와 캠핑을 즐기러, 남해안을 가기로 했다. 차를 몰고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고 있던 중이었다. 나는 차 안에서 듣기 위해서 MP3 음원을 잔뜩 준비했다. 그런데 실수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친구에게 새로운 음악을 소개해 주겠다는 의도는 좋았지만, 오로지 내 취향으로만 선곡을 했다는 점이었다. 그 안에는 로벤 포드도 있었고, 래리 칼튼은 물론 팻 메스니도 있었다. 조금 빠른 비트의 음악을 위해 마커스 밀러의 베이스 연주곡도 준비했다.
운전대는 그 친구가 잡고 있었다. 나는 음악을 차 오디오 시스템에 연결하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잔잔하고 부드럽게 끝없이 변주하며 이어지는 재즈 선율에 맞추어, 내 턱이 어느새 까닥 거린다. 문득 그 친구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굳어있었다. 음악을 전혀 즐기고 있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고집했다. 너도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내가 재즈를 듣기 시작한 것은 군제대 후, 음악을 전공하던 한 친구에게 음반 하나를 선물 받으면서였다. 컨템퍼러리 재즈라는 단어도 그때 처음 들었다. 하얀색 커버의 포 플레이 베스트 앨범이었다. 그 음악을 처음 듣는 순간, 온몸을 휘감던 오글거림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까지 클래식을 주로 듣던 내게, 그런 종류의 달착지근한 음악은 거부감을 일으켰다. 하지만 비록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한번 적응하고 나니 블루스나 다른 비슷한 장르를 알아서 찾게 되는 건 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 친구에게도 새로운 세계를 소개해 주고 싶었다.
그때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는 제법 민감한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개인의 사회 참여에 대한 의무감의 딜레마 뭐 그런 비슷한 주제를 개인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을 굳이 여기서 소개하지는 않겠다. 운동권과 관련된 그 친구의 사적인 경험담이었다. 아무튼 그러다 갑자기 무언가 심정이 틀어져서 그 친구의 짜증이 연쇄적으로 폭발했다. 그 불똥은 내 선곡에도 튀었다.
"귀에 닿지도 않는 걸 굳이 참고 들어야 하냐고!"
어색한 정적이 한 동안 감돌았다. 우리의 음악적 취향은 생각보다 많이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뜨거운 한 여름날, 서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고속도로 위의 푹푹 찌는 차 안은 재즈를 즐기기에는 적합한 공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원한 가을밤 홍대 재즈바에서 흑맥주와 함께였던 상황이라면 반응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내가 선곡한 그 음악들이 그 친구의 짜증을 부추겼음을 스스로 인정해야만 했다. 그날은 그냥 그 친구가 좋아하는 음악을 더 신경 써서 골라왔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 친구는 그 순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자신이 듣고 짜증 냈던 음악이 로벤 포드였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고, 자신이 그렇게 화를 냈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는 마치 나도 한때 재즈를 즐겼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 똑같은 음악을 조용히 내게 권하고 있었다.
나는 이 사실이 그저 재밌을 뿐이다. 나쁜 기억력이 나만의 특권은 아니라는.
다섯.
첫사랑 때의 일이다.
나는 여자친구에게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하고 또 하곤 했다. "넌 어떻게 그 순간만 영화처럼 차르륵 기억하냐." 여자친구가 그런 말을 했을 때, 문득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리고 슬픈 감정이 들었다. 어쩌면 그 친구와 함께 했던 몇 년 동안, 가장 의미 있었던 순간들은, 내가 결코 기억해내지 못할 일상의 잔잔함 아래에 묻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가장 짜릿했던 첫 만남의 순간만을 반복적으로 호출해내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당신이 살아가면서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부분들이 항상 가장 의미 있는 순간들은 아닐 것이다. 기억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더 중요성을 부여받겠지만, 어쩌면 정말로 중요한 순간들은 기억과 상관없을 지도 모른다. 말장난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의 삶은 당신이 기억을 하든 못하든 그 자체로 매 순간이 소중하다. 당신이 누구냐에 상관없이 당신의 삶이 소중하듯이. 당신의 삶이 얼마나 성공적이냐에 상관없이 당신의 삶이 소중하듯이 말이다.
물론 그 기억조차 못하는 순간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정답은 없다.
아무리 기억하고, 기록하고, 사진을 찍어도 손아귀에 쥐는 기억은 한 움큼, 빠져나가는 기억은 대부분이다. 또 보통은 그냥 기억나는 대상에 집중하지 그 여백이나 뒷면을 들여다보려 하지는 않는다. 기억나지 않는 작은 것들을 기억해 내려는 시도에는 에너지가 든다. 하지만.
다시 반복해 보자. 그것도 과오라면, 그때 내 과오는 몇몇 특정 기억에 사로 잡혀서 삶에서 계속 흘러가는 작은 것들을 놓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몇몇 기억에 묶였고, 그래서 같은 감정만을 계속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때, 만일 내가 눈을 뜨고 나날이 겪는 작은 일들에 더 초점을 맞추었더라면, 내 감정은 덜 짜릿하고, 더 잔잔했겠지만, 내가 놓치는 것들은 더 적었을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은 보통 과거의 대상들이다. 미래는 기억할 수가 없다. 과거에 시선이 너무 오래 머물면, 때로는 현실도 놓치고, 더불어 미래도 놓친다.
기억하기 때문에 삶이 구축되지만, 한편으로는 기억하기 때문에 삶을 놓친다.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비고정적인 어떤 대상일 것이다. 일시적으로 뭉쳤다가 다음 순간 공중으로 흩어져 버리는 먼지 덩어리 같은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쌓아가고 있다는 환영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기억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그토록 불안해한다.
하지만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는 사실도 하나 있다.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중요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인간의 두뇌는 내가 지금 들어서 있는 현재의 공간 지각에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한다.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 내 몸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내 정신은 과거와 미래로 방황하다가 흔적도 없이 흩어져버릴 것이다. 그래서 언제든지 현실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내 몸뚱이에 고마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몸관리를 잘해야지. 또 기억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지. 조용히 되뇌어 본다. 그러다 언젠가 내가 치매에 걸려 육신만 남기고 이 세상에서 증발하듯 사라진다 해도 너무 슬퍼하지는 말아야지. 그렇게 되뇌어 본다.
그 친구가 그렇게 재즈를 권해준 것처럼, 그렇게 사람은 변한다. 바로 어제 일어난 일도 제대로 기억하기 힘든 것처럼, 하루하루 취향도 변하고, 생각도 변하고, 태도도 변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아무런 억지도 모순도 없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만났다가 어느새 원수지간이 되더라도 조금 안타까운 이야기일 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반대로 티격태격하며 만났다가도 어느새 정들고 사랑하는 사이로 변하는 이야기는 아예 스크루볼 코미디처럼 장르화되어 있기도 하다. 대중스타는 팬들이 등을 돌릴 때마다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팬들은 그저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에 따라 상대를 갈아탄다.
망각은 이러한 모든 변화의 과정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듯하다. 변화란 때로는 아쉽지만 때로는 좋은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자꾸 잊어버린다 해서 크게 불평할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그 친구도 시간과 함께 돌고 돌아, 우리는 같은 음악적 취향을 즐기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웰컴 투 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