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라켄에서의 마지막
빗방울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오늘은 비가 오나 보다. 스위스도 제주도만큼이나 날씨가 흐리고, 비가 많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가진 제주도에서 5년을 넘게 살고 영국에서 갑자기 내리는 비에 충분히 단련되어 있었다. 오늘은 리기산 여행이 예정되어 있는 날이었다. 몸이 움직여 지질 않았다. 어제 먹은 맥주가 조금 과했는지 얼굴과 몸이 잔뜩 부어있었다. 날씨 탓에 여행을 못하겠다는 게으른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냥 이렇게 포근한 침대에 누워 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이것도 여행이잖아. 하지만 문득 스위스 교통패스의 사악한 가격이 떠올랐다. 하루에 10만 원.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준비를 했다.
밖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지만 맞을만한 정도였다. 흐린 날씨에도 인터라켄 잔디는 푸르렀다. 흐리멍덩한 색을띈 하늘 사이로 안개가 자욱하게 번져있었다. 루체른으로 가는 파노라믹열차를 타기 위해 인터라켄 서역으로 향했다.
어제 맥주를 마시며 리기산으로 가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인터라켄에서 리기산으로 가려면 여러 교통편을 시간에 맞춰 갈아타야 했다. 일단 숙소 앞의 30분 간격으로 있는 버스를 9시 40분에는 타야 했다. 이 버스를 놓친다면 뒤로부터 줄줄이 모든 교통편을 타지 못하게 된다. 리기산에 도착하는 건 무리가 없다 쳐도 리기산에서 돌아오는 유람선을 타지 못한다. 9시 40분에 버스를 타면 10시에 인터라켄 서역에 도착한다. 10시 4분에는 루체른으로 향하는 파노라믹 열차를 타야 한다. 스위스에 온다면 한번 경험해보고 싶은 열차였다. 한 시간 간격으로 운행되는 이 열차를 타기 위해 모든 시간이 맞춰져 있었다. 열차가 11시 55분에 루체른에 도착하면 루체른역을 재빠르게 나가 길 건너에 있는 선착장으로 뛰어야 한다. 루체른에서 강 반대편인 비츠나우로 향하는 유람선은 12시에 출발하기 때문이다. 유람선이 비츠나우역에 도착하면 다시 뛰어 산악 트램을 탄다. (산악트램을 타기 위해 뛰어야 하는 이유라면 나중에 설명하겠다.) 산악트램을 타고 리기산 정상에 도착하면 리기산의 내리막을 하이킹하고 중간 정거장에서 곤돌라를 타야 한다. 곤돌라가 도착하는 곳에서 루체른으로 돌아오는 유람선을 탈 수 있다. (이 유람선은 루체른으로 가는 마지막 유람선이다. 이 유람선을 타기 위해서 리기산 정상에서 50분 안에 중간 정거장으로 가야 한다.)
내일 일정을 정리하고 검색을 통해 시간정리를 해보니 내일은 여행이 아니라 미션이었다. 시간을 전부 맞춰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벌써부터 여행을 망칠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마침(?) 비가 오고 있었다. 여행을 거부할 적절한 이유로 숙소에 있고 싶었지만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스위스 교통편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스위스 기차 시간이나 플랫폼 정보를 알려주는 전용 어플과 구글 지도를 번갈아 확인한다. 이 시스템이 전혀 번거롭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에 맞춰 정확히 도착하고 출발하는 시스템이 정말 좋았다. 시간 단위별로 계획을 할 수 있었다. 파리에서 떠나는 버스를 타고 처음 스위스 베른에 도착했을 때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 기사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정확한 시간에 나타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여하튼 나는 오늘 여행을 하지 말아야 할 모든 이유들에서 해방되어 버스에 올랐다.
리기산 정상의 높이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발밑으로 바라보는 느낌은 조물주가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느낌 같은 걸까라는 상상을 했다. 막상 나오니 산중턱에 걸려있는 안개들이 어서 걷히길 바랐다. 버스가 인터라켄 서역에 도착했다. 지금부터 미션의 시작이다. 첫 번째 미션은 타임어택이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4번 플랫폼을 찾아 뛰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얼굴을 때렸다. 여유로운 여행객 사이로 육중한 몸뚱이가 날렵하게 그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은퇴한 호나우두 처럼. 다행히 시간 안에 4번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는 파노라믹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기차 안은 역시 쾌적했다. 한 칸에 전세라도 낸 듯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파노라믹 기차는 스위스의 풍경을 여러 방향으로 잘 감상할 수 있게 긴 통창 이외에도 하늘을 볼 수 있는 창문 등이 뚫려있다. 열차의 개방감이 도착지까지의 여정에 지루함을 덜어 주었다. 창밖으로 바뀌는 풍경은 미술관에 온듯했다. 작품을 감상하듯 열차의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마음에 드는 풍경 앞에서는 더 오래 동안 머물렀다. 기차는 유려하게 잔디밭을 미끄러져 갔다. 오르막을 오르다 내리막을 내리다 강이 있는 마을을 지나가기도 하고 안개가 걸쳐 있는 산의 모습을 비추다가 캄캄한 터널에 들어가기도 했다. 분명 어제 지나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인데도 풍경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나는 언젠가부터 기차여행이 좋다. 오랜 시간을 한 곳에 앉아 편안히 갈 수 있고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다. 무엇보다 기차라는 교통수단의 특성상 교외의 자연을 가로질러가기 때문에, 살던 세계와 잠시 동떨어져 다른 세계로 와 있는 기분이 든다. 다른 세계로 간다는 건 여행한다는 기분이다. 설거지 통에 있는 설거지, 이제는 묶어 버려야 할 쓰레기봉투, 침대 밑에 있는 머리카락을 청소해야 할 의무감에서도 벗어난다. 모든 잡념을 버리고 당장의 목표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여행이다.
기차는 내가 계획한 11시 55분에 정확히 루체른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면 내 머리 위로 초시계가 흐른다. 게임 안에 있는 캐릭터처럼 다음 미션이 열린다. 승객들 사이로 다시 날렵하게 뛰어갔다. 루체른역을 나가 담벽으로 된 조형물을 찾았다. 조형물 앞의 길을 건너 반대편에 유람선 선착장이 있다. 칼 같은 시간으로 운행되는 스위스의 교통은 내편이었다. 그들의 시간을 잘 지키기 기만 한다면 날 놓고 먼저 출발하는 일은 없다. 나는 2번 선착장에서 비츠나우로 가는 유람선에 올라탔다.
스위스에서 유람선은 처음 경험했다. 리기산 일정이 없었다면 타지 못했을 것이다. 흐렸던 구름이 조금씩 걷히면서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강 건너 루체른 시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유람선 내부도 쾌적하고 깔끔했다. 깨끗함을 유지하는 공공시설물을 만나면 나도 함부로 이용하면 안 되겠다는 자발적인 시민의식이 든다. 유람선 내부의 좌석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테이블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비가 그치고 햇볕이 나는 것 같아 야외 자리를 선택했다. 오랜만에 가져온 카메라를 꺼내 루체른 시내의 풍경을 찍었다. 유람선은 움직이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로 잔잔한 물 위를 가르며 헤엄쳤다. 2개 역을 지나 비츠나우에 도착했다. 선원들이 닻을 내리고 부두에 밧줄을 묶는 동안 유람선 안에서 산악트램의 위치를 파악했다. 이번 미션은 산악트램이 리기산을 오르는 동안 멋있는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자리를 잡는 것이다. 나는 또 뛰었다. 그리고 산악 트램의 왼쪽 명당을 사수했다. 이런 재빠름과 정보력은 한국인의 특성인 것 같다. 한국인들은 가성비에 이어 가심비까지 알뜰히 챙기는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효율적인 여행 계획을 위해서는 기회비용을 최소로 하고 최고의 계획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나도 어느새 물들어버렸다.) 산악 트램은 출발과 동시에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강변에 있는 건물들이 필름처럼 흘렀다. 건물들이 얼마나 멋진 풍경을 마주하고 서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고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점점 늘어나는 안개가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건물들은 점점 사라지고 황량한 들판만 나왔다. 구름과 안갯속으로 들어왔는지 가시거리가 매우 짧았다. 눈이 쌓인 산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악 트램의 맨 끝 정거장에 도착하자 다른 열차칸에 있던 한국인 관광객들이 쏟아져 나왔다. 역이 금방 시끌벅적해졌다. 단체 여행객들과 거리를 두려고 역 근처를 구경하다 트래킹코스로 이동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맨손을 내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손이 시렸다. 한 치 앞을 보기도 힘들었다. 먼저 출발한 사람들의 목소리도 점점 희미해졌다. 40~50분 정도 이어지는 내리막을 내려가야 한다. 길을 잘못 들지 않기를 바라면서 걸었다. 드문드문 상점가들이 나타났지만 문이 열려있지는 않았다. 한참을 이어지는 내리막에 무릎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 내리막이 더 힘들다는 이야기를 실감하고야 말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정돈되지 않은 아스팔트와 내가 타고 올라온 산악 트램길 뿐이었다. 곳곳에 앞의 경치를 상상하게 하는 벤치들이 놓아져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찾아보고 왔던 리기산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10분 정도 내리막을 걸어 내려왔다. 가시거리가 20미터 정도로 맑아졌다. 호스텔이나 가정집으로 추정되는 건물들도 중간중간 보였지만 이곳들 역시 인기척이 없었다. 비성수기에는 문을 열지 않는 것 같았다. 귀곡산장같이 보이는 호스텔도 나타났다. 저기서 하루를 묵는다면 다음날 아침 눈을 뜨지 못할 것 같다. 적당한 뷰포인트를 가리키는 안내판이 있었다. 알프스 산맥에 있는 이름 있는 산들이 적혀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20분쯤 걸어 내려오니 조금씩 발밑에 경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꽤 내려왔다 생각했는데 산 아래를 보니 리기산 정상의 높이가 굉장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산밑의 집들은 점으로 보였다. 가시거리가 트이면서 점점 흥분되기 시작했다. 공기마저 상쾌하게 느껴졌다. 끝없이 펼쳐진 산맥 아래에는 네발의 맹수가 뛰어 올라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내려 갈수록 온도도 올라가 손이 시립지 않았다. 다시 카메라를 꺼내 안개 사이 빼꼼히 드러난 풍경을 찍었다.
30분 정도 내려왔을 때 안개가 충분히 걷혀 아름다운 장관이 드러났다.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이곳에 도착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는데 스위스 날씨가 3일째 내 여행을 도와주는 것 같았다. 이 멋진 풍경을 좋다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 짧은 어휘와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웠다.
곤돌라를 탈 수 있는 중간 정거장을 10분 남기고 완벽한 날씨가 되었다. 눈으로 담지 못할 뻔한 광경을 마주했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의 일정을 망설였던 그 기분들은 전부 어디 갔나 싶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앞만 보고 내리막을 걸어 무릎이 아팠는데 중간정거장을 10분 남긴 그때 서른 걸음마다 멈춰 사진을 찍느라 무릎이 아픈 걸 잊었다. 침엽수 사이로 보이는 설산도 매력적이었다. 중간 정거장에 도착해 곤돌라 정류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곤돌라 정류장의 표지판에는 금일 운행을 하지 않는다는 안내가 있었다. 아쉬운 마음에 타고 올라온 트램을 다시 타고 내려가야 했다. 트램 도착시간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정거장 뒤편의 뷰 포인트에서 마지막 알프스 산맥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스위스는 여행하는 순간마다 소중한 사람과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인터라켄에 묵는 동안의 여정이 만족스러워 숙소를 연장할까라는 아쉬운 마음이 남았지만 좋은 여행지에서 환대받고, 떠날 땐 미련 없이 떠나야 하는 것이 여행자의 삶이기에 아쉬운 마음은 뒤로하고 내일은 취리히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