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여행하는가

스위스 - 피르스트

by Jason

스위스의 첫새벽을 맞았다. 시원한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오며 상쾌한 아침을 깨웠다. 울타리 너머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건널목 기차가 지나가는 차단기 앞에 벌써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오늘은 스위스 베르너 오버란트 지방의 심장부인 그린델발트로 향한다. 그린델발트는 한국인 신혼부부들의 여행 성지다. 그린델발트의 모습을 사진으로 보면 가수 남진의 노래 중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는 가사가 단번에 생각난다. 푸른 산 등성이에 그림 같은 스위스 전통가옥들이 저마다 다른 아름다움으로 서있다. 이 가옥중 일부는 호스텔로 사용된다. 눈이라도 내린다면 저 가옥중 어딘가에 산타와 루돌프가 어린이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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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사랑마저 다시 타오르게 할 아름다움을 가진 이곳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 피르스트가 나온다. 세상의 모든 소란이 정지된 듯한 고요 속에 피르스트가 자리하고 있다. 발아래 펼쳐진 아이거 북벽과 웅장한 알프스 봉우리들은 그저 거대한 침묵으로 존재한다. 자연은 나에게 어떤 강요도 하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자연 앞에서 매번 압도당하지만 그 자리에 있다는 약속 만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카뮈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나 역시 자연이라는 거대한 무관심 앞에서 문득 "나는 왜 여행하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마주했다.




'퍼스트 플라이어'라 불리는 집라인을 타게 되었다. 내 인생에 집라인은 처음이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가평 같은 곳을 놀러 가면 나는 항상 밑에서 다른 사람들이 즐기는 것을 구경했다. '저 돈이면 좋은걸 먹지.' '왜 돈을 주고 위험함을 얻지?'라는 생각들과 함께. 출발대에 앉아 안전 장구들을 확인했다. 철문이 앞을 막고 있어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높이인지, 앞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안전 요원의 카운트 다운도 없이 '갑자기' 철문이 열리고 나는 태양이 비쳐 눈부신 설산 속으로 던져졌다. 심장의 격렬한 운동이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주었다. 눈앞의 풍경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아름다움보다는 경외심 가까운 것이었다. 미지의 세계로 연결될 것 같은 속도에 압박감이 더 크게 왔다. 내 몸이 알프스의 깊은 계곡 속으로 던져지는 느낌은 마치 앞으로 어떤 삶을 살지 모를 내 미래에 대한 도약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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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음을 내며 여전히 내 몸은 허공으로 튕겨져 나가고 있었다. 중력과 바람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자연은 때로 인간의 감각을 마비시키지만, 그 마비 속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느낀다.


눈물이 떨어졌다. 그동안 여러 가지 경험들에 자유롭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도전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가 들었다. 겁내고, 물러서고, 즐기지 못한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나에게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풍경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다가왔다. 거대한 산맥이 나를 향해 덮쳐오는 듯했고, 눈을 맞은 나무들이 빠른 속도로 뒤로 밀려났다. 이토록 격렬하고 황홀한 경험으로 가득 찬 세상을 여태 나는 모르고 있었다. 일상의 무게, 고민, 걱정등 내가 지니고 있던 모든 관념적인 짐들이 바람에 씻겨 나가고, 오직 이 순간의 생생한 감각만이 살아있을 뿐이었다. 설산이 덮쳐오기를 멈추고 내 두발은 다시 땅을 밟았다. 내 안에서는 낯선 충동이 일었다. 그것은 단순히 또 타고 싶다는 갈망은 아니었다.


'이제는 나를 좀 더 사랑해 주자.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면서 살자.'

'나는 왜 이토록 많은 경험들 속에 살면서 좁은 세계 안에 갇혀 살았을까?'


피르스트에서 경험한 찰나의 자유와 쾌감은 내가 알지 못했던 내 자신의 숨겨진 욕구와 본능적인 감각을 일깨워 주었다. 내 안에는 나도 모르는 자아가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항상 정적인 성찰 속에서 나를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몸을 던지니 비로소 내 자아가 어떤 반응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세상에는 콘서트의 깊은 감동, 이국의 낯선 음식, 완전히 다른 언어와 문화가 주는 복잡 미묘한 감각, 문학가의 무덤 앞에서 그의 생을 들여다 보는것, 아름다운 건축물 등 나 자신을 해독하기위한 복잡한 암호들로 가득하다. 두려움이나 익숙함이라는 관념에 갇히지 않고, 세상의 모든 것들을 열린 마음으로 시도하고 탐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조각들이 모여 내가 누구인지, 어떤 상황에서 가장 빛이나는 사람인지, 어떤 감각에 충실한지 알수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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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하는 케이블카에서 알프스 산맥을 바라보았다. 산은 더이상 덮쳐오지 않았다. 다시 그자리에서 침묵하고 있을뿐이었다. 산의 고요함처럼 내안에 갈망은 더욱 또렷하고 확고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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