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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부 Oct 23. 2022

손끝에서 셀러리향이 나.

[0.0625]

 향긋한 풀과 채소들을 좋아한다. 페퍼민트, 로즈메리, 고수, 바질 같은 허브들은 ‘굳이’ 필요하지 않은 존재임에도 장바구니 한 자리를 꿰차곤 한다. 메인은 아니지만 빼놓으면 접시가 허전해지는 존재들. 그중에서도 가장 애정 하는 초록 채소는 셀러리다.

 셀러리는 자신의 매력을 돋보이기 위해 향을 낸다기보단, 다음 한 입을 위해 입을 씻어주는 역할을 하곤 한다. 입에 향이 오래 남지도 않아서 속 안에서 역한 향이 올라오는 일도 없다. 하지만 대파 같은 모습의 셀러리를 손질해본 경험이 있다면 알 것이다. 손끝에 가장 강렬하게 오래 남는 향은 셀러리의 물 냄새라는 걸.

 내게 애인은 셀러리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는 아니지만 항상 내 옆을 꿰차는 것. 없으면 허전하고 함께하면 일상의 풍미를 돋우는 것. 자극적이기만 한 음식들 사이에서 상쾌하게 기분전환을 시켜주는 것. 하지만 잠깐 만지는 것만으로도 손끝에 하루 종일 강렬한 냄새가 배는 존재. 난 그런 해에게 내 손끝을 기꺼이 내어 주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해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대학에서 만난 그와 텅 빈 동아리방에서 자주 함께 그림을 그렸는데, 그는 특히 수채화를 즐겼다. 하루는 이젤에 커다란 도화지를 세워두고 청포도 껍질색의 애벌레를 그리고 있는 걸 구경하다가 물었다.

 - 너 되게 특이하게 붓을 턴다. 왜 그렇게 터는 거야?

 해는 노란색 물통에 붓을 드럼세탁기에 돌리듯 거칠게 빙글빙글 빨고는 탁! 탁! 두 번 호를 그리며 바닥에 물을 털었다. 그러면 탁한 오이 색 물이 이젤 옆 바닥에 직선으로 튀기면서 바닥에도 그림이 그려졌다. 때문에 해가 붓을 잡으면 좁은 동아리방이 현대미술을 하는 예술가의 방 같은 모양새가 되곤 했다. 미술을 좋아하지만 배워본 적은 없던 내게 해의 습관은 절도 있는 예술가의 고집처럼 비쳤다.

 - 아, 혹시 물 튀었어? 그냥 입시미술 하면서 남은 습관이야.

 내 물음에 돌아온 해의 대답은 대단히 김새는 평범한 이유였지만, 나는 그 뒤에도 해가 붓을 터는 모습을 멍하니 구경하곤 했다. 내게 그의 습관은 입시미술을 하는 이들의 것이 아니라 해만의 신기하고 사소한 습관일 뿐이었다.

 언제나처럼 해가 붓질을 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자취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하루 종일 바깥에 있느라 텁텁해진 입을 씻어내기 위해 칫솔질부터 했고, 몽글몽글 뭉쳐있는 치약거품을 닦아냈다. 그러곤 칫솔 끝을 마법 지팡이 잡듯 쥐고는 털어냈다.

 탁! 탁!

 나는 칫솔을 쥐곤 굳어버렸다. 한 1분은 그대로 멈춰있었던 것 같다. 난 공포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그대로 눈알만 굴려서 바닥을 바라보았다. 화장실 타일에 칫솔이 지나간 호를 따라 물길이 그어져 있었다. 난 다급하게 ‘원래’ 내 습관을 재연하려 했지만 내가 칫솔을 어떻게 털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무서웠다. 사소하게 눈길을 줬을 뿐인 타인의 습관이 내 습관이 되어 있는 것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서울 토박이인 내가 대학에서 처음 사귄 부산 친구를 따라 ‘졸려’를 ‘잠 온다’라고 말하게 됐을 때보다 100배는 소름 끼쳤다. 스스로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 공포감. 내 것인 게 분명한 손끝에 나도 모르는 사이 타인의 향이 짙게 배어있는 감각은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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