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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부 Oct 23. 2022

요상한 나라의 단팥빵

[0.0625]

 난 속이 허하면 참지 못하는 성질을 갖고 있다. 배가 고프면 사나워지는 것뿐만 아니라 손도 다리도 벌벌 떨려서 얼른 입에 뭐라도 넣어줘야 하는 짐승 같은 면이 있다.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빨리 라면 끓여 주세요.’는 결코 과장된 연출이 아니랄까? 하지만 사회의 동물로서 밖에서 그런 모습을 보일 순 없으니 내 가방 속엔 항상 단팥빵이 있었다.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서 파는 한 입 크기의 단팥빵은 불시에 배가 고플 때 입에 쏙 넣기 좋다. 도토리묵색을 띠고 있는 맨질맨질한 겉껍질엔 귀여운 검은깨가 몇 알 올라가 있는데, 그게 어찌나 먹음직스럽던지. 안에는 적당히 단 팥소가 가득해서 하나만으로도 입안이 풍요로워지곤 했다.

 해와 처음 만난 날에도 내 가방엔 단팥빵이 있었다. 그날은 대학교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날이었다. 난 새빨간 머리에 올블랙으로 차려입은 온갖 힘이 들어간 신입생이었다. 대학에 들어가면 다들 총천연색으로 염색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나만 토마토 머리였다.

 해는 잔뜩 긴장해있었다.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했다. 안 그래도 처음 보는 선배들에게 둘러싸여 떨리는데, 옆자리에 시뻘건 머리의 쎈 캐가 앉았으니. 더군다나 그 쎈 캐는 좀 이상했다. 단상 앞에서 선배가 학교와 영어 시험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볼이 불룩했다. 그는 내가 필통 위에 고이 올려둔 한 입 크기의 단팥빵이 지우개인 줄 알았다고 훗날 말했다. 

 누가 뭐라 하든 난 나름 첫인상에 신경 쓴 거였다.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단팥빵을 물고 있었던 거니까. 나는 얼른 지루한 설명회가 끝나고 옆 자리 동기와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고3 때도 재수할 때도 대학 캠퍼스에서의 내 모습을 오래도록 상상했다. 괜히 재수생이라는 자격지심도 있었지만 멋지고 리더십 있는 동기로 보이고 싶었다. 그런데 내 든든한 친구 단팥빵으로 인해 난 ‘눈에 띄는 이상한 애’였던 거다.

 그 눈에 띄는 이상한 애 시점으로 다시 돌아오자면 해는 고등학교 동창이 떠오르는 흔한 외모의 남자애였다. 조금 음울해 보이는 인상에 역시나 고등학생 때 입을법한 털이 달린 야상을 입고 있었다.

 - 안녕?

 내가 먼저 해에게 인사했다.

 - 아, 안녕.

 그는 대답하면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딱 보아도 여자가 익숙지 않은 것 같았다.

 남고를 나온 걸까? 맞단다. 

 스무 살 같아 보이진 않는데. 역시, 너도 재수생이구나!

 사투리를 안 쓰네. 맞네, 서울 사네.

 말하는 도중에도 계속 낙서를 하네. 그림 그리던 앤가? 크 역시나.

 해는 책상만 내려다보면서도 꼬박꼬박 내가 묻는 것에 대답했다. 목소리가 좋은 게 티 나지 않을 정도로 긴장해있었지만.

 그냥 옆자리라서 대화를 나누게 된 해와 나는 간단한 호구조사부터 겹침이 예고되어 있었다. 우린 같은 재수 생활을 보냈고 (물론 독학재수와 기숙학원이라는 상이한 환경이었지만) 사는 지역이 같았으며 미술을 좋아했다. 엄청난 우연의 일치! 이 얼마나 21살의 남녀가 어울리기에 충분한 공통분모인가! 여기서 세세하게 다른 점들은 앞으로 서로 대화해 나갈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처음 과도하게 쥐어짜 낸 리액션을 주고받은 둘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동갑인 학과 동기’라는 이유로 같은 버스, 옆자리에 앉았다. 우린 서로에게 조금 이상한 사람이었지만 자연스럽게 함께했다. 그는 대학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였다.

 오리엔테이션에서 주고받은 새로운 전화번호만 50개가 넘었지만 해와의 채팅방은 가장 상단에 고정돼있었다. 우린 새내기들의 흔하디 흔한 대화로 서로의 기숙사에 대해 묻고, 시간표를 공유하며 함께 PC방에서 만나 수강 신청을 하고, 함께 학교 버스를 탔다. 

 그 모습을 본 동기와 선배들은 당연하게(?) 낄낄댔다.

 - 야― 너네 사귀냐?

 - 둘이서 밥 먹냐? 오올―

 소문을 요리조리 의식하며 지내다 보니 어느새 우린 사귀고 있었다. 너무 일사천리인가? 아무튼 최고의 안주거리라는 3월의 첫 과 CC가 우리였다. 벚꽃도 피기 전에 연애라는 무기한 조별과제를 옆자리 동기와 하게 된 거다.

 이 첫 만남 스토리를 전해 들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똑같이 말했다.

 - 운명이네, 운명!

 음, 아무리 생각해도 운명은 너무 거창하고 로맨틱하다. 우린 너무 별 생각이 없었다. 그냥 허한 속을 채우는 앙꼬를 찾다 보니 꼭 들어맞은 게다. 누구에게나 짝이 있다고들 하니까. 요상하지만 이상하게도 눈이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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