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5]
- 우리가 헤어져도 네겐 밀크티가 남을 거야.
내가 곧잘 해에게 하던 말이었다.
10년 전, 밀크티란 데자와 정도인 시기가 있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도 정수기 물 특유의 물비린내를 싫어해서 사물함에 온갖 종류의 티백을 차곡차곡 쌓아뒀다. 수영장 캐비닛같이 생긴 사물함은 나만의 작은 다방이었다. 나는 커피타임보단 티타임이 취향에 맞았다. 안 그래도 항상 긴장되고 날 세우게 되는 일들이 가득한 하루 속에서 심장을 빨리 뛰게 하는 커피보다는 몸과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차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달까.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옆에는 대학교가 딱 붙어있었다. 하지만 그럴듯한 대학가가 형성된 곳은 아니어서 근처 카페라고는 대학교 건물 안에 있는 작은 카페가 전부였다. 그래도 가까운 곳에 카페가 있다는 게 어찌나 좋던지. 카페 음료엔 매점에서 살 수 있는 캔커피나 뚱뚱한 바나나 우유로는 재현해낼 수 없는 충족감이 있다. 또래들이 달달한 바닐라 라테나 상큼하고 화려한 프라푸치노를 시키던 시절에 나는 밀크티를 시켰다. 무슨 맛인지도 몰랐지만 난 ‘티’라는 단어를 달고 있는 것에 약했다.
지금은 너무 익숙해져서 오묘했던 첫 밀크티의 맛을 표현하기란 퍽 어려운 일이지만 참으로 희한한 맛이었다. 밀크티는 비린 것도, 구수한 것도 아닌 것이 달달하고 향긋하면서 고소했다. 홍차의 풍미가 우유 속에 응축되어 있다가 우유의 부드러움과 함께 입안에 꽃향기와 파파야의 은은한 단 내가 가득 해지는 것이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당시엔 카페에서 밀크티를 시키면 뭔가 어른이 된 것만 같고 나만의 카페 메뉴 같기도 했다. 지금이야 나도 알고 너도 아는 대중적인 메뉴라지만 여전히 호불호가 있는 음료이기도 하니까.
내가 밀크티를 최애 음료로서 성공적으로 전파한 인물은 내 연인, 해였다. 해는 입맛이 달다. 카페에 가면 항상 아이스 초코 아니면 복숭아 아이스티였다. 메뉴 선정에서 알 수 있듯이 메뉴 모험도 안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연애를 하면서 서로가 시킨 메뉴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맛보게 된 밀크티는 그를 신세계의 길로 인도했다. 처음엔 요상 망측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오잉?’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 입에서 꽃향기가 나. 근데 달달해. 나쁘지 않아.
그 뒤로 해의 카페 주문에 밀크티가 추가되었다.
대학에 다닐 때 유명한 사랑꾼 선배가 있었다. 헌신적으로 연인을 챙기는 모습이 영웅담처럼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그랬던 선배가 애쓰고 노력했던 오랜 연애를 끝마치고는 말했다.
- 나는 원래 밥을 먹고 또 뭘 먹는다는 게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었거든? 근데 전 애인이 꼭 디저트를 챙기는 사람인 거야. 그땐 마냥 함께 하고 싶어서 나도 덩달아 꾸역꾸역 케이크를 먹었는데, 헤어지고 나서도 내가 후식을 챙겨 먹고 있더라.
선배는 케이크를 먹을 때면 그녀가 생각난다고 피식 웃어 보였다. 그때 난 차마 선배를 따라 웃지 못했다. 훗날 내 일이 될 것만 같아서.
해와 함께가 아니었다면 굳이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시켜보지 않았을 거다. 비싼 초밥집에 뭣도 모르고 들어가 가격에 달달 떨면서 코딱지만큼 먹고 ‘배고파—’하며 나올 일도 없었을 거다.
그리고 훗날 기분을 낸다며 비싼 초밥집에 간다면 난 해를 떠올릴 거다. 와인을 마시고 혀에 남은 떫은맛에도 그를 떠올리겠지. 와인 라벨에도 걔의 얼굴의 있다던지, 초밥 고급 생선살에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던지…아, 그건 사양하고 싶다.
오랜 기간 함께 할수록 둘만의 식사는 나날이 늘어간다. 성격, 취미, 가치관보다 입맛부터 서로에게 섞여 들어간다. 처음에 조심조심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며 골랐던 예쁜 레스토랑의 파스타부터 술 먹은 다음 날의 국밥, 밤샘 과제를 마치곤 컵라면, 시험 기간엔 햄버거, 함께 단골이 된 맛집까지. 디데이 뒤에 숫자가 늘어갈수록 아는 맛은 늘어가고 혀 속에 그가 남는다. 함께라도, 각자라도.
카페를 가기 힘든 요즘 씻고 말린 고운 유리병에 손수 우린 밀크티를 마시며 나는 오늘도 너를 떠올린다.
아, 이 밀크티 네가 좋아할 맛이다.
내 최대 음료 밀크티를 전파한 순간을 언젠가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억울하게도 우리가 만일 헤어진다면 난 한동안 내 최애 음료를 마실 수 없을 것 같다. 네겐 남고, 내겐 사라질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