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25]
나는 시장에 가면 떡집을 꼭 들린다. 시큼하지만 푹신푹신한 술떡도 좋고 동글동글한 꿀떡도 좋지만, 그중 지나칠 수 없는 건 망개떡이다. 먹고 싶은 개수를 말하면 단돈 몇 천 원에 달인의 퍼포먼스까지 볼 수 있다. 맨 손으로 숭덩숭덩 흰 맵쌀 반죽을 떼어내고 먹음직스러운 팥소를 그득하게 채워 넣는다. 얇은 피에 팥소가 비치는 몽실한 덩어리를 보면 “그대로 주세요! 지금 당장!”이라고 외치며 입에 한가득 넣고 싶지만 꾹 참는다. 상큼한 향이 나는 청미래덩굴 잎으로 하나씩 정성스레 감싸 주는 게 망개떡의 진짜 매력이니까.
시장 몇 천 원짜리 투박한 떡에 불과하지만 덩굴 잎으로 감싸진 겉모습만큼은 백화점에서 산 화과자 안 부럽다. 그래서인지 망개떡은 예의를 차려가며 먹게 된다. 제 모습을 보기 위해선 끈적한 표면이 붙잡고 있는 망토 녀석을 조심스레 들춰내야 하기 때문이다. 마구잡이로 떼어내다간 달인의 솜씨가 무색하게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떡을 상하지 않게 보호하고 먹음직스러운 포장이 되어주는 덩굴 잎은 이십 대 초의 아등바등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숨이 막힌 줄도 모르고 망토를 뒤집어쓴 채 사람을 사귀던 때였다.
고독한 유령처럼 재수 생활을 보낸 스물한 살의 망개떡은 사람과 사랑이 고팠다. 무해한 타인을 원했더랬다.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이해하고 위로해주는 타인. 이해 관계없이 내 본질을 사랑해주고 언제든 나를 반갑게 맞이해줄 사람.
대학교에 들어간 나는 이상적인 친구 관계를 꿈꿨다. 나만의 베스트 프렌드. ‘베스트’라는 달콤하고 유치한 단어는 외로운 십 대를 보냈던 내게 갈증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모순되게도 대학생이 된 나는 망토를 뒤집어썼다. 본래 내 모습은 친구를 사귀기엔 보잘것없다고 생각했다. 누구든 날 것의 나를 본다면 부담스러워하거나 실망할 거라 여겼다. 항상 새벽 6시에 일어나 화장을 했고, 눈이 뻑뻑해지는 렌즈를 끼고, 대화를 할 땐 입꼬리가 저리도록 웃어 보였다. 총대를 매야 한다면 내가 희생했고 그림자 하나 없다는 듯 당당하게 굴었다.
망토를 쓰고 시작한 새내기 생활의 시작은 성공적이었다. 누구보다 빨리 연애도 시작했고, 활발하고 적극적인 내 주위엔 항상 동기들이 가득했다. 모임이 개최되면 주도자는 내 몫이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잔뜩 애정을 쏟으며 힘도 들었지만 드디어 ‘내 사람’이 가득해진 것 같아 내일이 오는 것이 불안하지 않고 설렘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주목받는다는 것은 수많은 시선에 노출되는 일이라는 것을 당시엔 알지 못했다. 나는 구석구석 관찰당했다. 순간의 모습과 말 한마디는 파편이 되어 얕고 넓은 물 위로 퍼져나갔다. 사랑과 우정은 온데간데없이 오해와 편견만 덕지덕지 달라붙기 시작했다.
- 너 남자 친구 있으면서 다른 남자랑 단둘이 있더라? 어장녀네—
- 은근히 돈 자랑하더라. 재수 없어.
커다란 사랑은 커다란 비난으로 돌아왔다. 내가 갑갑한 갑옷 같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아무리 노력한들, 결국 난 미움받고 마는구나. 나를 사랑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만 같았다. 혹자가 말하는 것처럼 내가 문제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사로잡혔다. 사랑은 언제든 거두어질 수 있다는 게 무서웠다.
강의실에서 마주친 동기가 내 인사를 가볍게 무시할 때, 다시금 떠올렸다.
베스트 프렌드. 나를 사랑해주는 단 한 사람이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때 마지막까지 내 곁에 있던 한 사람은 대학 첫 친구이자 첫 연인인 해였다.
해는 항상 함께였기에 당연히 숱한 소문도 알고 있었다. 들렸고, 혹은 누군가 해에게 직접 전했다. 해를 어장 속 물고기라며 연민하기도 했다. 그런 해에게 난 빌어먹을 미안함을 느꼈다. 그럼에도 난 괜찮은 척, 쿨한 척, 해의 손을 꼭 붙잡고 변할 대로 변해버린 무리를 빠져나왔다. 이럴 때 써먹는 위안이 있지.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고!
해는 딱히 별 감흥도 저항도 없이 나를 따랐다. 그는 항상 내 곁에 있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해가 편하면서도 불안했다. 함께라며 안심하기엔 속내조차 알 수 없으니 어떻게든 해와 처음 사귀었을 때의 당당한 모습을 유지하려 했다. 온갖 자기 연민과 문드러져 곪아버린 속내를 여전히 망토 안에 꽁꽁 숨기고서.
그런데 어느 날 해가 멀쩡히 소파에 앉아있던 내게 울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나는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분명 머리로는 뜬금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말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난 언제나 너랑 함께 할 거야.
그가 알아챘다. 둘러 싸맨 망토의 존재를. 그 아래 숨겨진 거칠거칠함을. 나는 불쑥 망토를 들춰낸 해에게 격양된 목소릴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어떻게 호언장담하냐고. 그걸 어떻게 믿냐고.
그날은 해와 함께 한 지 고작 두 달 정도 됐을 때였다. 언제나 함께 한다는 말은 초등학생 때 롤링페이퍼를 쓸 적부터 열 번은 넘게 들어봤을 거다. 그중 지켜진 말은 단 하나도 없었다. 가볍디 가벼운 문장. 그 터무니없는 가벼움이 어찌나 비참하던지. 그래서 였을까. 난 숨기고 숨겨왔던 앙금을 쏟아내듯 내뱉었다.
- 헤어지면 끝이야. 영원히라는 건 없어.
- 난 날 잘 알아. 관계가 달라진다 한들 내가 널 싫어할 리 없어.
여전히 허황되고 이상한 답변. 하지만 누구도 들려주지 않았던 말이었다. 작게 금이 갔던 벽이 걷잡을 수 없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는 나를 껴안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나는 내 알맹이를 아무도 사랑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알맹이에 비친 붉은빛을 사랑했다며 고백했다. 나조차 나를 사랑하지 못해 알지 못했던 앙금의 빛깔. 해가 말했다. 너만의 빛깔을 알아보고 매료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날 거라고. 나는 답했다. 그럴 거라고.
난 그에게 안겨서 이 사랑이 영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존재한다는 걸 알면 됐어. 나도 가질 수 있단 걸 알면 됐어. 나만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경험은 다시, 다시, 희망을 갖게 하는 바보 같고 따뜻한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