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에서의 연애

네가 많이도 생각났어

by 이부

나는 ‘누군가’보다 ‘경험’ 자체를 참 많이 부러워했다. ‘인간관계로 힘들어.’ 란 말을 내뱉는 게 더 익숙해서 몰랐는데, 재능과 경험이야말로 나를 지탱하는 것이었다. 자기 확신이 와르르 무너질 때가 재산을 탕진하고 외톨이가 될 때보다 시궁창 인생처럼 느껴졌다. 스스로의 멍청함, 그리고 열등함을 느끼는 게 무엇보다 싫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군대에 가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군상의 인간을 보게 된다던데, 나는 특목고 재학 시절에 마주한 또래들 만큼 내 세상을 무너뜨린 환경을 만나보지 못했다. 돈이 많거나 자녀에게 투자를 아끼지 않는 집안 아이들은 재능도, 자신감도, 경험도 많았다. 나 정도면 해외를 많이 가본 것이라 생각했는데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세발에 피였다. 가본 나라를 세는 게 아니라 대륙을 단위로 세다니? 골프란 건 나이 지긋한 어른들의 스포츠라고 생각했는데 어렸을 적부터 골프를 배워왔다니? 피아노, 태권도도 아닌 색소폰과 일렉기타, 검도, 발레를 배웠다니? 위라고 생각했던 곳엔 더 위가 있다고 하던가. 뛰는 자 위에 나는 자 있다는 말을 고등학생 때 체감했다. 누가 봐도 ‘어리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시절에 뛰어넘을 수 없는 지식과 경험, 그리고 자산의 축적이 있었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고는 강박적으로 바쁘게 지냈다. 쉬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연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흔히들 말하는 이색 데이트는 다 했던 것 같다. 나는 모조리 ‘경험해본 것들’로 만들고 싶었고 이왕이면 연인과 함께했다. 그게 몇 년이 지나자 대부분이 부질없어 보이는 지경에 다다랐다. 이미 경험한 것만으로 가치가 퇴색되어 보였다. 욕구가 하나둘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세상은 마케팅과 광고의 홍수 속에서 새로워 보이는 것들이 넘쳐났지만, 그것들마저 막상 크게 다르지 않을 거란 오만한 권태가 느껴졌다. 아니면 할 만큼 했으니 열정보단 안식을 가지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연애가 길어지니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연애초와 열애, 그리고 연애 후반인지 잘 모르겠는 시점이 왔다. 아마 이 애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시점이 연애초를 넘어섰단 신호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젊은 날에 벌써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원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너무 많은 걸 봐와서 그런지 막상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어서 계속해서 무언갈 했다. 그러다 강제로 모든 것을 멈춰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2020년에는 이상할 정도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매 해 그랬던 것 같지만 유독 2020년은 그랬다. 방안에만 있었던 나조차 공포스러울 정도로 세상이 혼란했다. 당장 전쟁이나 재해가 일어나는 상황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평소에 하던 소소한 상상도 더 이상 상상이 아니게 될 것만 같아서 괜한 고민에 진지하게 시간을 썼다. 샤워를 하다가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밖에 좀비들이 들끓고 폭동이 일어나면 지하실로 대피해야 하나? 건물에 깔리면 소변을 마셔야 하겠지? 불이 나거나 물에 잠기면 난 내 방에서 편지들과 아이패드, 현금, 두꺼운 옷 하나를 가방 안에 쑤셔 넣겠어, 이런 것들. 혼란하고 끔찍한 상상에도 불구하고 내 방은 평화로웠다. 옆 방의 오빠가 게임하는 소리는 여전히 시끄러웠고 배달 음식을 시키는 초인종 소리도 여전했다. 난 방 안에서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이 평화로움이 몹시도 불안했다. 차라리 바쁘면 좋았을걸. 아니, 바쁘지 못해서 안전하지만 그래도...


방안에만 있다 보니 날씨조차 알지 못했다. 환기하기 위해 잠깐잠깐 창문을 열었을 때 들어오는 찬 공기에 추워졌구나, 하고 이불을 고쳐 덮을 뿐이었다. 브라조차 하는 것이 어색해서 입고 있던 반팔에 바람막이 하나 입고 밖을 나섰는데 사람들이 두꺼운 재킷을 입고 있었다. 겨울 코트를 입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계절도 모른 채 집에 있었단 것에 충격받아서 괜히 찬바람이 들어오는데도 창문을 열어놨다. 마치 4D 액자를 보는 것처럼. 창 밖의 나무와 새들, 그리고 찬바람이 현재를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였다.


핀터레스트 참고 드로잉

난 무얼 해야 하나. 무얼 할 수 있나. 쉬는 방법도 모르는 나는 아무것에도 몰두할 수 없었다.


몸이 계속 아팠다. 움직임이 적으니 작은 아픔도 크게 느껴졌다. 몸의 여러 곳이 동시다발적으로 고장 나서 여러 곳의 병원을 돌아가며 다녔다. 방안에만 있으니 비로소 내 몸이 이렇게 약하고 툭하면 아프다는 걸 알았다. 운동의 필요성이 느껴졌을 땐 운동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있었다. 백수가 아프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으니 맘 놓고 미뤄왔던 고통을 쏟아내는 것만 같았다. 안 좋은 건강은 마침내 나에게 게으름이란 면죄부를 주었다. 아프니까 괜찮아, 라는 말을 하게 됐다. 그런 말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서 그게 너무 좋았다. 외출이 죄같이 느껴지는 세상에서 병원행은 이 또한 유일한 면죄부를 부여받은 것 같아 이상하게도 숨통이 트였다.


점차 하고 싶었던걸 아파서 하지 못하게 되는 일들이 많아졌다. 이쯤 되니 당황스러웠다. 그렇지만 방 안에 누워서는 터놓고 조언을 구할 이가 나 밖에 없었다.


움직이고 싶은 내가 말했다.


“슬슬 그만 아프면 안 될까?”


게으르고 싶은 내가 답했다.


“왜? 편하잖아.”


“하고 싶은 것이 생겼어.”


“확실해? 매번 그랬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잖아.”


많은 경험을 하고 시도를 하면 운명처럼 내 인생을 걸만한 천직을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노력하면 실력이 늘고, 인정받고, 이름을 날릴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지만 세상은 생각지도 못한 역병을 불러일으켰고, 세상 탓만 하기엔 내 몸과 마음도 너덜너덜하게 닳아서 무언가를 지속할 힘이 없었다. 체력도, 의욕도, 호기심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래서 세상 탓을 하며 누워만 있어보았다. 그런데 해가 많이 걱정했다. 나도 내가 걱정됐다. 더 이상 이렇게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시 뭐라도 해야겠어.


“뭘 하고 싶은데?”


사실 아직 모르겠다. 그냥 떠다니는 구름이 보기 좋아서 잡아볼까 싶은 기분이 드는 것뿐이다. 근데 난 편하고 싶었던 거지 걱정받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냥.. 그냥 이제 평화롭게 존재하고 싶단 생각을 한 건데 이 방식은 아닌 것 같았다.


“네가 하고 싶다면 하도록 해.”


게으르고 싶은 나는 불안하다. 그러나 응원하기로 했다. 재촉도 안 하고 걱정하지도 않는, 그냥 응원. 안 떠밀게. 가끔은 바람에 몸을 맡기고 마냥 떠다니는 것도 괜찮지. 하지만 정착하고 싶다면 말해. 네가 아무리 겁먹어도 아랑곳 안 하고 힘껏 떠밀어줄 테니까 말이야.


“응. 그땐 꼭 밀어줘. 난 겁이 많아서 생각만 하다가 지나치니까. 약속이야.”


“약속이야.”


침대에서 눈을 감고 내가 나와 약속한 것을 해와도 나누고 싶었다. 누구보다 나를 걱정하고 있을 해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난 지쳤을 뿐인가 봐. 아직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가 봐. 겁이 나긴 해도 응원만 해주면 뭐라도 할 용기가 남아있나 봐. 그런데 해는 내 곁에 없었다. 해는 군대에 있었고 주어진 통화시간은 너무나 짧았다. 그리고 몸은 기대와 달리 나아지지 않았다. 밖의 역병도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방안에 있는 나는 마음까지 점차 약해졌다. 사무치게 외로웠고, 분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네가 많이도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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