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우울이란 심해를 알아
오랜만에 만난 해를 꼭 안고 있는데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리는 어떨지 몰랐던 미래를 어느새 이렇게나 함께 걸어왔구나. 같이 손잡고 웃으면서, 싸워도 서로 볼 비비며 화해하며, 힘든 일은 서로 토닥여 주면서. 다행이다, 하면서.
해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이란 말을 자주 했다. 나중엔 어떨지 모르지만, 그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누가 들으면 자신감 없고, 로맨틱하지 못한 말이라고 흠잡겠지만 그것이 해와 내가 서로를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방식이었다. 혹시라도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인연이기에 마주하고 싶지 않은 끝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랬던 처음부터 어느덧 6년. 어떨지 몰랐던 그 미래를 어느새 이렇게나 걸어왔다.
사람 인연이 몇 년 가기가 얼마나 힘들던가. 동기, 같은 학교, 같은 반으로 한 때는 묶여 있지만 시간에 관계가 삭는 게 얼마나 빠른가. 특히 연인들 사이는 더하지. 캠퍼스 커플의 관계는 더 심하고. 벚꽃 커플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벚꽃처럼 우르르 폈다가 우르르 진다. 깨진 관계 모서리가 날카롭기도 연인 사이가 최고다.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봄에 만난 우리는 오래도 같이 보냈다.
해는 우리의 추억이 포근하고 경쾌한 향이 난다 말했다. 반면에 나는 우리 사이에 조금 애틋한 향이 난다 느꼈다. 그 사이 많이도 쌓인 편지들을 읽다가 우리 사이에 번갈아 찾아왔던 우울증의 흔적을 발견했다. 네가 우울증을 겪을 때 써주었던 시, 내가 우울증을 겪을 때 네게 보냈던 절박한 편지들에 마음이 울렁였다. 서로의 마음속엔 우울이란 깊은 심해가 있다는 걸 알기에 이토록 애틋하게 느껴지는 걸까 싶었다.
나의 텅 빈 자취방에 혼자 들어가, 남아있던 내 향기에 조금 울었단 소리를 듣고는 왜 나까지 눈물이 나던지. 얼굴이 흙빛이 되어 불안하게 눈이 흔들리던 네게 쓴소릴 할 수밖에 없던 내가 얼마나 무력하던지. 해는 우울하고 힘들 때, 이유조차 막연하고 불안할 때 나를 찾았다. 언제부턴가 어리광이 늘었고 함께 있지 못할 땐 전화로 대신했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난 섣불리 어느 얘기도 하지 못했고 해도 이야깃거리가 있어서 건 게 아니었다. 단지 통화 중이라는 화면과 서로의 숨소리, 그리고 간혹 들리는 부스럭거림. 서로의 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과 안정감. 해는 그것이 필요한 것 같았기에 기꺼이 당신의 힘든 순간순간을 함께 했다.
난 너무너무 힘이 들었다. 네가 기대는 무게가 무거워서, 어리광이 귀찮아서가 아니라, 해줄 수 있는 것이 함께 해주는 것뿐이라서. 목소리조차, 나의 숨소리조차 영원히 전해줄 수 없을 텐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짧은 시간 함께 해주는 것뿐이라서. 그래서 더 모진 말을 하기 시작했다. 심리상담을 권하고, 부질없다 회유하고, 불안해봐야 소용없고, 앞으로의 네게 달려있다고. 그러나 너는 단지 그런 나를 다시 꼭 껴안았다. 너는 나의 강함과, 올곧음과, 열정과, 온기에 파묻고 위로받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함께 울어줄 수 없었다. 눈썹과 입꼬리를 내리지 않으려 애썼다. 너의 불안에 공감하고 싶었고 그러지 못함에 너무너무 안타까웠지만 너에게 동정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기에, 그만큼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기에. 단지 나도 너를 마주 안으며 괜찮다 말했다. 진짜 진짜 괜찮다고.
당신은 다시금 물었다.
진짜 괜찮아?
나는 확신에 가득 차,
진짜 괜찮아 라고.
그렇게. 그렇게만 얘기했다. 부디 네가 바라보고 느끼는 나의 강함을 말미암아 나를 믿기를. 괜찮다는 나의 말에 너도 괜찮다 생각하기를. 당신이 부디 나를 강한 사람으로 믿어주기를. 그래서 용기를 얻기를. 당신의 막연한 앞 날에 설레는 날이 찾아오기를. 오늘도 꾹꾹 눌러 담으며 작은 태양을 안았다. 나의 반짝이는 선홍빛이 오늘만은, 지금만큼은 선명하고 찬란하게 빛나기를 빌었다. 괜찮아라는 말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 일지 가늠조차 되지 않지만 그게 당신에게 위로가 된다면, 버티고 나아감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말이라면 기꺼이 그 무게 짊어지려 했다. 그리고 당신이 나의 말에 적당히 괜찮은 미래를 꿈꾸는 신뢰의 무게만큼 나도 당신을 신뢰한다. 당신은 보이지 않을 당신의 빛을 신뢰한다.
***
그러다가도 네가 보내줬던 영상편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이번엔 내가 ‘살려줘’라고 속으로 외치는 나날도 있었다. 네 상황을 고려하고 이해할 여력조차 없었던 날도 있었다. 버스의 날 선 기계음 소리와 떠있는 구름조차 불안감을 주던 날들이 있었다. 옛날 사진 속의 너와 내가 너무 행복해 보이는데 지금 함께 찍힐 나는 어떨까 불안했을 때가 있었다. 꾸미고 화장해도 더 이상 내가 이뻐 보이지 않았다. 돈돈돈 하는 걸 싫어했는데 내가 그러고 있는 걸 보고 흠칫 스스로에 놀랄 때가 있었다. 날 깊이 좋아해 줄 사람이 또 생길까 의구심이 들었다. 마치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은 과거의 내가 사귀어놓은 사람들이고 지금의 나를 보고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분전환이 되었던 네일을 해도 퉁퉁해 보이는 내 손이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같았다. 그렇게 좋아하던 액세서리도 안 어울리는 것 같았다. 뭐든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건 내 외양 때문이 아니라 마음가짐이란 걸 알았다. 글을 써도 진정이 안되고 민망하리만큼 눈물이 계속 주룩주룩 흐르고 코는 맹맹했다.
그때의 나는 다시 혼자가 될까 두려웠다. 당신을 다시는 바라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퍼졌다. 당신이 내 어깨에 항상 코를 파묻듯 나 또한 당신의 햇볕 향을 참 좋아하는데 그 향기를 못 맡는다 생각하니 안될 것 같았다. 당신은 나 말고도 때때로 목소리가 참 좋다는 소릴 듣곤 했다. 그 부드럽고 잔잔한 소리를 나만 다시 못 듣는다 생각하니 억울해서 안될 것 같았다. 난 맛있는걸 당신에게 먹이는 낙을 포기할 수 없는데 무엇이 당신의 눈을 동그랗게 뜨이게 할지 구분할 수 없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사랑한다. 보고 싶다. 어느 순간 이 짧은 말들로는 내 마음을 담아낼 수 없게 되었다. 줄줄 마음이 넘쳐 당신이 아니라 어딘가로 새고 있다는 느낌이 날 불안하게 했다. 함께 하고 있어도 내 곁에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어서일까. 넘치는 마음을 담아낼 것이 부족한 글 밖에 없어서 조금씩 나누어 묶어두었다.
스스로 자신이 없어서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이상적인 사랑이 아니면 조급했다. 연애의 뒤로 내 비참함과 찌질함 그리고 못난 점들을 숨기고 싶었지만 한편으론 누군가를 의지하면 할수록 내 삶을 잃는 것일까 무서웠다. 누군가에게 의지해본 것이 처음이라 그 몇 년이 미숙하고, 휘청거리고, 들떴었다. 그래서 더 더 원했다. 고리타분한 어린애가 되는 기분.
그래도 덕분에 어린아이 일 적 기분과 경험과 성숙과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없었다면 더 오랜 시간 동안 죽은 눈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역시 이러하다고. 날 온전히 받아들여줄 내 편 하나 없다고. 덕분에 소리 지르며 화내 봤고, 엉엉 울어도 봤고, 미운 점이 있어도 싫어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사랑을 알게 됐다.
나는 명예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사랑하는 이와의 이상적인 미래를 가장 원하게 됐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위하며..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 일을 즐기며 함께하는 삶. 불안에 휩싸일지언정 나의 일뿐만 아니라 나와 너의 일을 고려하게 되었다. 이것은 무언가에 얽매여 자유를 잃고 나의 것을 챙기지 못함이 아니라, 경쟁하고 치열한 삶보다, 매우 다정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언젠가 내가 너를 한 없이 미워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와 함께한 날들로 하여금 갖게 된 퍽 마음에 드는 새로운 이상향과 삶의 방향에, 내 평생 후회 없을 것을 확신한다. 두고두고 잊지 못할 사랑의 감정들과 행복감들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가져다준 너를 어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네가 날 배신할지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이유가 있겠지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을 보면 네가 알려준 것들이 나에게 무척 소중한가 보다.
진짜 인생이 신기한 게 몇 년이 지나도 스스로 자란 것 같지 않고 제자리걸음인 것 같으면서 고작 몇 년 전 일들이 풋풋하고, 어리고, 서툴게 느껴지는 걸 보면 신기하다. 지금의 너도, 나도 알게 모르게 성장하고 있겠지 생각하면 조금은 위안이 된다.
앞으로도 우울증을 겪을 너와 나는 지금보다 더 나이 들어 있겠지. 마치 인생의 끝을 코 앞에 둔 것 마냥 나이를 먹어가는 게 시간제한같이 느껴질 수도 있고, 벌레가 바글거리는 소리가 문득 들려오는 것 마냥 내가 서있는 장소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끔찍한 기분도 느낄지 모른다. 여린 살갗이 다 터지도록 긁어서 피가 굳고 마르길 기다리지 못해 고통을 고통으로 삭일 지도 모른다. 그리곤 죽음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자글자글한 흙바닥에 누워있는 것 마냥 잠을 이루지 못하겠지.
나도 짧은 인생 살아가며 ‘나는 괜찮다’라는 말로 나를 속이고 사람들을 속여왔지만 내가 널 돕고, 네가 날 돕는다면 살아감이 좀 더 쉽지 않을까 생각한다. 힘들 거야. 알아. 내가, 네가 그리도 힘들었는데 당연하지. 다시금 네가 물렁해질 때를 대비해 나도 얼른 단단해지려 한다. 걱정했던 시간들을 꿋꿋하게, 단단하게 버텨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행복했던 시간, 힘들었던 시간 모두를 함께 해줘서 고맙다.
난 그동안 괜찮다만 말해왔다. 하지만 아프다는 걸 인정하는데서 치유가 시작되는 것 같다. 너는, 그리고 나는 이상하지 않아. 잘못되지 않았어. 세상엔 울어서 낫는 병도 있더라. 반드시 낫길 바라. 그러니 울어도 돼. 애써 외면해온 것을 인정했다. 난 여전히 아프다. 그러나 그 아픔을 상쇄할 만큼 가슴 벅차고 행복한 순간을 알게 되었다. 너와 함께 하는 순간들 말이야.
미지근하면 이 정도의 관계일까 불안하고 뜨거우면 금방 꺼질까 두렵고. 이래서 다들 사랑이 어렵다고들 하나보다. 여느 사랑하나 특별한 거 없다 싶다가도 세상은 사랑이 최고라 말하고. 답은 어디에 있는 걸까. 적어도 나는 당신이 나의 답인 것 같은데 미래의 내가 땅을 치고 후회할지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다 뿌듯해할지 궁금하다. 당신과 하루하루 즐겁게 보내다가 잠깐잠깐 뒤돌아보며 벌써? 하며 놀라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그래도 당신이 원하던 중후하고 멋진 백발 영감이 되어 있고 나는 슈트가 잘 어울리는 세련된 할매가 되어 있지 않을까? 그 역시 어떨지 모르는 미래를 오래오래 즐기며 함께 걷고 싶다. 고맙고 다행이다,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