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걸 아프다 말할 수 있는
과거의 나는 참 운이 없었다. 연속되도록 똥 같은 사람들과 깊이 엮였다. 연인인 해는 내가 과거 얘기를 할 때면 “그런 일들을 겪었는데도 참 잘 컸어. 장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맞아. 비뚤어질 수도, 좌절해서 방에 틀어박힐 수도 있었는데 난 참 장하지.”라며 괜스레 우쭐해했다. 하지만 해가 봐오던 낮의 나와 달리 밤의 나는 나약했다. 트라우마는 마치 낮에 징그러운 벌레를 잡고 ‘으으 끔찍해.’하고 까먹고 지내다가, 밤에 눈을 감으면 마지막까지 꿈틀거리던 모습의 잔상이 어둠 속에 떠다니는 것과 같았다. 비이성적이고 과장된 두려움이 밤의 나를 덮쳤다. 한번 풀려버린 기억 필름은 동이 틀 때까지 돌아갔고 뇌가 지쳐 생각이 마비되고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는 꿈에서까지 ‘그 날’ 속에 ‘그들’과 있었다.
내가 가진 불면증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가장 끔찍하게 내 수면을 괴롭히는 건 이 ‘만성 트라우마’였다. 만성 트라우마란 시도 때도 없이 최악의 상황만을 떠올리며 영화를 찍는다고 해서 내가 붙인 이름이다. 생각의 방아쇠는 시도 때도 없이 당겨졌다. 비 오는 캄캄한 날이면 그날 밤의 나는 사람 하나 없는 골목길에서 살려달라 내달렸던 유치원생이고, 왕따 당했던 시절 동창의 SNS 프로필을 마주하면 그날 밤의 나는 17살이었다. 공포스러웠던 장소, 고통스러웠던 상황의 연결고리는 끊임없이 내 주변에 혼재해 있었다. 온갖 트리거가 내 발목을 붙잡고 수면 아래로 끌어내려 숨통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살려뒀다. 한 때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도 날 모르는 장소에 가야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해에게 어렵지 않게 과거를 털어놨었다. 내가 항상 밤에 잠을 못 자고 낮에 피곤한 건 이유가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누구라도 내 힘듦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내가 비정상적으로 괴로워하는 게 나의 ‘이상함’이 아니라 가해자가 있기 때문이란 걸 증명하고 싶기도 했다. 나이가 들수록 힘듦을 털어놓을 곳이 점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주변인에게 트라우마는 내가 고통받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잊을 때도 된 오래된 일이었다. 혹은 상대가 대화 주제로 무겁게 느껴 입을 오물거리다 못내 하하, 웃고 말게 되었다. 반면에 해는 지난날에 묻혀 있는 나를 현재의 삶으로 계속해서 빼내어주는 구원자 같았다. 눈에서 눈물이 주룩 주룩 흐르고 숨이 턱턱 막힐 때 해의 문자 하나를 보면 그제야 공기가 뇌까지 닿는 것만 같았다. 내가 마치 빠져나갈 수 없는 스노우볼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가도 해의 이성적인 한마디면 세상은 가늠할 수 없이 드넓어졌다.
처음엔 그저 트라우마로부터 제삼자이자 내 편인 연인에게 위로받고 싶었다. 해의 위로는 달았다. 나는 옛날 일로 치부하지 않는 따뜻한 말이 고팠다. 해가 평소 입에 담지 않는 욕설로 그들을 욕하면 내가 당시 마음에만 담아두고 뱉지 못했던 말을 대변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것만으로 마음속 응어리와 울화가 풀리는 기분이었고 평화롭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나를 가볍게 해 주던 연인의 ‘제삼자’ 입장이 사실은 트라우마 속에서 ‘이방인’의 역할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해가 날 위로하고 곁에서 함께 해도 그 날의 그들 속에 해는 없었다. 상상 속에 해가 존재한 적은 있어도 그는 내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으며 그야말로 ‘함께 하는 것 밖에 못해주는 이방인’이었다. 누군가에겐 한없이 비논리적인 사고가 밤의 나에게 있어선 체험을 통한 논리적 사고였다. 여전히 가까운 동네에 살고 있는 여럿 가해자들은 언제든지 마주칠 수 있으며, 재미로 날 괴롭혔으니 심심풀이로 또 날 괴롭힐지 모르는 일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 미치자 난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잠을 자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눈을 감은 밤의 나는 내 안전을 위한 시뮬레이션을 끝없이 돌려봐야 했다. 왕따는 과거의 나를 증명할 수단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나마 있는 증거들마저 작동되지 않는 핸드폰 속에 잠들게 되고, 당시에 방관자였던 사람들이 내 편을 들어주며 증명해줄 리 만무하다. 그것이 날 공포스럽게 했다.
그런데 사실, 피해자임을 증명할 필요 없다. 지금의 난 내 안전을 위해 발버둥 칠 필요가 없다. 스스로도 비합리적이고, 과장된 두려움이란 걸 안다. 그래서 이성을 되찾은 낮의 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고 타인 앞에서 위축됐다. 트라우마의 가장 빌어먹을 점이었다. 가해자는 기억도 못하고 발 뻗고 잘만 잘 텐데, 피해자는 매일 뜬 눈으로 밤을 새운다. 낮 조차 지난날에 묻혀 살면서 트라우마는 현재의 삶에 계속해서 끼어든다. 잘 크긴 개뿔, 나는 여전히 그날에 멈춰있었다.
어느새 눈덩이처럼 몸집을 키운 트라우마는 낮에도 안전을 위한 시뮬레이션을 돌리게 했다. 그러다 연인에게 실례되는 생각을 더러 하기도 했다. 항상 불안에 떠는 나 자신이 초라해 보이니까 그가 날 그리워한다는 것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날 보고 싶다 말해도 믿기질 않았다. 누군가 이런 날 보고 싶어 한다고? 무겁고 커진 트라우마에 깔린 나는 발버둥 치다 해에게 더 이상 생각이 아닌 말로 내 불안을 내뱉었다. 해에게 가해자들이 다시 날 찾아와 해코지해도 너는 이방인일 뿐이라고 했다. 해는 내 말에 크게 분노하며 말했다. “너 점점 이상해져 간다.” 나는 연인의 입에서 나온 ‘이상하다’라는 말에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나왔지만 눈물의 이유인 서운함을 계기로 생각했다. ‘맞아. 밤의 나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나는 이해받을 수 없고 이상한 사람일 뿐이야. 애당초 입을 다물거나, 완전히 오픈해야 해.’
사달이 나기 이전에 밤의 나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못했던 건 이러나저러나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내가 “무서운 영화를 보고 잠을 못 잤지 뭐야, 악몽을 좀 꿔서 무서웠어.”라고 말하는 연인이었다면 사랑스럽기 마련이지만 이게 매일매일이라면? 내가 지긋지긋해지고 귀찮아지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어이없게도 우리 사이에 사랑이란 게 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를 사랑하는 해라면 귀찮고 피곤해하기보다 속상해할 텐데, 단지 나는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훌쩍이며 그간의 밤들을 설명한 나에게 그는 되려 사과했다. 이상하다고 화내서 미안하다고, 그렇게까지 힘들어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다신 그런 일 안 일어나. 만일 그렇다 해도 내가 곁에 있을 테지만,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최악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괴롭히지 마. 이미 끝난 일이야. 괴롭겠지만, 쉽지 않겠지만 이미 끝난 일이라고 생각이 날 때마다 되뇌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이만 보내줘.”
나는 시간이 지나도 스스로 ‘그 날’이 끝났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괴로우니까. 혹은 끝났다 생각하기 싫다며 고집하기도 했다. 이 또한 나는 아직도 괴로운데 누가 멋대로 끝내나 싶어서. 그러면서 누군가 구원자가 있다면 나날이 이어지는 고통에서 날 구해줬음 했다. 그런데 해가 사랑을 담아 내민 해결책은 트라우마라는 영화의 엔딩크레딧을 내려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벙 쪄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날 괴롭히고 있는 건 누구지?
스스로에게 터무니없어서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했다. 과거는 밤마다 반복 상영되는 영화였다. 그런데 그가 내게 되뇌어 말했던 “끝났어.”란 말은 마법주문처럼 나를 과거에서 벗어나 현실로 끄집어냈다. 그렇게 엔딩크레딧을 내려버리고 밤의 나는 새로운 영화를 기다리며 잠을 잘 수 있었다. 과거를 영화 한 편 정도로 가슴에 품은 채 더 이상 상영하진 말자 자기 전에 되뇌었다. ‘끝났다.’, ‘끝났어.’ 나는 많이 아팠다고 해에게 말했다. 해는 내게 사랑으로 만든 약을 내밀었다. 약을 먹는 건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나만이 할 수 있고, 남이 해줄 수 없는 것. 과거를 억누르는 것도, 없는 것 취급하는 것도, 피해자임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나는 나의 귀함을 증명하면 되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그러기를 원하기만 하면 되었다. 나는 과거가 현재 내 생을 지배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관대하면서도 단호하게 대해야 했다. 내가 나아가고자 하면 나아가질 것이라 믿기로 했다. 그러자 꿈속의 나도 더 이상 그날에 표류하고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