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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많은얼룩말 Sep 02. 2024

우리들의 빛나는 청춘을 위하여

친구와 친구에게


8월 30일 새벽 4시 6분.

잠자리에 누운 지 두 시간 반이 지났다. 깜깜한 방안, 새근새근 자고 있는 남편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떠보니 나의 정신이 얼마나 말짱한지 알 수 있었다. 그렇다. 난 너무 오랜만에 깊은 잠 블랙홀에게 입장 거부를 당하는 중이다. 내가 얼마나 피곤한가에 대해 아무리 호소해 봐도 소용이 없다. 하루 전 내가 마신 커피나 홍차의 양이 아무리 적다 하소연하여도, 결국 내가 섭취한 카페인의 농도가 깊은 잠 블랙홀 입장 여부를 결정하니까.


아무리 오랜만이어도, 느낌 아니까. 나의 각성을 이용해 글이라도 써야겠다고 휴대폰을 잡았다.




오랜만에 아는 동생 H가 땅끝 사천까지 놀러 온다 하였다. 그곳에 친한 친구 D가 산다며, H를 보러 가는 김에 친구도 만나고 친구를 만나는 김에 를 만나야겠다는 아주 합리적인 선택을 다. 처음엔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녀의 선택이 얼마나 탁월했는가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H가 사천에 오기로 한 약속을 구체화시키는 중에 우린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바로 H의 친한 친구 D가 나의 가까운 이웃이었으니 말이다.


내 친구의 친구가 내 친구였다는, 이 웃기고도 신기한 사실에 우리는 얼마나 박장대소했는지 모른다. 나와 H는 내가 사천에 오기 전까지 같은 교회를 다녔고,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이다. H와 D는 대학 동기이다. 세월이 흘러 D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H는 지금 뱃속에 한 아이를 품고 있다.


8월 29일 오전 11시 20분.

나와 D는 사천공항에서 H를 픽업했다. 그리고 고심하여 고른 브런치 카페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서로 공유했던 시간은 다르지만, H가 나와 D의 교집합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의 만남은 꽤나 편안하게 시작되었다.


그녀들의 풋풋했던 대학시절 에피소드를 하나 둘 듣고 있자니, 재밌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 이야기 속에 빠져들어 그 시절 그곳에 나도 함께 서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 '경력직(?) 엄마'와 '예비 엄마'라는 타이틀이 주는 연대감으로, 우리는 그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던 시간의 공백을 깨트리고 더할 나위 없이 편한 친구로 마주 앉아 있었다.


(나의 불면은 점심식사 후 마신 밀크티 세 모금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래도 나는 홍차와 거리를 두는 편이 좋을 듯하다.)


오후 4시, D의 세 아이들과 조이를 하원시킨 후 모두 D의 집에서 모였다. 아이 넷과 어른 셋. 기가 쭉쭉 빨리는 육아 현장에서 동지애를 공유하며 우리는 무사히 저녁식사까지 마쳤다. H의 1박 2일 일정을 알차게 마무리하기 위해 우리는 아이들을 재우고 다시 만나기로 했다. 나는 H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H가 잠시 쉴 동안 난 조이를 씻기고 잠자리에 눕혔다. 그리고 회식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뒤에 일어날 모든 일을 일임한 후 H와 함께 다시 D의 집으로 향했다.


피로한 몸뚱이에게, 피로한 것이 어제오늘 일이겠느냐, 하며 마음이 몹시 즐거움을 상기시켰다. 안경을 챙겨 쓴 우리의 눈들은 어둑해진 밤에도 반짝였다. 밤 9시에 재개된 우리의 회동이 새벽 1시가 다 되어가도록 쉴 틈이 없었다. 망고빙수를 가운데 두고 말이다.


그날밤, 어디에서부터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각자 인생의 굴곡졌던 날들과 직면한 현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며 서로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했고, 함께 웃고 눈물도 흘리며 서로를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리고 우리네 엄마 아빠들은 우리를 어떻게 키웠을까, 하며 지나간 날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내일이 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기도 했다.


'OO엄마'가 아닌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이 관계가 그리도 고팠는지도 모르겠다.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동안, 아이들은 기억하지 못할 우리의 젊은 오늘이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기억 속에 꾹꾹 눌러 담고 싶어졌다. 뱃속에 있든, 우리 눈앞에 있든, 사랑스러운 우리의 아이들을 키워내느라 우리가 젊디 젊다는 것을 잊어버릴까 하여. 우리 모두에게 '오늘'이 앞으로 살아갈 날들 중 가장 젊은 날이니, 거울 속에 비친 우리 자신도 한번 더 예뻐해 주자, 속삭이며.


끔 잊어버리곤 하는 우리들의 빛나는 청춘을 위하여, 오늘은 이렇게 글을 썼다. 엄마들에게도 이런 엠티가 한 번씩 꼭 필요하다고(아빠들도 필요하다면 언제든 이런 시간을 가지시라.), 우리의 우정이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꽃 피웠던 8월 끝자락의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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