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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많은얼룩말 Sep 21. 2021

당신에게 SOS를 칩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그 순간 일렁이는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면 도리어 그것이 나를 삼켜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쏟아냈다.




 휴가를 코 앞에 둔 8월의 마지막 금요일 오후였다. 실상 휴가가 시작되는 시점이라 해도 무방했다. 남편과 나는 소풍 가기 전날처럼 들떠 있었는데, 우리의 들뜸은 각기 다른 이유에 기인하였다. 물론 몇 날 며칠간 우리가 온종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만, 직장인에게 휴일을 얻었다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또 있을까. 나 또한 덩그러니 홀로 있어야 하는 시간에서 잠시나마 해방되기에 기분이 좋은 건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휴가는 휴가고 현실은 현실인 법.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휴가가 지나고 나면, 나는 또다시 텅 빈 시간 속으로 홀로 들어가게 될 터였다. 결국 이러한 자각은 휴가가 더 이상 즐겁게 느껴지지 않도록 마음을 금세 우울로 물들이고 말았다. 남편은 나의 심경을 읽지 못한 채 내게 저녁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한 몇 가지 안을 제시했는데, 나는 도무지 무엇을 해야 할지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내 마음에 일렁이는 불길을 잡지 않고서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나는 남편에게 앉아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본 채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있잖아, 매일 그렇듯 나는 지금도 무엇이든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무엇이든 하고 싶어. 내 마음, 이해하겠어?”


 “그럼, 충분히 이해하고 말고.”


 “여봉봉, 나는 누군가를 돌보고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살았는데, 이제 내 삶을 살아가야지 하고 보니 그 누구도 나를 이끌어주거나 관리해주지 않는 거야. 물론 그게 이상하다는 것도, 내가 담임선생님이 필요하다는 것도 아니야. 지금까지 잘 걸어온 것 같았는데…, 그런데 내가 스스로 무언가를 열심히 하다가도 이게 맞는가 싶어 길을 자꾸 헤매게 되는 것만 같아.”




 남편에게 마음을 털어놓아야겠다 생각했을 때만 해도 구체적인 해결 방법을 기대하진 못했다. 그래도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니 당장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길을 헤매는 내 옆에 남편이 함께 해줬으면 해서 시작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내 마음을 꺼내놓자 깜깜한 밤하늘에 길잡이의 역할을 하는 별이 있듯, 반짝이는 지혜의 별이 남편의 머리에 내려앉은 듯했다.




 “충분히 이해해. 혼자서 무언가를 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 같아. 그러니 이젠 내가 여봉봉을 도와줄게! 내가 여봉봉의 일정을 관리해주는 거야. 매일 해야 할 일을 하나씩만 정해 보자. 월요일에는 지금처럼 글을 쓰는 거야. 무조건 월요일에는 글을 한 편 쓰기. 화요일에는 여봉봉이 수강하고 있는 드로잉 수업을 듣고 그림을 하나 그려줘. 음, 그리고 목요일에는 영어 공부를 하자. 여봉봉의 자산을 썩혀 두는 건 너무 안타까운 일 같아. 악기 연주도 한참 쉬면 손이 굳는데, 영어도 사용하지 않으면 감을 잃게 되지 않겠어?”


 “맞아, 맞는 말이야.”


 “그리고 수요일과 금요일은 여봉봉이 자유롭게 사용해. 약속을 잡아서 밖으로 나가든 뭘 하든 말이야. 하루에 하나만 하면 돼.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쓰고. 알겠지? 이건 나와의 약속이야.”




 뭔가가 아쉬운 김치찌개에 간 마늘 한 큰 술 넣고 맛보았을 때 느꼈던 그 느낌, 복잡했던 시내 한복판에서 차선 변경을 성공적으로 했을 때 느꼈던 그 느낌, 드라마에서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대사를 들었을 때 느꼈던 그 느낌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아, 지금 도파민이 분비되었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돌고래가 솟구쳐 올랐다. 돌고래의 환희의 울음소리가 내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나 혼자서 도저히 찾을 수 없던 퍼즐 조각 하나가 제자리에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길을 헤맸던 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매일 다이어리에 해야 할 일들을 잔뜩 써놓기만 하고 스스로를 '의욕만 앞선 게으름뱅이'라 치부하던 나였다. 그렇기에 많은 일들을 처리할 '방법'을 찾던 나였는데, 정작 그날 남편과의 대화에서 내가 깨달았던 건 '나는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이 내게 큰 동기부여가 되고 말았다. 또한 남편과의 약속이라는 틀 안에서 내 마음이 자유를 찾게 되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고 말이다.


 인생 2막을 시작하며 홀로 낯선 시간과 사투를 벌이던 내게 그날은 '남편'의 존재를 새롭게 일깨워줬다. 굳건히 내 길을 찾아 헤매던 나에게 이제는 더 이상 홀로 걷지 말라고 말이다. 그리고 나 또한 남편을, 내 주위에 있는 누군가를 홀로 걷게 하지 말라고. 나를 여기까지 몰고 와 준 나의 우울에게 고맙다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내가 친 SOS에 반응해준 남편에게, 기꺼이 내가 서 있는 미로 안으로 뚜벅뚜벅 들어와 준 나의 사랑스러운 남편에게 감사를 표하며. 이번 미로의 열쇠는 *SOS였다.


*SOS 에스오에스: 구원을 요청하거나 위험을 알리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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