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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많은얼룩말 Sep 14. 2021

그래도 나는 당신의 숙면을 응원합니다


 새벽 1시 57분.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어 기어이 눈을 뜨고야 말았다. 이번에도 속상하게 내 뇌는 각성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아무래도 오늘 새벽은 잠자기를 포기해야겠다.




 나는 카페인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다. 그래서 오후 3시 이후엔 커피나 카페인이 든 음료를 마시지 않는 편이다. 오후 3시가 나만의 기준선이다. 그래서 저녁에 나를 만났던 대다수의 사람은 내가 커피를 안 마시는 사람인 줄 알았다더라.


 나는 이따금 커피 때문에 밤잠을 못 이뤘다던 엄마의 하소연을 듣곤 했다. 머리만 대면 금세 잠이 들던 내게 엄마의 하소연은 크게 와닿지 않았는데, 카페인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그 괴로움을 직접 경험하고서야 나는 엄마의 설움을 온전히 공감할 수 있었다.


 3년 전 어느 일요일이었다. 나는 오후 늦게 마신 진한 밀크티 한 잔으로 밤을 꼬박 새운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출근을 위해 나름 잠자리에 일찍 들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깊은 잠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의 방해로 호그와트 급행열차가 기다리는 9와 3/4 승강장을 찾지 못하는 기분이랄까(9와 3/4 승강장은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승강장으로, 런던 킹스크로스 역 9번 10번 승강장 사이의 단단한 벽으로 돌진하면 들어갈 수 있다). 결국 동이 틀 무렵 가까스로 1시간 30분 정도 눈을 붙인 후 출근을 했지만, 강력한 카페인 덕분에(?) 나는 거뜬한 하루를 보냈다.


 결혼하고 두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어느 평일 저녁, 남편과 나는 식사를 마친 후 영화를 한 편 보기로 했다. 남편은 커피를 마시고 싶다며 진한 더치커피 원액에 우유를 타서 라테를 만들었다. 뭐든 맛있는 것이라면 내 입에 먼저 갖다 대는 스윗한 남편인지라, 그날도 남편은 (아내 사용설명서를 까맣게 잊은 채) 내게 라테를 내밀었다. 그때의 시각은 저녁 7시 즈음. 한 입만 마셔보라는 남편의 상냥한 권유에 나는 커피를 홀짝 마셔버렸다. '한 모금쯤이야'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나는 깊은 잠이라 불리는 블랙홀에게 출입 거부를 당하고 말았다. 아무리 눈을 감고 온 몸에 힘을 빼고 있어도 나는 여전히 각성 상태였다. 옆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남편이 그렇게 얄밉게 느껴질 줄이야. 결국 나는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와 서재에서 시간을 보냈다. 새벽에 화장실을 가던 남편이 서재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말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연유도 마찬가지이다. 어젯밤 11시 반도 안 돼서 굉장히 피곤한 채로 잠자리에 누웠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잠에 들지 못했다. 옆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는 남편의 숨소리만 들릴 뿐. 깊은 잠 블랙홀에게 거부당하는 그 느낌에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보니 새벽 1시 57분이었다. '내가 왜 잠들지 못하는가'에 대해 생각해보니 전날 오후에 마신 말차 라테가 떠올랐다.


 어제 오후, 남편이 오랜만에 말차 라테가 마시고 싶다 하여 말차 라테 두 잔을 만들었다. 남편이 마실 라테는 남편이 선호하는 진한 맛으로, 내가 마실 건 남편보다 적은 양으로 연하게 탔다. 남편은 한 입 마셔보더니 자신의 라테에 말차를 조금 더 넣어야겠다고 말했다. 그리곤 내 라테 색깔이 너무 연하다며 (아내 사용설명서를 까맣게 잊은 채) 내 컵에 말차 가루 녹인 물을 조금 더 부었다. 나는 남편의 자상함이 고마워 바닥에 내려앉은 말차 가루까지 휘휘 흔들어 다 마셔버렸다지. 이렇게 못 잘지도 모르고.


 자고 싶은데 잠이 들지 않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다. 그래도 기나긴 새벽에 이렇게 글이라도 쓸 수 있어 다행이고 감사하다. 이제 곧 눈을 떠 잠 못 잔 퀭한 아내를 보게 될 남편이 이번엔 또 얼마나 미안해할까 벌써부터 애처롭다.


 그래도 나는 당신의 숙면을 응원합니다. 오전 일찍 출근해야 하는 당신을 위해. 늘 내게 사랑의 한 입을 선사하는 당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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