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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많은얼룩말 Sep 24. 2021

글이 써지는 날


 청명한 하늘을 보니 완연한 가을이었다.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오니 글을 쓰기에 적격인 계절이 왔다 싶었다. 포트에 물을 넣어 끓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커피는 차갑게 마셔야 제 맛이라 말했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따듯한 커피를 마셔야 할 듯싶었다. 따듯한 커피의 매력도 무시할 순 없으니까 말이다.




 오늘 아침, 애나(Ana)는 차로 남편을 출근지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3시까지 애나가 사는 단지에 단수가 된다는 공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수'와 '남편의 출근'이 무슨 상관이냐 하겠지만, 하루 종일 집에 있어야 하는 애나와 그녀의 하루를 잘 살펴야 하는 남편에게 단수는 '오늘의 과제' 정도는 됐으니까.


 "집에 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면, 집에 있는 시간 동안 난 너무 불편할 것 같아요."

 "그렇담, 당신이 내일 내 차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소. 어디든 다녀와요."


 아직 혼자서 차를 가지고 나가본 적이 없는 터라, 애나는 걱정 반 설렘 반으로 남편에게 차 키를 건네받았다. 남편을 출근지까지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운전면허 실기 시험 때만큼이나 긴장되는 길이었다. 애나는 남편이 자신에게 늘 했던 말, "천천히"를 혼자 되뇌며 집 앞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애나, 반가워요! 아침 일찍 어딜 다녀오는 길인가 봐요?"

 "아, 안녕하세요! 남편을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에요. 서머(Summer), 아침 일찍 어디 가세요?"

 "오늘 애나가 차를 쓸 모양이군요. 오늘 단수라잖아요? 집에 물이 끊기기 전에 나왔어요. 물이 나오기 전까지 친구네 집에 가 있으려고요. 애나도 서둘러 어디든 다녀와요. 그럼 나 먼저 가요."


 서머는 애나에게 손을 두어 번 흔들더니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그리곤 여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가버렸던 것처럼, 서머가 언제 여기 있었는지도 모르게 저 멀리 가버렸다. 잠시 멀뚱히 서 있던 애나도 제 갈길을 가려고 발을 뗀 찰나, 레이(Ray) 할아버지가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애나, 잘 지내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저야 뭐, 늘 비슷하죠. 할아버지는 어떠세요?"

 "날씨만큼이나 좋아요. 글은 잘 쓰고 있어요?"

 "아, 글이요? 글쎄요. 글쓰기에 날씨는 딱 좋은데 말이에요. 오늘은 쓸 수 있겠죠?"

 "조급해하지 말아요, 애나. 글이 써지는 날이 있으면, 글이 안 써지는 날도 있어야 하죠. 그래야 균형이 맞으니까요."

 "그러네요. 저는 꾸준히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는 거네요?"


 레이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미소를 머금은 채 애나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여줬다. 그때, 레이 할아버지 뒤편으로 린(Lin) 할머니가 걸어오고 있었다. 할머니의 발소리를 들으셨는지, 레이 할아버지는 몸을 반쯤 돌려 손을 흔들었다. 할머니도 반갑게 손을 흔들며 사뿐사뿐 걸어오셨다.


 "애나, 오랜만이군요! 요즘 어때요?"

 "할아버지 말씀을 따라 해 보자면, 날씨만큼이나 좋아요. 글은, 안 써지는 날이고요. 할머니는요?"

 "좋군요. 나도 좋아요, 선선한 바람만큼이나 아주 적당히."


 레이, 린 부부도 단수 맞이(?) 나들이를 가시는 길이라고 했다. 린 할머니는 애나가 원하면 함께 나들이를 가자고 했지만, 애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대신 단지 정문까지 함께 걸어가 배웅하겠노라 말하며 말이다. 하지만 애나의 집에서 정문까지는 꽤나 가까운 거리여서 레이, 린 부부는 단지를 한 바퀴 함께 산책한 후에 떠나겠다고 했다. 선선한 날씨만큼이나 꽤 좋은 제안이었다.


 "가끔은 맑은 하늘을 봐도 무료하게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리곤 제가 지나가는 구름보다 더 게으르다고 느껴지기도 하고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고민이 돼요."

 "오, 나도 그랬죠. 그리고 요새도 가끔 그런 고민을 하고 말이에요. 부지런한 레이를 보면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지긴 하지만, 레이와 몇 마디 나누다 보면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죠."


 린 할머니의 말에 레이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며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무얼 해야 할지 고민할 수 있다는 게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난. 그리고 저 지나가는 구름처럼 애나도 지금 이 시간을 지나가는 중 아닐까요? 애나의 일상에 불어오는 바람의 속도에 맞춰서 말이죠."

 "애나, 무엇을 꼭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어쩌면 지금은 가만히 있어야 할 때일지도 모르죠. 각기 다른 속도의 바람이 불고 있으니, 누구를 애써 따라가려 하지 않아도 돼요."

 "그래요, 애나. 우선 지금처럼 그 자리에 있어줘요. 가끔 아침에 집 앞에서 만나면 이렇게 인사해주고요."


 어느덧 세 사람은 단지 정문에 도착했다. 린 할머니는 애나를 꼭 안아주며 작별 인사를 했다. 레이 할아버지는 애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애나, 좋은 하루 보내요. 남편의 하루가 고돼도 퇴근길이 즐거운 건 사랑하는 아내가 집에서 자신을 기다려주기 때문이니까요."

 "배웅해줘서 고마워요, 애나. 다음에 또 만나요."

 "두 분,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다녀오세요!"


 애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손을 씻으려고 수도꼭지를 돌리니 아직 물이 잘 나오고 있었다. 단수 예정 시각이 훨씬 지났는데도 말이다. 아직 물탱크에 물이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거실로 나와 창문을 열고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느꼈다. 바람에 떠밀려가는 구름도 보았다. 오늘 아침, 애나는 자신에게 불어온 바람의 속도만큼 움직여 보기로 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아무래도 오늘은 글이 써지는 날인가 봐. 청명한 하늘, 따듯한 커피, 그리고 선선한 바람까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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