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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많은얼룩말 Jul 02. 2021

당근에 대한 고찰

완벽주의자의 아침식사 준비


"지금부터 나는 자네에게 그제 이른 아침에 내가 했던 생각을 잠시 이야기하고자 하네만, 들어볼 의향이 있는가?"




이제야 겨울이 겨울답다고 느껴지는 건 두 차례에 걸친 폭설 때문이었다는 걸 자네도 알 걸세. 눈이 아주 무서운 기세로 쏟아지는 걸 보고, 난 하늘에 구멍이 난 줄 알았지만 말이야.


추운 아침일수록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는 마마 레스토랑의 철칙을 따라 나는 오전 7시 즈음 아침 식사를 준비하러 나갔네.

(MaMa - Master Chef Mama의 준말)



아, 내가 자네에게 말을 했었나?

나는 요즘 마마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배우고 있네만.


여하튼 그날 내가 준비해야 했던 건 당근이었어. 그래, 자네가 알고 있는 바로 그 당근 말일세. 남아있던 당근 조각으로 나는 먼저 채 썰기에 들어갔지.


요즘 마마 셰프(Mama Chef)가 나를 '채 달인'이라고 불러준다네. 달인이라는 소리에 머쓱하기는 하지만 기분이 꽤 좋은 건 부정할 수 없었지.


아, 이게 내가 하려던 말은 아니야.

내가 그날 썰어야 할 당근은 2개가 더 있었어.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검은 봉지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당근을 두 개 꺼냈는데 글쎄, 그 순간 난 당근을 보고 묘한 감정이 들었다네.


그래,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라는 걸 자네도 눈치를 챘겠지?


나의 묘한 감정은 두 당근의 색깔에 있었어. 두 당근의 각기 다른 주황색 말이야.



내가 지금까지 수많은 당근으로 채 썰기를 해왔지만 이렇게 나란히 놓인 당근의 색이 서로 다른 건 아마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네. 이 두 개의 당근은 어디에 내놔도 똑같이 '당근'이라 불리겠지만, 나는 이 두 개의 당근에서 각기 다른 매력을 느꼈다네.


그래, 정확히 말하자면 '다름의 매력' 말일세.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썰어왔던 당근들 중 그 어느 것 하나 같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 당연한 말이지만, 이제야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는 말일세.


지금쯤 자네가 무엇을 걱정할지가 보이네만, 나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생각만 하고 있지는 않았네. 나는 바삐 손을 놀렸지. 나는 채 달인이니까 말일세.



자네에게도 몇 번이나 말했듯 나는 당근을 썰면서도 나의 고질적인 병, 완벽주의자의 질서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었네. 가지런히 놓인 썰린 당근을 볼 때면 마음이 아주 잔잔해진다고나 할까.


그런데 마마 셰프로부터 채 달인이란 근사한 별명을 얻었지만 말이야, 나는 아직 많은 양의 채썰기 앞에선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네. 마마 셰프는 저 멀리 앉아서도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갔는지 다 알더 군. 심지어 마마 셰프는 내게 등을 보이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그래서 나는 최대한 어깨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나름의 방법을 고안하고 있다네. '컴퍼스 썰기(like a compass)'라고 내 나름 이름을 붙여봤는데, 숙달이 된다면 자네에게도 꼭 보여주겠네.



어찌 되었든, 채를 썰어도 여전히 다른 두 당근의 색이 참 아름답지 않은가? 두 당근의 채도가 어느 정도 될지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지만, 그저 내 눈은 즐거웠네.


채를 썰기에 애매한 부분은 집어먹었지.

당근이 이렇게 달 줄이야!


아, 걱정하지 말게나, 마마 셰프가 먹어보라고 해서 먹어 본 거니 말일세.


나는 어렸을 적 당근을 정말 싫어했네. 그 당시 내 혀가 느끼는 당근의 맛이란, 정말 최악이었지. 그런데 당근이 이런 맛이었다니 말이야.


당근에 대한 기억이 새롭게 쓰이는 날이었네.


오늘따라 앞마당을 뒤엎은 눈이 더욱 희게 보이는 건, 당근이 주황색이기 때문일 걸세.



Sincerely,

Ea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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