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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많은얼룩말 Jul 06. 2021

내 몸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합니다

컨디션 난조 에피소드

|눈|

이 방에 불은 누가 껐지?


|손|

나야 나, 손이야.


|눈|

잘했어, 손.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면 내가 어떻게 되겠냐고! 그런데 도대체 또 뭘 할 생각인 거야? 이번에도 뇌, 너냐?


|뇌|

나라고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나도 모르겠는데, 뭔가가 자꾸 떠오른다고!


|눈|

웃음이 나오는 거 보니 입, 너 할 말 있니?


|입|

나? 아니. 다년간의 경험과 최근 기록에 따르면 이 웃음은 뇌가 무언가 재미있는 일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봐.


|합창|

Oh, my God!


|손|

다들 손등과 손목에 올라온 수포 봤니?


|다리|

손, 이번엔 너야?


|눈|

수포 봤어. 징그러워. 예전에 발목에 났던 거 봤었는데..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손?


|손|

내가 알겠니? 열심히 일한 대가가 수포라니! 나 일 안 해! 절대 안 해!


|뇌|

내 생각엔 말이야, 또 과부하가 걸린 거야.


|어깨|

과부하? 그건 또 뭐야. 쟤는 꼭 어려운 말만 골라하더라. 재수 없어.


|뇌|

어깨, 넌 아무래도 나에게 열등감이 있는 모양인데 내가 너보다 위쪽에 있는 건 결코 내 뜻이 아니었단 것만 알아주길 바라.


|발|

그래, 그건 뇌의 말이 맞아. 우린 다 제자리에 있는 거라고.


|뇌|

다들, 잘 들어봐. Earl이 지금 침대 위에 누워있어. 그것도 이렇게 대낮에. 불을 끄고서 말이야.


|눈|

제발 잠이라도 잤으면 좋겠어.


|손|

내 말이.


|위|

난 배가 고픈데.


|입|

선물 받은 브라우니나 쿠키 좀 먹을까?


|뇌|

아니, 다들 내 말 좀 들어봐 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Earl이 지금 좀 이상하단 말이야.


|손|

이상하지, 많이 이상해. 방금 전에 재즈곡 120개를 일일이 눌러서 재생목록에 넣었다고.


|팔|

그래, 누워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팔 떨어지는 줄 알았어.


|뇌|

아니, 그건 아까 Bill Evans 곡을 하나 연주해보더니 마음에 들었나 봐.


|마음|

맞아. 아주 흡족했지. 곡 말이야. 그 곡이 주는 느낌 말이지.


|뇌|

그래, 그 덕분에 나는 Bill의 곡들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하지만 그 많은 곡들을 한꺼번에 재생목록에 넣는 방법을 찾다 찾다 끝내 찾지 못했단 걸 알아줬으면 해.


|눈|

맞아, 눈을 크게 떠봐도 안 보이더라고.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낯선 제목들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였지 뭐야.


|귀|

그래, 지금 들리는 연주곡들 말이지? 나는 좋아. 이렇게 새로운 곡들을 잔뜩 얻어오다니, 박수라도 치고 싶어.


|마음|

귀, 너도 좋아할 줄 알았어.


|코|

그래서 그게 Earl이 이상한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데?


|뇌|

아, 아 그래. Earl은 지금 매우 움직이고 싶어 해. 그런데 지금 누워있다고.


|발|

누워있지. 리듬에 맞춰 발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말이야.


|손|

Earl은 절대 쉬지 않아. 나 좀 봐. 지금 난 우리가 하고 있는 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핸드폰에 기록하고 있다고.


|뇌|

아니, 그건 그렇지. 그건 그래. 그건 인정한다고.


|어깨|

그래도 쟤는 인정이 참 빨라.


|뇌|

고마워, 어깨. 그런데 어젯밤에 Earl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니?


|눈|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다만 눈물이 찔끔 나온 건 알고 있어.


|손|

Earl이 어떤 생각을 했는데?


|뇌|

어젯밤 Earl은 '이렇게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겠다.'라고 생각했어.


|눈|

뭐?


|입|

세상에.


|귀|

난 못 들었는데?


|발|

생각만 했으니까 우린 몰랐지.


|팔|

편하게 누워만 있었는데·····.


|다리|

뇌, 대체 Earl이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뇌|

Earl은 지금 많이 피곤하고 힘든 상태야.


|손|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 쉬지도 않고 움직였으니까 말이야.


|다리|

맞아, 지난주 금요일부터 주말까지 무리했어.


|마음|

아니, 어쩌면 한 달 내내 무리한 걸지도 몰라. Earl은 하고 싶은 일이 산더미야.


|뇌|

어젯밤에 Earl이 느낀 힘듦은 평소와는 달랐어.


|눈|

맞아, 그래서 새벽 5시 50분에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는걸. 6시 23분에 다시 뜨긴 했지만 말이야.


|뇌|

그리고 내가 다시 눈 보고 눈을 감으라고 했지. 비상이었어. 오전 스케줄을 모두 취소시켰고 말이야.


|입|

어제 Earl이 동생 양이에게 몸이 힘들다는 사인을 보내긴 했어.


|귀|

그래서 동생 양이가 이렇게 말했지. "우리 같은 성향의 사람들은 집안일을 해도 좀 적당히 해야 할 필요가 있어."라고 말이야.


|손|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우린?


|뇌|

오늘은 최소한으로만 움직이자고. 아직 비상등이 꺼지지 않았어.


|발, 다리|

좋아, 휴가다!


|위|

그. 래. 도. 배는 고프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물론 이런 비상 상황에서 소화력을 장담 못 하겠지만 말이야.


|손|

하, 나도 쉬고 싶다.


|팔|

나도야.


|뇌|

손과 팔은 조금만 더 수고해 줘. Earl이 몸 전체를 크게 움직이는 것만은 막아야 해서 말이야.


|손|

그러니까 뇌, 그만 말해.


|뇌|

미안, 이제 마무리하자. 너희도 알다시피 Earl은 가만히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해. '지금 노트북을 열어서 글을 제대로 써볼까.' 하는 생각이 사방에서 밀려들어오고 있는데, 막기가 참 쉽지 않네. Earl은 지금 쉬어야 하는데 말이야.


|눈|

걱정 마, 뇌. 일단 눈을 감으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잠에 들 거야.


|어깨|

오케이, 자자 다들 힘 풀자고. 긴장 좀 풀어. 온몸에 힘이 빠져야 해! 특히 뇌, 네가 멈춰야 해. 알지?


|뇌|

맞아. 자, 이제부터 취침모드!






몸을 못 살게 군 것(?)에 대해 철저히 반성하며, 몸에게 심심한 사과를 전합니다. 쉬려고 누웠는데 몸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이상한 이야기.


강제 취침모드와 휴식모드로 들어가는 바람에 이틀 뒤에 겨우 마무리했던 얼(Earl) 작가의 컨디션 난조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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