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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많은얼룩말 Jul 06. 2021

안부 인사

추억의 도넛


오랜만일세. 잘 지내고 있었겠지? 내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자네를 생각하며 몇 번이나 펜을 들었다 놨는지 모른다네. 그런데 왜 이제야 소식을 전하느냐고? 그 이야기를 이제부터 해보려고 한다네.


(아, 가능하다면 Bill Evans의 When You Wish Upon a Star를 들으면서 내 편지를 읽어줄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그 곡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일세. 마치 우리가 한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듯 말이야. 만약 그게 어렵다면, '반짝반짝 작은 별'이라도 속으로 불러주게나. 그냥, 너무 적막하지 않았으면 해서 말일세.)



지난 편지에서 말했듯 나는 마마 레스토랑에서 일하고 있다네. (MaMa Restuarant - Master Chef Mama Restaurant.)


(기억이 안 난다면, <당근에 대한 고찰>을 다시 한번 읽어보게나.)


자네, 마마 레스토랑에서 일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하겠나? 이것은 말이야, 음, 내가, 아주, 매우, 할 일이 많다는 뜻이야. 하하하. 나를 좀 불쌍히 여겨주게나.


친절하게 설명해보자면, 내가 마마 셰프(Mama Chef)로부터 아주 많은 일들을 전수받고 있단 말일세. 나도 조만간 정식으로 셰프라는 이름표를 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 이름으로 식당을 열게 된다면 자네를 꼭 초대하도록 하지.


아, 그렇다고 너무 큰 기대는 말게나. 기대와 실망은 늘 짝꿍이었으니까 말이야.


사실 지난주 수요일에 내가 자네에게 편지를 쓰려고 했네만,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지. 마마 셰프가 어디에선가 공수해온 도넛 가루가 문제였다네. 그래, 도넛 가루. 마마 셰프는 아주 갑작스럽게 도넛을 만들자고 했어.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갑작스러운 일을 맞이해야 하는 나의 당혹스러운 마음을 이야기해봤지만, 마마 셰프로부터 "그것이야말로 우리네 인생."이라는 짧은 답변만 돌아왔다네. 그래서 나는 이 상황을 쿨하게 받아들이기로 했지.



그런데 도넛을 만들자는 제안을 들었을 때 자네, 내 심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반반이었네. 


'또 편지 쓰기를 미뤄야겠군, 이런.'


이렇게 아쉬운 마음이 드는 동시에 이런 마음도 들었지.


'음, 추억의 도넛.'


여러 추억 더미들 속에서 도넛을 발견하게 된다면 아마 자네도 나처럼 편지 쓰기를 미룰 수밖에 없었을 거라네. 암, 그렇고말고.


도넛 가루에 200ml의 물을 넣고 반죽을 하기 시작하자 내 추억 더미들 속에서 작은 소녀 두 명이 걸어 나왔네. 엄마 손을 꼭 잡은 채로 말이야. 그리고 난 그들의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네. 그들은 한창 도넛을 튀기고 있었거든. 즐거운 냄새가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네.



그건 그렇고, 처음엔 반죽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네. 물을 더 넣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나의 볼멘소리에 마마 셰프는 직접 반죽 치대기를 선보이셨지. 


역시, 내 손이 문제였던 거야. 그래도 곧잘 따라갔다는 걸 알아주게나.



그리고 난 숙성된 반죽 뭉텅이를 밀대로 잘 밀어서 펴주었어. 내 마음도 펴지는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혹시 자네, 마음이 살짝 구겨져 있다면 도넛 만들기를 추천하겠네.


잘 안되면 어떡하냐고? 만약 만들다가 잘 안되면 반죽 뭉텅이를 밀대로 흠씬 두들겨 봐. 그러다 보면 아마 반죽 뭉텅이에게 미안해질 걸세. 사실 반죽 뭉텅이는 아무 잘못이 없거든. 그러니 꼭 사과를 하도록 하게.


이상하다고? 그렇지. 하지만 그냥 내 말대로 그렇게 해보게. 자네의 추억 더미들 속에 최초의 '미안한 마음이 드는 도넛'을 추가하는 일이 될 테니까 말이야.



어쨌든 나는 밀대로 쫙 편 반죽을 계량컵으로 찍어 도넛 모양을 만들었다네. 그런데 마마 셰프는 도넛이라고 하기에는 크기가 너무 작은 게 아니냐며 내게 물컵을 건네주셨지.


하지만 막상 기름에 튀기고 나니 반죽이 부풀어 오르며 도넛의 크기가 커지는 걸세! 마마 셰프는 처음 내 선택이 옳았다고 하셨어. 난 그저 내 추억 더미 속에서 발견한 도넛 크기가 작아서 그랬던 것뿐이었는데 말이야.



마마 셰프는 내게 다음번에는 도넛을 작게 만들자고 하셨지만, 난 당분간 도넛을 만들 생각이 없다네. 계절이 바뀔 때쯤엔 한 번 생각을 해보지.



도넛이 어떤 맛이었을지 자네 상상할 수 있겠나? 물론, 맛있었다네! 갑자기 찾아온 손님들에게 도넛을 선보였는데 말이야, 다들 아주 맛있다고 난리였어.


그날 저녁에 만나야 했던 서 기린에게도 도넛을 챙겨줬는데, '갓 튀긴 꽈배기와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는 맛'이라는 평가를 해주었지. 이 정도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나는 이만 저녁식사를 준비하러 가야겠네. 

또 편지할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친구!



Sincerely,

Ea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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