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조이가 태어난 지 17개월이 되었다. 몸이 조금 고단해도 아이의 방긋방긋 웃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피로를 풀던 시절은 지나갔다. 저 조그마한 몸뚱이에 분명하고도 뚜렷한 자아가 들어있음을 상기시키는 소리와 몸짓에 하루종일 맞서다 보면 내 몸과 마음은 쉬이 녹초가 되고 만다. 물론 아이의 방긋방긋 웃는 모습에 엔도르핀이 치솟기도 하지만, 그렇다 하여 몸의 피로가 풀리지는 않는다. 내 몸은 절대적으로 휴식을 원한다. 아이와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말이다.
아이와 하루종일 붙어있는 시간이 나날이 계속 쌓이다 보면, 별일 아닌 일로도 아이에게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날이 온다. 뒤돌아보면 정말 별일 아니었는데, 고단한 마음에 순간적으로 감정의 고삐를 놓치게 되는 일이 다반사가 되는 날들이 찾아왔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내가 어떠한 지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감지했다.
이웃집 육아 선배들의 말로는 이름만큼 무서운 18개월이 곧 도래하니, 지금 겪고 있는 시간들은 지극히 정상적이며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만큼의 일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 했다. 그래도 한 육아 선배가 "아이는 엄마 말을 듣지 않기 위해 태어난 거야."라고 말해준 덕분에 우리 아이가 아주 잘 크고 있다는 안도감(?)이 마음 깊은 곳에서 샘솟았다.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는 조이를 위해, 그리고 하루가 다르게 지쳐가는 나를 위해 이제 무슨 수라도 써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힘이 드는만큼 더욱 더 사랑스러워지는 우리딸
우리도 그렇지만 아이들도 성향과 기질이 정말 천차만별이다. 조이는 겁이 많은 만큼 조심성이 있고, 호기심이 많아 다양한 자극을 좋아하는 아이다. 집안 곳곳을 누비며 만져보고 싶은 것들을 만져보고 들어가 보고 싶은 곳들을 들어가 보지만, 연령제한으로 늘 엄마 아빠에게 제지를 당하기 일쑤이다. 그렇기에 조이가 집에서 가지고 놀 수 있는 놀잇감들이나 책들은 이미 지겨워졌고, 하루에 두 번씩 나가던 산책은 무더운 날씨로 인해 최대한 삼가고 있는 중이니 조이는 얼마나 따분하고 지겨울까. 적당한 때에 한 번씩 조이를 위한 소비를 하지만, 일상의 단조로움과 따분함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이기에 조이의 놀이터를 더디 꾸며주고 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은 문화센터에 가서 수업을 듣는다. 봄학기엔 오감발달 수업을 수강한 후 여름학기 수업으로는 체육수업을 선택했다. 두 번째 수업에서 조이가 시범 조교(?)가 되기도 하고,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활동들을 적극적으로 해나가는 모습을 보니, 우리 아이가 언제 이렇게 컸나 싶었다. 아이를 데리고 출발하는 길엔 '아, 너무 피곤하다...' 하다가도, 조이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수업 듣기를 잘했구나!' 싶다.
그런데 일주일에 평일이 5일인지라, 문화센터에 가지 않는 4일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한 달 전부터는 조이를 주 2회 정도 시간제 보육을 해주는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다. 조이는 2시간씩 어린이집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오는데, 첫날에 조이는 2시간 내내 엄마를 찾으며 울었다. 그다음엔 1시간 반, 그다음엔 1시간, 이렇게 우는 시간이 줄더니 이제는 들어가는 입구에서 잠깐 울고 반에 들어가 눈물을 그친다. 그리고 하원할 때면 "엄마-"하고 울상으로 나와 내 품에 안기고, 곧바로 아주 밝은 얼굴로 선생님과 웃으며 인사를 하고 나온다.
나는 엄마와의 분리를 경험하고 있는 이 작은 존재에게 심히 대견함을 느끼며, 어린이집에 가는 횟수를 2회에서 3회로, 시간도 2시간에서 3시간으로 차츰 늘렸다. 아이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생기면 생길수록 나는 숨을 고를 여유가 생겼고, 집이 아닌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는 조이는 '장소와 상황, 관계와 놀이의 변화'로 오는즐거움을 십분 누리는 듯했다.
우리는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서로가 더욱 반가웠고, 서로를 넉넉하게 받아줄 수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 엄마는 조이의 웬만한 투정에 끄떡없었고, 즐거움이 충족된 조이는 잠깐이라도 혼자 놀아주는 여유를 부리니 말이다. 결국 이렇게 되어보니 우리 사이에 안전거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조이와의 분리를 시작하며 내가 지금까지 후회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겐 이 아이를 온전히 충족시켜 줄 만한 능력과 조건이 없음을 깨닫고 인정하게 되었다. 아이에게 때론 엄마가 아닌 다른 무엇이, 다른 누군가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도.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알아야 할 것도, 해줘야 할 것도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이 때론 부담이 되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아이가 엄마와 떨어지는 경험을 하며 크는 것처럼, 엄마인 나도 내 아이와 떨어지는 경험을 하며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조금씩 더 단단해지는 마음으로 조이를 잘 키워보자고 다짐하며.
내가 네가 될 수 없고 네가 내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하며, 내가 오롯이 나일 수 있고 네가 오롯이 너일 수 있는 길을 찾으며 걸어간다. 그렇지만 우리가 언제나 함께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애써보겠다고 다짐도 해본다. 나의 작은 정원에 찾아와 준 소중한 존재야, 네가 너의 정원을 꾸려나가는 그날까지 엄마가 힘써볼게. 사랑한다, 내 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