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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많은얼룩말 Jun 24. 2024

작전 수정

부부의 세계, 협상 편


우리의 좀 더 나은 일상을 위해 '작전 변경'을 시행한 지 2주의 시간이 흘렀다. 남편은 작전 변경에 매우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요리사직에서 해임되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기 시작하자 깊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 말인즉슨 그가 요리하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 일방적 작전 변경에서 협상을 통한 작전 수정으로 노선을 변경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나의 첫 번째 슬기로운 선택은, "김치찌개만큼은 내가 끓이면 안 될까?"라고 조심스레 내게 질문을 던지는 남편에게 '김치찌개 끓이기의 권한을 당신에게 완전히 위임하겠다'라는 응답을 하는 것이었다.


피차 만족스러운 결론이었다. 내가 앞으로 해야 하는 수많은 요리 중 김치찌개만큼은 손을 대지 않아도 되며, 남편은 자신의 손으로 맛깔나게 만들어낸 김치찌개로 말미암아 그의 입과 마음이 매우 흡족할 테니 말이다. 이것이야 말로 부부간의 진정한 윈윈(win-win) 일 것이고.


하지만 이대로 우리의 협상을 끝낸다면 너무 아쉬울 터였다. 내가 두는 어떤 수(手)와 그에 대응한 남편의 수가 우리 일상의 흐름을 바꾸게 된다. 각도가 1도만 틀어져도 몇 날 며칠 후 도달할 지점은 아주 크게 달라지니, 신중을 기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난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마음에서부터 끓어 올린 진심을 얼굴의 미세한 근육 하나하나에 담아 대답을 했다.


"맞아, 김치찌개는 당신이 진짜 잘 끓이지. 나도 당신이 끓여준 김치찌개 먹는 게 훨씬 좋은 걸."


아무리 떠올려 보려고 해도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나의 대사는 이뿐이었다. 돼지고기와 새우젓이 만나는 환상적인 남편표 김치찌개 예찬론을 짧게 펼치고 난 후의 이야기들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의 대화는 각자 다른 이유로 인한 두근거림과 또 다른 해결책을 향하여 진전하고 있었다. 뿌옇게 흐려진 대화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하고야 말았다.


"그럼 평일 저녁은 당신이 준비하고, 주말엔 내가 원래 하던 대로 요리할게."


이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와 요리를 도피처로 삼아야 하는 여자의 대단히 만족스러운 협상 결과였다. 기쁨의 팡파르가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왔다. 어쩌면 남편의 마음속에서도 울렸을지 모르고.


그래서 남편은 이번 주말을 보내며 또 열심히 요리를 했더랬다. 그가 주말에 열심인 이유는, 주말 당번이기도 하지만, 그래야 우리가 평일에 먹을 수 있는 양식이 준비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녀야 하는 자신을 위해, 매끼 다른 음식을 먹고 싶은 자신을 위해.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육아하느라 애쓰는 아내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함이자 아내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기 위함이다.


남편의 손이 섬섬옥수임에도 불구하고 만들어내는 음식의 양을 보면 굉장히 손이 큰 편이다.


자신의 마음에 불을 지펴 요리하느라 쉬이 지칠 수 있으므로, 나는 그에게 계속해서 칭찬과 감사와 격려의 물을 공급할 것이다. 그의 마음의 정원도 중요하니까 말이다. 아마 남편의 마음의 정원에는 요리로 심어진 나무들이 꽤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이참에 남편을 '주말 요리요정'으로 임명해야겠다.




에필로그


글을 쓰고 있는 내 뒤에서 한참 맨몸운동을 하던 남편이 운동이 끝났는지 바닥에 드러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귓가에 요리 유튜브 영상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이 종원이 형(백종원), 뚝딱이형(요리 유튜버), 수영이 형(편스토랑 류수영)에게 굉장한 내적친밀감을 느끼는 이유는, 그의 1년 6개월 이상의 요리 인생이 그들의 레시피로 다져졌기 때문이다. 남편의 요리를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생각보다 자주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이번 협상에서 얻은 가장 큰 이점이 아닐까.


"그런데 당신, 나한테 "김치찌개는 내가 끓이면 안 될까?"라고 말했을 때, 그때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꺼낸 거야?"


나는 그의 속내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남편은 나의 질문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웃으며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사실 내 마음은..., '내가 끓인 김치찌개가 당신이 끓인 것보다 훨씬 맛있어'였어. 그땐 차마 말할 수 없었지만 말이야."



그의 멋쩍은 웃음에 나도 웃음으로 응수했다. 그리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렇다면 김치찌개는 당신이 평생 끓이도록 해. 평. 생.'



▼ 6화 <작전 변경>이 궁금하시다면 ▼

https://brunch.co.kr/@thinking-zebra/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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