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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많은얼룩말 Jul 08. 2024

엄마의 언어 사전

내가 이럴 줄은 몰랐지.


무언가를 자꾸만 깜빡깜빡 잊어버리는 엄마를 놀리던 내가 기억이 난다. 나의 좋은 기억력이 엄마에게서 온 건 아닐 거라며,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이야기하면서도 한편으론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말했다. 엄마는 왜 자꾸 깜빡 잊어버리느냐고, 메모를 해두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엄마는 억울하다는 뉘앙스로 내게, "너도 엄마 나이 되어봐라."라고 대꾸할 뿐이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출산을 코 앞에 둔 때가 되자 나는 나의 기억력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과연 엄마에게 일어났던 일이 나에게도 일어날까?'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었다. 영어 단어 암기는 늘 자신이 있었고, 내가 겪었던 일들은 세세하게 기억하는 편이었다. 좋았던 일을 추억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능력이었지만, 때론 잊어버리고 싶은 일들을 내가 원하지 않은 때에 소환시키는 나의 기억력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웬만한 일들은 장기기억으로 넘기지 않고 날려버리는 나의 마지막 남자친구는 이러한 나의 기억력으로 인해 위기의 순간(?)들을 맞닥뜨리기도 했지만, 현재 나와 함께 잘 살고 있는 중이다. 남편이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을 내가 잘 막아주어 남편이 늘 고마워하지만, 오히려 가끔은 지나간 일들이 그냥 지나가도록 두는 남편이 부럽기도 하다.


어찌 되었든, 엄마를 놀리던 그 당시엔 정말 알 수 없는 영역의 일이었다. 기억력과 출산, 그리고 육아가 동일 선상에 올라가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내가 출산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엄마에게 일어난 일이 나에게도 그대로 일어날 줄이야.




메모가 습관화되어 있는 나에겐 다이어리가 필수품이다. 거창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월 단위의 목표를 세우고, 주간 단위로 계획을 세워 날마다 기록한다. 나의 다이어리에는 우선순위를 두고 해야 하는 일들, 기억해야 하는 일들이 늘 적혀있다.


나는 출산 직전까진 열심히 다이어리를 작성하던 임신부였다. 하지만 아이를 갓 낳은 산모가 되자마자 나의 삶은 180도 달라지고 말았다. 2시간 단위로 수유를 해야 하는 통에 펜을 잡고 다이어리에 글자를 적어 넣을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닥치는 대로 살아내야만 했던 시간들이었다.


해야 할 일들은 어찌나 많고 알아야 할 정보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소용돌이치는 일상 속에서 하루 24시간이 벅차게 느껴졌더랬다. 아이가 태어난 지 100일 정도 지나자 나는 다시 다이어리를 펼쳤다. 이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나 스스로를 잃지 않기 위해,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내가 엄마가 되기 위해서 기록을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기록을 하면서도 난 서서히 무언가를 잊어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의 아기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의 대화 속에서 서서히 드러났다.


"아, 잠시만..., 그 단어가 생각이 안 나네."

"아..., 뭐였더라? 그 말이 왜 생각이 안 나지?"

"그거 있잖아, 그거. 하, 어떻게 이 단어가 생각이 안 날 수 있는 거야?"


분명 이 대목에서 등장해야 할 단어인데, 말문이 턱 막혀 입에서 공기만 나올 뿐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머릿속을 헤집고 헤집어봐도 내가 찾는 그 단어는 뿌연 안갯속에 갇혀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때론 좀 전에 하려고 했던 일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 일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다니. 당황스러웠지만 원인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원인은 4가지 정도로 추려볼 수 있었다.


원인 1, 하루종일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한다. 

원인 2, 아이의 수준에 맞춰 말을 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어휘의 수준이 매우 낮아진다.

원인 3, 하루동안 사용하는 어휘의 수가 대폭 감소한다.

원인 4,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 동분서주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결국 나의 머릿속에 생겨버린 구멍들을 발견해 가며 나는 나의 기억력에 대한 자만을 뉘우쳤다. 그리고 어느 날, 손녀를 보러 온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내가 어렸을 적에, 엄마가 자꾸 깜빡깜빡한다고 놀렸던 거, 사과할게.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겠더라고."

"그래, 이제야 알겠지? 엄마가 너희 둘 키우느라 그렇게 되었던 거야."




나의 이러한 증상을 남편에게 설명하며 위로를 구하던 날이 있었다. 남편은 내게 선배와 이전에 나눴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분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신데, 어느 날 대화 도중 단어가 생각이 안 나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스스로 위기감을 느꼈고, 문제 해결을 위한 방책으로 책 읽기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도 손에서 책을 놓치지 않고 있노라고, 덕분에 자신의 어휘력이 많이 회복되었다고 하는 경험담을 들으니, 그날 난 퍽 위로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의 건망을 극복하겠다는 열의로 충만해졌다.


그 이야기를 들은 지 어느덧 1년이 훌쩍 지났다. 1년간 나는 종이책을 펼쳐 볼만한 시간적, 체력적 여유가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언젠간 나를 위한 독서를 하리라, 하며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기도 하고 시도도 종종 해왔다. 그러던 중 아이가 15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다.


내 안에 어떤 갈망이 일어 브런치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글을 쓰다 보니 단어가 그다음에 와야 할 단어를 불러냈다. 내 안에 잊혔던 단어들이 안부인사를 건넬 때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리고 글을 쓰기 위해선 글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여러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을 틈틈이 읽기 시작했다. 타인의 글 속에선 내가 평소에 쓰지 않거나 놓치고 있던 좋은 어휘들이 이따금 발견되곤 했는데, 나는 그것들이 휘발되지 않도록 마음에 심었다.


그렇게 두 달이 흘렀다.

글을 쓰고 글을 읽는 이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나의 뇌 회로에 단어들이 새로이 입력되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기뻤다. 나의 언어 사전도 이제는 개정판이 될 수 있겠다, 싶어서 말이다.


생후 17개월 23일, 조이의 언어 사전에는 오늘도 새로운 단어가 등록되고 있다. 출산 후 17개월 23일, 나의 언어 사전에 그동안 데면데면했던 단어들이 계속해서 되돌아오고 있다.

 



먼 훗날 나의 사랑스러운 아이가 내 나이가 될 때쯤엔 자신의 언어 사전에 문제가 생겼다며 내게 위로를 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나는 세상 풍파를 겪다 낡아진 나의 언어 사전을 내보이며, 딸아이에게 위로를 전할 수 있겠지.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나의 언어 사전이 더 낡고 헤어져 남아 있는 낱말과 문장이 몇 안될 즈음이 된다면, 그래도 이 말은 꼭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조이야, 엄마는 너를 사랑해."


우리 엄마의 언어 사전에도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꼭 남아있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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