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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많은얼룩말 Jul 15. 2024

너에게 이런 엄마로 기억되고 싶어

나도 아직 완성형은 아니지만.


우리 가족은 사천시에 있는 공군 제3훈련비행단 부대 내 관사에 살고 있다. 남편은 우리가 영내에 살고 있기 때문에 부대 출입이 조금 불편한 점에 대해 내게 늘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다(*출입을 위한 패스를 늘 들고 다녀야 한다). 하지만 내 입장은 남편과 조금 다르다고 말했다.


"우리가 영내에 살기 때문에 밤에도 마음 편히 산책할 수 있지, 교회와 BX(군마트)를 걸어서 갈 수 있지, 집 앞에 부대 어린이집이 있지.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라고 하면..., 조용하다는 거야. 부대 정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순간 차분해지는 이 분위기가 난 좋아.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가 성남 부대에 있었을 때도 마찬가지였고."


남편은 나의 이러한 긍정적인 마인드가 좋다고 말했다. 난 좋은 것을 좋다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군인 남편과 살기에 내가 이렇게 적합하다니, 감사할 따름이었고.


사천에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남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 때문에 머나먼 사천까지 내려와 살게 해서 미안해."


그의 말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니까 내가 사천까지 따라온 거라고. 막상 와서 살아보니까, 너무 좋잖아! 아이 키우기 딱 좋은 곳인 것 같아. 우리가 언제 이렇게 바다 가까이에서 살아보겠어?"




어제 오후, 남편은 자신에게 40분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육개장을 끓이는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마음껏 즐거이 육개장을 끓이라고 한 후 나는 조이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저녁을 먹인 후 놀아주다 문득 조이의 낮잠이불 끝자락이 뜯어져 있던 것이 생각이 났다. 어린이집에 챙겨서 보내야 하기에 바느질을 미룰 수 없었다.


오랜만에 반짇고리에서 적당한 두께의 바늘과 실을 꺼냈다. 중학교에서 기술가정 과목을 배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라며, 뜯어진 부분을 꼼꼼히 꿰매기 시작했다. 내 뒤를 졸졸 따라온 조이에게 "조이야, 엄마가 지금 조이 낮잠 이불 뜯어진 꿰매야 하거든. 조금 기다려줄래?"라고 말했다. 조이가 알아들었는지 내 주위를 맴돌며 혼자서도 잘 놀았다. 바느질을 하면서도 조이를 한 번씩 쳐다봐주고 말도 걸어주다가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소파 위에 앉아 조이를 불렀다. 조이도 곧장 엄마를 따라 소파 위에 앉았다. 엄마가 중요한 일(?)을 한다는 걸 아는 듯 생떼 부리지 않고 잘 있어주는 조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조이야, 엄마 옆에 있어줘서 너무 고마워."


나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혼자 잘 놀고 있음에 대한 고마움이 아니었다. 조이가 내 옆에 있어줘서 고마웠다. 조이가 방긋 웃었다. 그 웃음에 내 마음은 녹아내렸고.


엄마의 바느질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조이의 저녁시간은 즐거웠던 것 같다. 얼마 지나지 않아 취침을 위해 방에 들어간 조이가 칭얼거림 없이 금세 잠이 든 걸 보니 말이다.


육퇴를 한 후 남편과 늦은 저녁을 먹었다. 남편은 멋쩍은 표정으로 이번에 육개장을 얼마나 많이 끓여버렸는지(?)를 고백했다. 사천 큰 손이 어디 가겠느냐며, 나는 오히려 양이 많아서 좋다고 했다.


이젠 적게 만들면 서운할 것 같아, 여보.


저녁식사 후 육개장을 여러 용기에 소분을 하면서 보니 양이 정말 많았다. 요리 한번 했다 하면 왕창 만들어내는 우리 집 주말 요리요정이 이번 육개장에 대한 아내의 리뷰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신중히 입을 열었다.


"혹시..., 구역모임 장소가 우리 집으로 예정되어 있었나?"

"그러게, 여럿이서 먹을 양이긴 하다. 그렇지? 내일 다 모이라고 전화 돌려볼까."

"여보, 이 정도면 옛날 우리 엄마가 집에서 구역예배 드린다고 하루 전날 준비하던 음식 양이야."


우리는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남편이 집게로 건더기를 먼저 용기에 소분하면 내가 그 뒤를 이어 국물을 부었다.


"거의 12, 13인분 정도 되는 것 같아." 매끼 다른 음식을 먹고 싶어 자주 요리하는 것을 선호하는 남편인지라, 한 가지 음식을 너무 많이 만들어버리고 난 후엔 꼭 민망해한다.


"그럴 것 같아. 그래도 난 좋아. 한 달 내내 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번 육개장에 들어간 재료가 많아서 너무 좋아." 맛있는 건 매일 먹어도 쉽게 질리지 않는 아내인지라, 남편이 대용량으로 끓인 육개장을 어떻게 냉장 냉동보관 할 것인지 머리 굴리기에 바쁘다.


"그렇게 얘기해 주니 좋다. 당신이 배추도 넣으라고 해서 넣었잖아."

"그러니까, 너무 맛있더라. 내일 점심에 국밥으로 또 먹어야겠어."




그렇게 육개장 소분을 마친 후, 글을 써보겠다고 책상 앞에 앉았다가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아 노트북을 닫아버렸다. 그리곤 남편과 함께 안방에 들어가 빨래를 개기 시작했다.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는 아내를 위해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 답답하니까, 내일 글도 쓰고 환기라도 시킬 겸 카페라도 다녀올래?"

"아니, 괜찮아. 난 집이 답답하지 않은 걸. 그래도 우리가 집을 나름 잘 꾸며놓고 쾌적하게 해 놓고 사니까, 난 집에 있는 것도 좋아."


내 말이 끝나자마자 남편은 "당신은 정말 긍정왕이야."라고 말했다.


"긍정왕? 내가 긍정왕이라고?" 남편의 말이 뜬금없다는 듯 되물었다.


"당신은 부대 안에 사는 것도, 관사에 사는 것도, 머나먼 사천까지 내려와 사는 것도, 내가 육개장을 13인분을 끓여도 괜찮다고, 좋다고 말하잖아. 그러니까 긍정왕이지."


"내가 그랬어? 그랬구나. 그렇다면 정말 감사하다."


"나는 우리가 쓰고 있는 유모차나 물려받은 헌 아기띠만 보면 속상하기도 하고 괜히 위축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당신은 오히려 "유모차는 보험사 선물로 받고, 아기띠는 물려받았느니 감사하다."라고 말했지. 거기에다 예쁜 하늘만 봐도, 예쁜 나무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며 사진을 찍어서 꼭 나에게 보여주잖아. 당신은 작은 것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야."



보통의 일상 속에선 나 자신에게 말하는 시간보다 타인에게 말하는 시간이 더 많기에, 나의 말을 받는 상대의 표정이나 대답을 통해 나의 언어의 색을 유추해 볼 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제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내가 근래에 어떤 빛깔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오늘의 내가 어떤 사람인지, 결국 나의 말과 일상의 모습이 증명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고 말이다.


흘러간 시간들을 되돌아봤다. 감정형(F) 여자가 사고형(T) 남자를 만나 부딪히다가도 서로를 끌어안으며 걸어온 시간들. 아이를 낳고 기르며 내가 부서지고 다시 빚어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고 있는 시간들. 그 가운데 내가 서 있다. 어떤 날은 내가 너무 못났고, 또 어떤 날은 내가 대견했다. 어느 날은 내가 안쓰러웠고, 또 어느 날은 내가 근사했다. 그렇게 나는 오늘의 내가 되었다.


앞으로 살면서 분명히 긍정적이지 않은 사고로 나를 못살게 굴거나 어두운 그림자를 흘리고 다니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 이 글을 쓰며 늘 건강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보자고 스스로에게 격려를 보내본다. 아직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딸아이에게 내가 어떤 모습으로 비치고 있을까 궁금해하며. 아직 엄마도 완성형은 아니지만, 언제나 너에게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기록하면서.




"조이야, 네 눈에 비치는 엄마의 모습이 어떤 모습일까? 엄마는 '이런 엄마가 될 거야.' 보단 엄마 스스로가 옳다고 여기는 가치와 신념을 잃지 않은 채, 사랑과 따스함으로 충만한 '나'이고 싶단다."


-점점 더 엄마 아빠의 행동을 모방하려는, 내일이 생후 18개월이 되는 너에게,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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