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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여행하는 계절.

by 순록

그런 날이 있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데도 이를테면 날씨의 영향인지 호르몬의 영향인지도 모르겠지만,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을 때가 있다. 아무런 영향도 없는 사람이 건네는 말에도 마음에 칼이 꽂히는 그런 날이다. 이런 날이 되면 나는 굉장히 우유부단해진다.


옷을 골라 입을 때도 고민이 시작된다. 제일 무난한 검은 옷을 골랐다가도 내 기분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다시 내려놓고 밝은 옷을 고르면 괜스레 민망해지기도 한다. 출근길에 늘 듣는 플레이 리스트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몇 번이고 음악을 넘겨대기도 한다. 평소에는 쉬웠던 결정이 바보가 된 것처럼 어려워진다. 누군가 나의 모든 결정을 대신해줬으면 하는 생각마저 든다.


마음에 주인이 있다면 정신을 차리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주인도 자리를 비운 지 오래다. 텅 비어버린 마음 한가운데 앉아서 하염없이 네가 돌아오길 기다린다.



누군가 내게 "오늘 기분이 어때"라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워진다. 좋은 것도 아닌데 싫은 것도 아니고 기쁘지도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은 복잡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듯이 그저 저절로 일어난 일은 없을터.


이런 기분이 들 때면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왜 그리 과거를 추억하며 현재를 살지 못하는지 지나가는 바람을 왜 태풍처럼 느끼는지, 스쳐가는 눈빛에도 마음이 베이고 스스로를 찔러대는지 묻는다. 그러나 무언의 대답만이 돌아온다.


허락도 없이 떠나버린 마음에게 괜스레 서운한 생각마저 든다. 가버린 마음이 미워 부지런히 육체를 움직여보지만 날이 저물도록 소식이 없다. 적막한 마음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너도 오죽이나 답답했을까.


이왕 가버린 너를 원망하기보다는 그저 긴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본다. 텅 비어버린 내게, 좋은 것들을 가득 담아 다시 돌아오기를. 그렇게 계절을 지내본다.


마음이 여행하는 계절, 이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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