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4.5-4.7
기대보다 허무하게 저물어가는 1년을 기록으로 되감아보자 결심한 건 지난 10월이었다. 2024년 10월에서 2023년 10월까지. 이제 그 중반에 이르렀다. 역순으로 1년을 되돌아보는 이 글들은 여행기라기보단,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의 ’ 게으름 탈출기’에 가깝다.
[ 멋지게 먹는 법을 아는 곳 ]
금요일 퇴근 후 용산역. 울산에서 오는 그와 서울에서 가는 내가 만나기로 한 곳이었다. 맥주 한 캔과 멕시칸 타코를 챙겨 KTX로 달려간 곳은 그의 20대가 있는 강릉이었다. 밤 중의 어둠에도 가려지지 않는 벚꽃길을 지나 호텔에 도착했다. 다음날은 허영만 님의 식객에 등장한 초당 순두부에서 청국장을 고를지, 낙지 한 마리가 통으로 들어가는 전골을 택할지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생선구이와 각종 반찬들이 함께하는 순두부 전골 정식을 가볍게 비우고, 바로 옆의 순두부 젤라토까지 코스를 마쳤다.
해변가를 드라이브하다 들린 곳은 보헤미안 커피였다. 카페라기엔 하나의 집에 가까웠던 그곳엔 이런 묵직함이 있었다.
"커피 한 잔은 150ml입니다. 그 작은 잔에 담는 것은 커피만은 아닙니다. 나의 사랑입니다.
어느새 30여 년이 지났습니다. 보헤미안은 오래도록 가까이에 있겠습니다."
'바리스타'라는 정체성조차 낯설었을 그 시절, 박이추 님은 어떻게 그 길을 택할 수 있었을까. 무언가의 첫 세대가 된다는 것은 분명 열정을 넘어서는 용기를 요구한다. 그런 선택은 지금의 시대에도, 그 이후에도 계속될 수 있을까. 한 잔의 커피보다 진하고 깊은 사랑의 글들을 음미하는 시간이었다. 커피의 도시, 강릉을 실감하며 다음 가을엔 커피 축제를 들려보고 싶었다.
짧은 여행의 대미를 장식한 곳은 기대가 컸던 버드나무 브루어리였다. 맥주라는 주종을 즐기다 보니, 지역을 대표하는 브루어리를 방문하는 것이 여행의 큰 기쁨이 되기도 했다. 수십 종의 맥주를 태그 하며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울산의 트레비어가 '축제'같은 느낌이라면, 이곳은 세련된 그러나 개성이 강한 '힙플레이스'의 느낌이었다. 인더스트리얼 감각의 공간과 풍미 넘치는 피자, 센스 있는 맥주 샘플러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시선을 끈 것은 메뉴판이었다. 편협하게도 직장인이 많은 도심에서나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던 '책맥'의 제안이 있었다. 지역 서점들의 추천 도서들을 소개하고, 책을 구매하면 맥주 한 잔을 주는 프로모션이 있었다. 또한 맥주 하나하나의 작명이 빛났다. '즈므 블랑'은 '저무는 마을'을 뜻하는 강릉의 토속어에서, '하슬라'는 '큰 바다'라는 강릉의 옛 이름에서 찾은 신비로운 소리였다. 더욱 놀란 것은 '우리 동네 히어로'라는 코너로, 1년에 한 번, 지역 사회를 위해 애쓴 분을 선정하여 그분을 위한 헌정 맥주를 만들고 수익금은 그분이 선정한 곳에 기부하는 시스템이었다. 로컬리티라는 어느새 진부해져 버린 단어가 이토록 생생하고 따뜻하게 실현된 사례는 손에 꼽힐 것 같았다.
두 번이나 찾은 강릉 중앙시장도 맛집으로 기억될 것 같다. 70년 전통의 광덕식당에서 '소순이'라는 생소한 메뉴를 배웠다. 콜라겐이 가득한 '소'머리 고기에 '순두부'가 함께 어우러진 국밥이었다. 머리고기 수육도 조금 낯선 촉감과 향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다른 곳에서 맛보지 못한 진귀한 체험이었다. 기다랗게 줄이 선 곳은 '배니 닭강정'이었다. '배니'도 어떤 서양의 이름일까 생각했는데 '양념이 속살까지 잘 스며들었다'는 의미라고 한다. 강릉 기념품으로 한 박스씩 사들고 왔는데 서울에서 먹으니 더 그립게 맛있었다. 그의 학생 시절 추억이 있는 할머니가 직접 해주시는 감자전까지 야무지게 한 판을 나눠먹고서야 우리는 강릉을 떠났다.
[ 경포호의 벚꽃 ]
벚꽃의 절정을 보기엔 조금 이른 계절이었다. 하지만 처마가 달린 2인 바이크를 타고 경포호를 돌며 감상하기엔 부족하지 않았다. 바이크로 달리니 더 잘 보이는 것은 꽃송이보다 꽃을 보고 덩달아 환해지는 사람들의 표정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중에 보이는 편안함이었다. 이틑 날, 경포 해변에서 바라본 일출은 장관이었다. 하늘과 구름과 그 속을 가르는 해와 그 모두를 오롯이 비춰내는 바다, 일렁이는 감정을 자아내는 파도와 물결들. 이런 풍경은 언제나 내게 데자뷔처럼 넥스트의 The ocean 속 파도 소리와, 슬픔을 삭히려 몇 번이나 해가 지는 모습을 반복해서 바라봤다는 어린 왕자의 한 대목을 떠올리게 했다. 처음 가 본 하조대도 얼핏 북한산의 바위들을 떠올리게 하는 암석들과 군청색 바다가 어우러져 고독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그가 다녔던 학교와 살았던 동네 주변들을 돌아보고, 롯데칠성 강릉공장 앞의 대관령 약수터를 들렸다. '처음처럼, 새로' 사인을 단 약수터의 물 맛에 왠지 알코올이 느껴졌던 건 왜일까. 멋과 낭만이 넘치는 강릉의 봄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