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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 클레어 Oct 09. 2021

내 세계의 조용한 평등을 사랑해

‘유미의 세포들’ 늦은 입문기  


누굴까, 잠든 나를 깨운 세포는  


 문득 현타가 오는 순간이 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화장실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던 페이드인의 끝, 깨달음의 찰나. 어젯밤 그토록 확신에 차던 나는 누구였는지, 그 바보 같은 아이디어의 주인은 누구였는지 오늘 아침의 나는 방방곡곡 수소문하며 문책을 시작한다. 내 세계의 공평함은 여기에 있다. 못 말릴 상상의 나래를 펴고 가본 적도 없는 미지의 곳까지 활주 하던, 때론 폭주하던 밤의 나를 이제 막 눈을 뜬 아침의 나는 번개처럼 놀라운 축지법으로 현실에 데려다 놓는다. 아무리 INFP라도 감성 폭발 지수가 한계를 초과한 게 아닌가 싶을 무렵, 좀처럼 기력을 못 쓰던 이성이 눈을 뜨는 것이다. 한때, 어느 한쪽도 화끈하게 힘을 발휘하지 못해 참으로 어중간한 '나'라는 자조적 감정에 휘둘리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공평히 하루의 반을 각자의 인력으로 끌어당기는 감성과 이성의 조화, 균형감각이 이뤄온 나의 평등한 세계를 이제 사랑하기로 했다.


 이런 흔한 감각의 생경한 서술을 시도하는 건 모두 유미 때문이다. 그 전설적 웹툰을 알지도 못한 채 유튜브로 지금 방영 중인 드라마의 파편들을 만났다. 굴지의 성우들께서 참여해주신 국내 최초 애니메이션과 실사 드라마의 환상적 만남으로 찬사가 쏟아지고 있는 바로 그, 유미의 세포들. 이걸 왜 이제 알았을까 싶은 한탄과 지금에라도 이 세계에 입장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가 한데 섞인다. 불안, 응큼, 출출, 본심, 사랑. 이런 사소하고 거대한 느낌과 감정들이 하나의 이름으로, 각각의 세포로 명명되는 관점의 놀라움은 그러나 내가 역시 사랑했던 ‘인사이드 아웃’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어쩌면 동서양의 차이랄까. 이따금 제멋대로 라일리의 세계를 뒤흔들던 슬픔이와 버럭이, 까칠이와 소심이의 위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기쁨이를 보며 리더의 파워보다 고난과 무게를 보았다. 감정들을 이끄는 리더는 있을지라도 그들에겐 어떤 우위나 능력의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음으로써 존재하는 평등이 있었다.

 



감정과 세포의 세계관 차이 ①  서열은 있지만 다 불러 줄게  


 미국판 라일리의 세계와 달리 한국판 유미의 세계에는 프라임 세포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우리 각자를 대표하는, 그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가장 공사다망한 세포로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에겐 야망, 성공, 아니면 그 무언가 일 그것은 유미에겐 사랑이다. 사랑은 유미의 세계에서 가장 큰 세포인 출출이를 비롯, 앞을 가로막는 그 어떤 세포에도 징벌을 서슴지 않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녔다. 그로 인해 다른 세포들을 사랑을 경외하고 존중한다. 한편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는 응큼의 과거는 풍기문란 죄로 벌 받으러 가다가 우연히 정식세포로 승격한 견습세포다. 그렇다. 이 세포들의 세계엔 권력과 능력의 차이, 서열과 계급이 존재한다.


엄연한 세계의 질서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세포들을 명명하는 방식에 고도의 규율이나 엄격함을 내려놓은 느슨함이 마음에 든다. 이를 테면 패션이, 명탐정, 상처기록, 은근히 신경 쓰이는 세포 등이다. 콕 집어 이건 뭐야 라고 설명하기 힘든 우리 안의 다양함을 너무 고민하지 않고 아무렴 어때라는 당당함으로 하나씩 불러내어 존재하게 하는 작가의 시선이 사랑스럽다.




감정과 세포의 세계관 차이 ②  역사로 기억되는 마을


 일상의 작은 순간들을 붙드는 섬세함이 빚어낸 유미의 내면 마을은 그래서 늘 북적인다. 과연 총 세포조사가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늘 새롭고 재기 발랄한 세포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아직 입문자의 경지에서 바라본 그곳은 홍수가 나고 설탕 눈이 내리는 극적인 날씨의 변화는 있지만 마을 모습 자체의 변화는 드물어 보인다. 유미  상태를 살피는 세포들의 100분 토론이 펼쳐지던 소박한 광장, 각자의 쉴 곳이 되어주던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정겹고 전형적인 마을 그 자체였다. 개구리로 변장한 웅이 사랑세포의 유미 사랑세포 구출 신에 등장한 작은 섬과 바다, 본심이가 갇히고 사랑이가 투병하며 패션이가 수감되던 지하세계로의 공간 전환도 있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한번 생성된 유미 마을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유미와 함께 역사를 간직한 그 무대 위에서 날마다 새로운 세포들은 어김없이 바쁘게 그녀만을 위해 살아간다.


반면 '인사이드 아웃'의 라일리 세계는 소중함의 섬들이 생성되고 성장하고 붕괴하고 소멸한다. 어떤 소중한 것들이 섬이 되어 내 안에 자라난다는 컨셉과 엉뚱 섬, 우정 섬, 하키 섬, 정직 섬, 가족 섬 같은 작명에 꽤 오래 심장을 부여잡았었다. 살아있는 한 무한 반복되는 감정들의 충돌과 사건들의 연속에서 이 섬들은 존망의 스펙터클에 놓인다.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이들을 지켜내며 심지어 탄생시켰던 근원은 핵심 기억. 그것을 상기시킴으로써 섬을 되살리고 복원할 수 있다는, 결국 한번 생겨난 것을 끝내 간직하는 소중함에 대한 이야기를 픽사도 하고 있었다. 생긴 모습과 작동 원리는 다르지만 내 안에 생겨난 그 세계의 존재를 인식하고 아끼는 마음, 그것에 감동을 받는다.  




잊지 않음의 힘  


 지금 이 순간 느닷없이 감정과 세포의 세계 앓이를 덕밍아웃하게 하는 나의 프라임 세포가 궁금해진다. 그 무엇도 중요치 않던 강력한 사랑의 순간,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못 말릴 정성을 쏟아붓던 집착의 시간,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던 미련의 흑역사. 그 모든 것이 나였다. 그래도 바라기로는 유미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과 작가의 세포가 쌍벽을 이뤄주길. 자꾸만 잊어버리는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에 대한 환기를, 그들을 생각해보게 하는 여유를 선물한 원작과 드라마와 작가와 배우들과 성우들 모두의 진심과 정성이 고맙다. 자꾸만 등장하는 또 다른 세포들의 주인은, 그들이 끝내 응원하는 존재는 단 한 사람,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 명이거든

이라고 외쳐주는 확신에 찬 세포들의 발랄함에 뭉클해진다. 온종일 너만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응원하는 우리가 있으니 넌 이미 그 자체로 특별해! 라는 신선한 긍정에 감사하다. 이제 차분한 마음으로 내가 놓친 지난 5년의 여정을 떠날 시간이다. 오늘도 우리 존재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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