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ㅣ 세스 노터봄ㅣ 민음사
여기 세 남자가 있다. 그들은 도피 중이고 도피했고 도피했었다. 저마다의 피난처도, 매개체도, 방식도 모두 달랐지만 그들을 도망치게 한 존재는 같았다. 그의 이름은 바로 '의식'.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사유의 근원과 배경은 아직 책장에 잠들어 있지만, 이 문장을 만난 어느 날의 두근거림은 아직도 기억된다. 있는지도 몰랐으면서 마치 오래 그리워했던 것처럼. '10명이 있으면 10개의 생각'이 있어야만 한다고, 이따금 자신만의 생각을 꺼내지 못하는 이들을 수줍게 경멸하며 결국 또 하나의 우물을 파던 치기 어린 시절이 있었다. '의식'하는 나를 점점 더 의식하며 보이지 않는 계단을 내려갔다. '넌 참 깊다'는 말이 '이제 그만'이었을 수 있겠다고 뒤늦게 의식된다.
1부에서 '아니 이 사람' 싶던 인니는 2부에서 아르놀트 타츠를 만나 '귀여웠던가' 싶더니 3부에서는 필립 타츠를 연민하며 제법 정상에 가까워 보인다. 그래서일까,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건 2부였다. 약 4페이지에 걸쳐 페트라에 반응하는 인니의 '그렇다'가 연쇄적으로 반복되는 AI적 교리문답에 이상한 희열을 느꼈다 (p.108-110). 아르놀트 타츠의 어퍼컷이 수놓은 신부와의 카니발 같은 만찬은 영화였어야 했다고 생각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심각한데 우스꽝스러운 생의 한가운데서 인니와 두 타츠는 진지하게 깨어 있었고 삶의 잔인함을 목격했다. 인니의 부친과 그로 인한 경제적 양육의 부재는 '상대적' 결핍과 차별을, 아르놀트의 전쟁과 그 후는 환멸과 공허함을, 필립의 이방인적 고독과 역시 부친 부재가 낳은 상황은 인니의 것을 닮았거나 한층 악화되었을 것이다. 절실히 깨어 있음으로써 명징하게 인식된 세계의 무례함으로부터 그들은 '살아있기' 위해 방황이란 여행을 떠난다. 性, 山, 空. 그 무렵 네덜란드에서 만나는 오리엔탈적 판타지 었을지 몰라도 그것은 분명 생존을 위한 처절한, 정직한 몸부림이었다. 그저 공상만 하는 Human being이 아닌 삶으로 몸소 증명하는 Human doing. 그들을 경멸할 순 없었다, 아니 그럴 자격이 없다.
과연 오늘의 우리는 용기 있게 스스로를 의식하며 자기 분량의 삶을 직시하고 있을까. 돈과 술과 게임과 하다못해 바쁨 속으로 도망 중이거나 도망을 계획하지 않은 이가 얼마나 있을까. 아직 절망을 배우기 전의 어린아이라면 가능할까. 현실의 무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담대함과 초연함을 실천할 수 있다면 그들이 바로 기인이다. 도망가지 않고 온전히 살아내는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문득 인니 곁에서 수다스러웠던 필립 타츠가 생각난다. 그래도 인니라면 조금은 들어줄 거란, 이해해줄 거란 믿음. 인니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인간은 혼자일 수 없다는 걸. '알아주는 것', 그것은 크고 위대한 용기다. 도망가지 않고 세상에 버틸 힘을 주는 것이다. 이제 '나는 너를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좀 더 두근거리는 내가 되길, 의식 그 자체에 탐닉하지 않고 나의 우물 너머를 바라볼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