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세」ㅣ 잉게보르크 바하만 ㅣ 문예출판사
형광펜을 들고 헤쳐나가던, 묵직한 아포리즘이 우거진 이야기 숲을 빠져나오니 웬일인지 음악이 고팠다. 'I wanna be'란 가사를 반복하며 영화 '릴리슈슈의 모든 것'을 흐르던 'Glide'에 한참 물들었다. 나치와 전쟁이 뒤흔든 10대를 거쳐, 법과 실존을 탐구했던 학자이자 시인, 작가였던 여인은 화재의 후유증으로 40여 년의 생을 마감했다. 인종과 국가가 곧 정체성이었던, 개인 없는 시대의 개인으로 생존하기 위한 노래를 멈출 수 없었던 여인. 그 자신도 몸소 살아냈던 '삼십세'의 시절 속에서 작가는 4명의 남성과, 2명의 여성과, 1명의 무성적 존재의 목소리가 된다. 전반 4편의 목소리는 이름이 없었고, 후반 3편은 샤를로테, 빌더무트, 가다라는 이름을 가졌다. 성별과 이름의 유무, 일상의 구체적인 풍경은 달랐지만 모두가 어느 교차점을 향해 걸어가던 7인의 뒷모습을 기억해 본다.
10대에서 20대로의 진입은 강요된 의무와 억압을 벗어던지는, 해방의 흥분 속에 맘껏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30대로의 걸음은 자유를 위한 절제와 책임의 무게를 어렴풋이 배웠기에 마냥 가볍지 못했다. 죽음의 문턱과 목격, 고향과의 이별, 숨겨진 욕망의 발현, 자신이 돼버린 직업과 진실에의 의심, 물속으로의 침잠에 이르기까지. 격정의 2막을 끝낸 목소리들은 무대의 커튼 뒤에서 숨을 고르며,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선택의 순간에 이르렀음을 자각한다. '삼십세'로 명명된 생의 변곡점에서 지금의 무대를 버티고 최후의 커튼콜을 기다릴 것인지, 이제라도 진정 서고 싶은 무대를 찾아 떠날 것인지를 말이다. 무엇을 택하든 아직 충분한 삶, 그 시간의 의미는 또 다른 자유일까 도피일까. 타인의 무대를 떠나 나의 무대로 향하는 나이. 그것이 서른이라면 그토록 조급해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기를 과거의 나에게 당부하고 싶다.
생활인에서 관념인이 되는 순간, 어둠 속에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향한 하행의 감각에 가까워지곤 한다. 첫 단편의 목소리는 말한다. '생각에 잠기고 또 생각에 잠겼을 때, 그네를 탄 것처럼 높이 천장을 향해 날고 있는 느낌, 행복감에 사로잡혔다'라고. 하행 속의 나는 문득 외롭고 괴로웠는데, 상행 속의 그는 자유롭고 행복했다니 부러웠다. 그러나 이윽고 이토록 관념적인, 고민과 상념에 사로잡힌, 효율과 생산성 미달의 인간을 시공간을 거슬러 만났음에 즐거웠다. '모든 것'과 '빌더무트라는 이름의 사나이'까지도. 또한 시대가 덮어 두었던, 굶주리다 떠나버린 소시민들, 금기되고 절규하던 여성들의 조각들을 바라보며 여러 갈래로 흩어진, 소수인의 연대감을 느꼈다.
시대로 빚어진 타인 속에서 끝내 무뎌지지 않는 '나'를 의식한, 서른의 변곡점에서 만난 일곱의 소수인. 이것이 내게 남겨진 '삼십세'의 인상이다. 삶에서 목격되는 나의 소수적 순간들을 주제로 글을 쓰는 게 여전히 힘에 부친다. 그러나 때로는 오직 사소한 기록만이 빅데이터에 잡히지 않는, 세상의 다채로운 존재들을 증명함으로써 그들 서로의 위로가 될 것을 믿는다. 다수의 소수가 공존하는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모를 혼란을 꿈꾸며, 서른의 바하만을 기억하며 그녀의 시를 붙인다.
노예 상태는 견디지 못한다
나는 항상 나다
어떤 것이든 나를 휘게 하려 한다면
차라리 나는 부러지겠다.
냉혹한 운명이 닥쳐오거나
또는 인간의 힘이 밀려오면
여기에, 이렇게 나는 있고 이렇게 나는 머무른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하여 머무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직 하나이다
나는 항상 나다
올라간다, 그렇게 나는 높이 올라간다
추락한다, 그렇게 나는 완전히 추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