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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 클레어 May 29. 2022

바깥은 여름

「 마음 」ㅣ 나쓰메 소세키 ㅣ 문예출판사 


 어느덧 피서(避暑)의 계절이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곧잘 여름을 피하려 한다. 환경에 취약한 인간에게 버티는 힘을 가르치려는 자연을 기만한 채 경도를 이탈하거나 최소 탈의를 감행한다. 적당히 예열된 물속에 첨벙 뛰어드는 일탈 가운데 삶의 어느 경계에 선 두 남자가 마주쳤다. 망망대해를 헤치며 버틸 수 있을 만큼 숨을 참았다 다시 뱉어내는 그들의 해수욕은 즐거운 놀이인 동시에, 자초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벌이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아 보였다. 육지와 바다, 이상과 현실 중 마음의 추가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지 가늠하며 자구하는 메아리 같은 시간이 잠시 멈춰 있었다. 이상을 좇는 젊은 학생인 '나'는 비참하도록 현실적인 '부모님'이 아닌, 닿을 수 없는 과거의 베일에 싸인 '선생님'을 추앙한다. 정작 육지에서의 삶을 헤엄쳐 나가지 못하던 '나'와 '선생님'은 가마쿠라 해수욕장에서의 만남 이후 서로의 촉매가 되어 고요하던 마음에 물장구를 친다. 습관적으로 피하던 여름을 정면으로 응시한 바로 그때였다.


 자기 경멸로 점철된 '선생님'은 고사 직전의 마음을 움켜쥐고 있었다.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 무위하며 주변의 기대를 저버렸고, 수십 년간 매월 K의 묘를 찾는 혼자만의 의식으로 망각의 축복을 거부했으며, 줄곧 자신의 곁을 지킨 아내에게 끝내 침묵한다. 부모님의 유산을 빼돌린 작은아버지와 일가친척들로부터 배신당한 젊은 '선생님'은 다시는 배신당하지 않으려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자신을 배반할 수 없는 '학문'에 몰두하며 고립되던 그는 '하숙'이란 우연이 선물한 미망인과 '그 딸'을 작은 무인도 삼아 자신의 마음이 헤엄쳐 다녀올 거리에 둔다. 점차 헤엄칠 여유가 생긴 '선생님'은 학업과 생계의 난관에 처한 고향 친구 'K'를 그의 세계로 들이고 '딸'에 대한 같은 마음을 품은 K의 고백을 듣는다. 놀람과 공포로 인한 '육'의 마비, 멈춤, 망설임. 


 프랑스 작가 메스트르는 소설「내 방 여행하는 법」을 통해 가택연금 중 '영혼'과 '동물성'으로 이뤄진 자신의 존재를 대상화하며, 그 동물성을 잘 조련한 이들이야말로 뛰어난 사람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영혼이 말할 때 동물성이 함께 말할 수 없었던 '선생님'은 자신을 조련하는데 실패한 사람이다. 마음과 육체의 속도를 조율하고 맞춰가는 것, 그것이 함부로 남발하던 '인생은 타이밍'이란 말의 속뜻이었을까. 그러나 이 조련의 미숙함은 '선생님'을 '극작가'이자 '연출가'이자 '배우'로 만들었다. 자신의 패를 보류함으로써 먼저 꺼내진 상대의 패에 대한 가설을 수립하고 검증하고 분석하며 절대 지지 않을 확신의 패를 준비해 갔다. 삶에 진지했으나 사랑에 서툴렀고 그 역시 동물성의 조련을 마치지 못한 K에게 '선생님'이 던진 '정신적으로 발전하고자 하지 않는 자는 어리석어'란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아직 K의 패를 본 이는 자신뿐임을 면밀히 확인한 선생님은 꾀병을 부려 미망인만 있는 상황을 설계하고 실현하여 그녀에게 딸을 달라 요청한다. 호방한 기질의 '도리'를 아는 그녀를 통해 선생님은 제 손에 들리지도 않은 비수를 한번 더 K에게 안겼고 그날 밤 그는 원망과 저주의 문장 하나 없이 자결했다. 미래의 소유로부터 배신당하지 않으려는 극한의 이기심으로 선생님은 장모와 아내, K에 대한 죄의식을 얻었고, 집요한 진실에의 함구로 끝내 그들을 배신했다.


 이 장대한 배반의 서사시를 품에 안은 '나'는 정녕 '선생님'의 대나무 숲이었을까. 뻔뻔하리만큼 문지방을 드나들던 방황하는 풋내기 '나'에게서 선생님은 본인에게 부재했던 두 가지 이름의 마음을 본 것이 아닌가 한다. 인생 그 자체에서 생겨난 교훈을 얻고 싶다며 밀봉된 과거를 병풍처럼 펼쳐 보여달라고 조르던 무모한 '용기'와, 반갑지 않은 거리감을 무시하고 섭섭한 만큼 더 가까이 다가가던 '용서'. '나'의 이 풍요로운 유산의 기원은 결국 부담스러울 정도로 무조건적인 응원과 믿음을 보내주시던 고향의 '부모님'이 아닐지 생각하며, 충격의 편지 읽기를 마쳤을 도쿄행 기차 안의 '나'를 그려본다. 추앙하던 한 인간의 침몰을 목격하는 마음엔 얼마나 큰 파도가 일렁이었을까. 그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 돋아났을 또 다른 마음이 궁금하다. 무르익은 나의 마음이 깜깜한 심연을 지나 타인의 섬으로 무사히 헤엄쳐갈 수 있는 적확한 때와 방식을 부단히 단련해나가야 한다는 다짐, 직면하지 않는 나약함과 비겁함은 자신뿐만 아니라 '사모님'과 같은 억울한 희생자를 동반할 수 있다는 복잡한 진실, 그런 것들을 마구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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