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으로 전국이 들썩였던 만큼 소설가 한강의 작품은 읽어봐야겠다 할 참이었습니다. 한 가지, 동네서점은 물론 중고책방까지 품귀 현상이라길래 한바탕 열기가 지나간 뒤 책을 구매해 읽어볼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인의 집에 놀러 갔다가, 2008년 5판 인쇄된 '채식주의자'를 빌려볼 수 있게 되면서 생각보다 빨리 한강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문예창작과를 나온 지인은 대학 시절부터 한강의 팬이었다는군요. '채식주의자'가 연작소설 단행본으로 나온 게 2007년이고, 지인이 이 책을 구매한 게 이듬해니 찐팬이 맞습니다. 누런 종이와 종종 틀린 띄어쓰기에서 16년의 세월이 느껴졌습니다.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 등 3편의 중편소설로 이뤄진 연작소설입니다.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꾼 뒤 채식주의자가 된 영혜를 두고 그의 남편, 형부, 언니가 각각 화자를 맡습니다.
영혜의 남편은 영혜의 변신에 적잖이 당황해합니다. 영혜의 '평범함'에 반해 결혼한 그였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영혜의 형부는 비디오아트를 하는 예술가입니다. 아내에게서 처제의 엉덩이에 푸른 반점이 남아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뒤 어떤 집착에 빠지지요. 마지막 나무불꽃에서는 앞선 두 편에서 책임감 있고 생활력 있는 존재로만 그려진 영혜의 언니의 내면에 집중합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강렬한 이미지 몇몇에 뇌가 얼얼할 뿐이라 몇 가지 인상비평밖에 남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상한 꿈을 꾼 뒤 급작스레 극단적으로 육식을 피하고 점차 자신을 나무와 동일시하게 된 영혜를 아직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품보다 더 어려운 '해설'은 작품을 이해하는데 저에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소설을 다 읽고 배우 고 이선균의 유작 '잠'이 떠올랐습니다. 중편소설 '채식주의자'의 구조는 영화 '잠'과 유사합니다. 배우자가 어느 순간 꿈과 관련해 이상한 행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서사가 시작됩니다. 또 고기에 대해 그려지는 이미지도 상당히 비슷합니다. 영혜는 꿈에서 머리가 없는 존재들을 보고 나서 고기를 먹는 행위에 구토를 느끼는데, '잠'에서 몽유병에 시달리는 현수(이선균)가 한밤중 냉장고에서 생고기를 꺼내 씹어 먹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영화평론가 오동진 씨는 중앙일보 10월 26일 자 '영화 채식주의자, 소설과 똑같이 만들었는데 실패 왜'라는는 칼럼에서 소설 원작 영화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원작을 죽여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채식주의자는 동명의 저예산독립영화로 만들어져 2011년 개봉됐습니다. 개봉 당시 미국 선댄스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받았지만 서울 시내 '스폰지극장'에서만 개봉됐고 당시 관객수도 3500명에 그쳤다네요. 흥행참패인 것이죠.
이 글을 쓰고 있는 2024년 11월 1일 기준 누적 관객수가 5438명입니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 발표 이후 몇몇 극장에서 재개봉을 하고 있어서 조금씩 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화평론가 오동진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내면묘사에 집중하는 문학을 러닝타임 2시간 내외의 영화로 표현하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죠. 장르문학이라면 어느 정도 영화화가 가능하겠지만 노벨문학상에 선정될만한 문학은 영화화가 어렵습니다. 장르문학이라더라도 감독의 철저한 작품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영화 '채식주의자'는 원작에 너무 충실했다는 지적입니다. 애초에 소설로서만 전달가능했던 인간의 내면탐구가 영화로 전달되기 어려웠음은 당연하고요. 채식주의자를 영화로 한다면 '몽고반점'에서 나온 몸에 꽃을 그린 남녀들의 두 번의 정사가 영상적으로 부각되겠다 싶었는데, 오동진 평론가의 글을 보면 실제로 영화는 '몽고반점'에 초점을 맞췄다고 합니다. 글을 쓰고 보니 실망하더라도 그 영화 '채식주의자'를 보고 싶어 지네요.
또 하나의 간단한 인상비평. 채식주의자가 경기지역 초·중·고등학교 도서관에서 한때 폐기됐었다는 기사를 보셨을 겁니다. 보수 시민단체가 교육청과 학교에 이 소설이 음란하다며 공문을 보내는 등 압력을 넣은데 따른 것이죠.
저는 이 소설을 읽기 전에는 '때가 어느 때인데 성적묘사가 있다고 책을 폐기할까' 싶었습니다. 각 학교의 책 폐기가 '철 지난 분서갱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고 난 뒤 그 시민단체들과 학교들의 입장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겠다 싶었습니다. 단순한 성적 묘사라면 예술의 영역에서 소화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형부와 처제 간의 성관계를 그린 작품을 청소년들에게 보라고 들이밀기는 저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인들에게까지 특정 문학을 차단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겠지만, 청소년에게는 어느 정도의 제한을 두고 있지 않은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