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
최근 일본 도쿄로의 짧은 휴가 중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을 읽었습니다. 27쪽 분량의 동명의 단편소설을 비롯해 '녹색 짐승' '침묵' '얼음 사나이' '토니 다키타니' '일곱 번째 남자'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등 7편의 작품이 실린, 160쪽 분량의 짧은 단편집입니다.
단편들이 쓰인 것은 주로 1980년~1990대, 국내에서 단편집이 출판된 것도 1997년인 옛날 소설들입니다. 책은 휴가 전날 알라딘 중고책방에 가서 급히 골랐습니다.
참 읽기는 쉬운데 뭐라고 감상을 쓰기 어려운 책들이 있지요. 저는 특히 문학 중에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이전에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땐 '문체가 아름답다'는 것 말고는 당최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알아먹질 못했습니다.
이번 단편집도 '작가의 말'이나 '옮긴이의 말'이 없었더라면 이 작품들이 고독과 그 주변부 무엇에 대한 얘기라는 감도 못 잡았을지도 모릅니다.
경제 호황기 일본이 그랬던 것일까요. '노르웨이의 숲'이 그렇듯 그의 작품 주인공들은 물질적로 풍족한 생활을 누리면서도 어딘가 공허함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될 대로 돼라'식의 관조적 태도도 묻어나지요.
문학이라는 특성상 이번 리뷰는 그냥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라고 뭉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감상은 그냥 가슴이 벅찼을 뿐 자신이 뭘 느꼈는지 모를 때 하는 소리일 경우가 많지요.
대표작 '렉싱턴의 유령'만이라도 느낀 점을 꾹 꾹 문자로 남겨보려 합니다.
렉싱턴의 유령
무라카미 하루키가 미국 매사추세츠 주의 케임브리지에 2년 정도 살고 있을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소설 서두에 설명한 소설입니다. 실제로 하루키는 1994~1995년 케임브리지에서 생활을 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설상 화자는 '나'라고 부르겠습니다. '나'는 케임브리지 생활 중 편의상 '케이시'라고 부르는, 쉰 살을 막 넘긴 잘 생긴 건축가와 알고 지내게 됩니다. 케이시는 아버지가 대단한 재즈 마니아였어서 그가 상속받은 렉싱턴 지역 저택엔 재즈 레코드가 방 하나에 가득 찼지요. 여기서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실제로 그렇듯 엄청난 재즈 마니아입니다.
'나'는 케이시가 런던 방문으로 집을 비우게 된 일주일간 그의 저택을 봐주게 됩니다. 케이시의 반려견을 돌보고 남은 시간은 재즈 레코드를 듣는, 나쁘지 않은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런데 ‘나’는 인적 드문 그 저택에서의 첫날밤 기묘한 경험을 합니다. 아래층에서 파티라도 연 듯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던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내려가 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케이시로부터 그런 말을 듣지요. 자신의 아버지는 아내(케이시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3주간을 죽은 듯이 잤고, 자신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똑같이 그랬다고. 그런데 얼마 전까지 같은 집에 살던 피아노 조율사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 지금, 독신인 자신이 죽는다면 자신을 위해 그런 잠을 자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고.
이 소설 내용이 무라카미 하루키가 실제 겪은 일이라면, 아마도 그가 고독에 대해 한창 생각하고 있을 때 벌어진 일이라 그저 옮겨 적은 게 아닐까요.
하루키도 책 표지에 "'렉싱턴의 유령'의 경우, 어떤 종류의 아픔이나 상실감을 생생하게 느끼며 공유하는 것에서 그 소설의 유효성이 성립되는 것도 있어, 뭐 이런 것도 괜찮구나 싶은 기분이 듭니다. 저는 종종 그런 이야기를 몹시 쓰고 싶어지는 때가 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이 단편을 읽고 '나는 내가 죽었을 때 나를 위해 그렇게 슬퍼해 줄 사람은 누가 있을까. 역시 가족밖에 없구나. 오는 5월 가정의 달에 부모님께 잘해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당연한 감정을 느끼는 게 이 책을 읽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시간 대비 성능비가 너무나 떨어지는 게 아닐까요.
어쩌면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명성에 눌려 지레짐작한 만큼 이 단편의 문학적 가치가 그리 뛰어난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과 똑같은 글을 어느 무명 소설가가 썼다면 전혀 다른 평가를 받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비유를 하기 위해 살짝 곁가지로 빠지겠습니다. 얼마 전 영화관에서 홍콩영화 '열화청춘'을 봤습니다. 1982년 개봉작을 리메이크 버전으로 재상영한 것입니다. 고(故) 장국영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매년 4월이면 이런 이벤트들이 마련되곤 하죠.
그 영화는 몇 년 전 어머니를 잃은 뒤 별다른 목적 없이 살아가는 부유한 집안의 루이스(장국영)와 그 주변부 청춘들의 사랑과, 일본에서 적군파(공산주의에 의거해 입헌군주제를 전복하고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우려 했던 단체) 활동을 하다 도망쳐 온 사나이 신스케 등 크게 두 개인 서사로 이뤄져 있습니다.
자유와 물질적 풍요를 누리지만 목적을 잃은 청춘과 일본에 대한 동경 등 사회상이 나타나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난 직후의 느낌은 "이건 뭥미"였습니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유명한 영화배우가 출연한 영화라고 해서 그게 다 대단한 명작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단편이라더라도, 그리 가치가 높은 게 아닐지도 모르듯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