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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서도 '덤' 얻을 수 있다"...비즈니스 협상론

김병국 미국 변호사의 '비즈니스 협상론'

by 생각하는T
협상 장소·시간과 가격 주도권 쥘 것 강조
가격 항목별로 나눠 파악해야 깎기 쉬워
상대방 정보 수집하고 양보는 최대한 나중에

'세이노' 추천도서로 다시 화제 오른 책
80~90년대 경제성장기 韓기업들 해외진출기
'성공시대' 보듯 생생하게 읽히고
병법 36계서 현대 협상론 이끌어낸 노력 엿보여


"협상 전 상대방에 대해 조사하고 내 정보는 최대한 드러내지 말 것. 홈그라운드에서 내게 유리한 시간에 협상을 하고 먼저 가격을 부를 것. 구매자 입장이라면 그 가격을 세부 항목별로 구분해 파악할 것. 가격 외 거래 조건에서도 충분히 이득을 받아낼 것. 답은 꼭 하나가 아니니 상대방에게도 이익이 되고 나에게도 되는 창의적인 방안을 생각해 낼 것. 양보는 나중에 천천히 작은 것으로 하며 생색을 꼭 내고 필요할 땐 침묵할 것. 상대의 협상 권한을 따지고 그 배경 조직을 상대로 협상할 것. 상대의 마감시한을 공략할 것."


국제협상전문가 김병국 미국 변호사가 그의 저서 '비즈니스 협상론'에서 300여 쪽에 걸쳐 펼치는 협상 원칙을 대체로 이 같이 요약됩니다. 1999년 첫 출간된 이 책은 지난 2022년 발행된 '세이노의 가르침'에서 추천 도서로 꼽혀 최근 다시 관심이 모아졌죠.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한 말들이고 최근 소개한 허브 코헨의 '협상의 기술'과도 내용이 상당 부분 겹치지만, 한국과 동아시아의 현실·관습에 맞춰 써진 협상론은 지금 읽어도 충분히 참고할 점이 많아 보입니다.


대표적인 전략으로 '꼭 가격이 아니어도 협상으로 얻어낼 것이 있다'는 내용입니다.

국내 기업 A사는 미국 햄 브랜드 B사의 제품을 수입해 국내에서 판매를 하고 있었습니다. A사는 아직은 국내에서 인지도가 적은 B사 햄을 알리기 위해 프로모션이 필요했고 그만한 돈을 B사로부터 수입 가격을 깎음으로써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B사는 "가격을 깎아줄 수 없다"라고 강경하게 나왔습니다. A사는 방향을 틉니다. "가격은 깎지 않겠다. 다만 프로모션에 쓸 햄을 샘플로 그만큼 달라". 그간 가격을 깎는 데는 한치의 물러섬이 없던 B사도 샘플로 공짜 햄을 주는 데는 선뜻 동의를 했다고 합니다.


책에 나타난 사례들은 주로 저자가 협상가로서 활동한 1980~1990년대의 비즈니스 협상들로 보이는데, 제조업 국가한국의 기업들이 어떻게 해외 진출을 하고 사업을 키워왔는지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웠습니다. 1997~2001년 방영된 MBC '성공시대'를 보는 기분이랄까요.


그중 대표적인 사례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이제는 대한항공에 통합된 아시아나항공이 1988년 출범 준비를 할 당시로 '추정'되는 내용입니다.

C사는 민항사로 새로 출범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기존부터 민항업을 하던 D사의 견제가 들어옵니다. C사가 신형 비행기를 구입하는 것을 방해하고자 D사가 비행기 구입 협상에 나서며 가격을 올려놓은 겁니다. 이에 C사는 투트랙 전략을 짭니다. 중고 비행기 구매를 타진한 것이죠. 사실상 중고 비행기를 좋은 조건에 구매하기로 결정이 됐으면서도 신형 비행기 구입 협상도 종결하지 않습니다. C사로서는 중고 비행기 판매 측에도 '중고 비행기 가격이 높으면 신형 비행기 구매로 방향을 틀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낸 셈입니다.

이를 상황을 모르고 있던 D사는 필요 이상으로 많은 신형 비행기를 비싼 가격에 구입합니다. C사는 결과적으로 경쟁사 D사를 되레 물먹이기까지 한 것이죠.

저자는 이를 두고 "C사가 신형 비행기 구매 협상 테이블을 지킴으로서 상대방과 경쟁사 D사를 교란시켰다"라고 서술합니다. 그러면서 "무조건 협상의 종결을 선언하기보다는 나의 종결 선언이 경쟁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야 한다"는 협상 전략을 설명합니다.


협상전문가인 저자 개인의 '무용담'도 담겼습니다. 그가 미국 고급 백화점 노스트롬에서 '덤'을 얻어낸 일화입니다. 저자는 '내가 명색이 협상가인데 정찰제 고급 백화점이라도 협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옷 두 벌을 사며 할인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매장 직원은 "우리는 절대 할인을 하지 않는다"라고 나왔습니다. 저자는 "그렇다면 할인 권한이 있을 수도 있는 매장 책임자를 불러달라"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자 엄청나게 매력적인 여성인 매장 책임자가 나와 "할인은 해줄 수 없지만 두벌을 산다면 멋진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다"라고 제안을 했다네요. 그리하여 매력적인 여성과 즐거운 저녁식사를 했다는 했다고 합니다(요즈음 감수성과는 맞지 않을 수 있는 사례지만, 정찰제 백화점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덤을 얻어냈다는 점에 집중합시다).


또 하나 눈여겨 볼만한 점은 고대 중국 병법 '삼십육계'를 활용한 현대 비즈니스 협상론을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말 그대로 36계를 전부 하나씩 대입해 협상론을 현대식으로 해석했습니다.

가령 제17계 포전인옥(抛塼引玉), "벽돌을 버리고 옥을 얻는다"을 제시하며, 저자는 이 전법에서 자신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도 중요한 것처럼 꾸며 양보하면서 상대방에게 더 큰 것을 얻어내라는 원칙을 끄집어냅니다.


저는 36계를 현대 비즈니스 협상론에 접목하려 했던 저자의 시도에는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이미 허브 코헨 같은 미국, 서구 중심의 비즈니스 협상론은 널리 알려졌지만 이는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 그대로 활용하기에는 문화적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에는 또 "동아시아의 비즈니스맨들은 병법을 그대로 활용해 협상을 전쟁처럼 제로섬(zero-sum) 방식으로 하려 한다"는 인식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중심의 '상호주의적 협상'과 동아시아의 고대 병법 기반 협상 방식 사이에서 어떤 절충점을 찾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요.

사족으로 '36계 줄행랑'이라는 말이 실제로 36계 중 36번째 계(計)가 '주위상(走爲上)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는 데서 온 말이라는 것을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이 책의 비즈니스 협상 사례들은 30여 년 전들 것이지만 그 협상의 원칙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보입니다. 한국인의 시각에 맞춘 협상 방법을 제시한 '비즈니스 협상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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