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전 남편
<작가의 말>
토요일이 연재일이라는 걸 깨닫고
금요일 오후부터 내용을 고민했지만,
당일 오전까지도 머릿속이 하얬습니다.
'새아빠'라는 주제 앞에
무슨 말을 쓰면 좋을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오후가 되자 일단 뭐라도 써야겠다 싶어
히스토리부터 적기 시작했는데,
시작하고 나니 할 말이 많더군요.
이번에 글을 쓰며 깨달았습니다.
이건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라
들추면 아프다는 것을요.
그러려던 것은 아닌데
평온함 유지에 실패하고
분노를 폭발시키며 글을 마무리하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평화로운 연휴 주말에 읽기에는
좋지 못한 글이라
마음이 헝클어지는 게 싫으신 분들은
읽지 말고 넘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분노하고 싶으실 때,
'나만 화가 가득한 게 아니었네' 공감받고 싶으실 때나
일독 권장 드립니다.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설 연휴 되시기 바랍니다. :)
엄마가 이혼 후 부산에 내려와 직장에 다니실 때였다. 아이들을 떼어놓고 오느라 출근길에 조금 늦은 엄마는 택시를 타려 했는데 비 오는 날이라 택시가 안 잡히더란다. 초조한 표정으로 택시를 잡으려 손 흔드는 엄마를, 마침 그 길을 지나던 새아빠가 보고 차를 세워 직장까지 태워주었고, 감사를 표하며 연락을 시작한 것이 만남으로 이어지고 결혼까지 간 것이다. 아이를 좋아하는 새아빠는 언니와 나를 이뻐하셨고 나도 나를 예뻐해 주는 사람이 생겨서 좋았다.
보육 도움 없이 우리를 키우며 회사까지 다녀야 했던 엄마는, 우리와 외출하는 일이 손꼽히게 적었고 항상 화가 나 있었다. 친구라고는 없는 낯선 동네로 이사 온 후에는 더 심해졌다. 새아빠는 엄마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셨고, 장난기가 많아 엄마가 웃을 일이 많아졌다. 적막하던 집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2년 정도 교류하던 엄마와 새아빠는 집을 합치기로 했는데, 새아빠는 아버지가 편찮으시니 시골 본가로 들어가 함께 살며 부모님을 모시자고 했다. 엄마는 꽤 좋은 직장에 다녔지만 계속된 설득에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셨다. 지금껏 혼자 고군분투해 왔는데 남자친구가 가장 역할을 자처하고 나섰으니 듬직해 보였을 것이다.
문제는 이때부터 발생했다. 엄마가 알던 새아빠는 아들 하나 있는 이혼남이었는데, 본가에 인사를 드리러 가보았더니 아이가 네 명이나 더 있었다. 새아빠는 아들이 귀한 집의 유일한 아들이었고, 늦둥이가 대 잇는 걸 보지 못할까 걱정하신 부모님이 고등학생 아들을 혼인시켜 아이를 낳도록 하신 것이다. 생기는 아이들이 계속 딸이라 아들이 나올 때까지 아이를 계속 가졌고, 그 결과 새아빠는 27세의 나이에 딸 셋과 아들 둘의 아빠가 되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른이 되어 생각해 보면 기함할 일이다. (엄마는 30대 초반에 아이를 낳으셨다.)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 없이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살아온 사람은 반드시 방황을 하게 된다. 새아빠는 35세의 나이에 비 내리던 길가에서 만난 세 살 연상의 여성과 사랑에 빠졌다. 엄마에게는 자신이 이혼한 상태라고 했지만, 의붓형제들 마음의 상처를 보면 엄마를 만나면서 이혼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엄마는 아이가 총 다섯이라는 사실을 알고 새아빠를 떠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영리한 새아빠는 이미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있었고 협박과 회유, 무엇보다 동정심 유발을 섞어가며 엄마를 붙잡았다. 엄마와 새아빠는 "정직"을 가훈으로 삼고 우리에게 솔직할 것을 강조했는데, 사람이 얼마나 큰 거짓말을 할 수 있는지를 잘 알아서 그리 한 게 아닐까.
새아빠는 작은 시골 동네의 큰 부잣집 외아들이었고, 용맹하고 싸움도 잘했기에 거침이 없었다. 머리도 좋은 편이었지만 애가 다섯이라 고등학교까지만 나와서 우체국에 다녔다. 엄마를 만난 후 아빠의 삶은 크게 변했다. 엄마는 예쁘고 키도 크고 도시에서 온 대졸 여성인 데다, 간호사 면허를 지녔고 직장도 번듯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선택해 주었다는 사실이 자신감을 강화해 주었을 것이다. 부모님도 자랑스러워하셨고, 동네 사람들도 부러워했다. 무엇보다 엄마의 도움으로 새아빠는 사업가가 되었다. 엄마는 본인이 잘 아는 분야를 활용하여 사업체를 차렸고 거래처도 여럿 확보했지만, 대표 자리는 남편에게 주었다. 새아빠는 시골살이와 부양가족 등 현실적인 문제로 펼치지 못했던 자신의 자긍심 높은 자아를 엄마의 도움으로 펼쳐볼 수 있었다.
바람을 한 번만 피우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다. 큰 도시에 위치한 회사의 사장이 되어 좋은 차를 타고 모교의 육성회장도 맡는 등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자 새아빠는 또 바람을 폈다. 엄마는 모든 걸 버리고 이 남자를 따라 시골에 들어온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자신이 가진 모든 것(직장, 돈, 친정자금, 연줄)을 새아빠와 공유해 버렸기에 물릴 수가 없었다. 영리한 새아빠도 바람은 바람일 뿐 엄마처럼 자기에게 도움이 될 사람이 없다는 걸 간파하였기에 바람을 접었다. 엄마는 새아빠가 아이들의 존경을 잃지 않도록 모든 결함을 감춰주었기에, 우리는 두 분이 싸우시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한 번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빠가 여자들과 차를 타고 가는 걸 보고 온 내가 엄마에게 "그 사람들 누구예요?" 여쭈었을 때도, 엄마는 내가 잘못 본 거라며 덮으셨다. 엄마는 우리에게 늘 "(새)아빠는 너희를 사랑하신단다. (새)아빠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말씀하셨기에 나는 새아빠는 훌륭한 사람이고 우리가 받는 것이 사랑인 줄 알고 자랐다. 집안 분위기는 항상 뭔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어린 나는 모든 가정이 원래 그런 줄 알았다.
다 알고 나면 누구라도 "도대체 왜 같이 산 거야?" 싶을 테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새아빠가 엄마를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느꼈다. 우리 집은 엄마가 고생을 덜 하시도록 가사도우미를 썼고, 식기세척기가 나오자마자 부엌에 들였다. 두 분은 거의 늘 함께 다녔고 새아빠가 빛나는 자리에는 늘 밝게 웃는 엄마가 곁을 지켰다. 새아빠는 엄마의 조언에 귀 기울이면서도 엄마의 울타리가 되어줄 것처럼 남자답게 리드했고, 아이들 앞이라고 부끄러워하는 일 없이 애정표현과 애교를 자주 보이셨다. 사업을 통해 자산을 늘려가면서 새롭게 취득한 부동산은 엄마 명의로 설정하여 불안감을 없애주었고, 새롭게 설립한 회사 이름은 둘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지었다. 둘 사이에 아이도 하나 더 갖고 싶어 하셨지만, 엄마는 기겁하며 거절하셨다. 남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도 커서, 학비를 내지 못하는 학우 얘기를 듣고는 대신 내주신 적도 있다.
라이온스클럽에 가입하고 시의원 선거에 나갈 정도로 나름 잘 나가던 새아빠의 인생은 IMF가 터지면서 고꾸라지고 만다. 가장의 추락은 온 가족의 추락이었다. 새아빠와 엄마는 부도와 보증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빚더미에 앉았다. 의붓형제들은 친엄마 곁으로, 언니와 나는 엄마 지인 댁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다행히 두 분 다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사업체를 차려 재기하였지만,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언니와 나는 가장 어렸던 덕분에 잠깐의 시간을 제외하면 엄마, 새아빠와 계속 같은 집에서 살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만 두 분 다 매우 바빴기에 우리를 부산집에 놔둔 채 서울에 자주 계셨다. 덕분에 꽤 많은 시간을 언니와 나, 중학생 둘이서 살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나는 그 시기를 거치면서, 가난하면 세상이 불친절해진다는 것과 사회안전망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아빠는 눈물 나는 노력 끝에 재기한 자기 자신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재기의 기준은 아마 온 가족이 모여 살 수 있는 새 아파트와 몇 군데 토지 취득, 좋은 차를 모는 것과 아이들의 대학 등록금 내주기였던 것 같다. 그렇게 금전적인 것만 목표로 세워 달성한 후에는, 재기할 무렵 겪었던 고통을 이유로 이제부터는 자신의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새아빠는 누군가와의 식사자리에 가면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늘 자랑했고, 가족들의 희생과 상처, 늘어가는 빚 규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절대군주로 군림하며 지적과 불만을 용납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엄마가 끌어온 자금은 갚을 생각도 하지 않았고, 돈이 부족할 때마다 돈을 마련하라며 엄마를 괴롭혔다. 새아빠는 또다시 바람을 피웠고(여러 명 있었다고 한다), 더 이상 엄마에게 생활비도 주지 않으면서 고통 속에 방치하였다. 희망이 안 보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몇 년을 더 버티던 엄마는 결국 두 번째 이혼을 감행하셨다.
이혼 소송을 하면서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내가 중재하려 들자 엄마는,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던 새아빠의 경악스러운 단점을 많이 오픈하셨다. 지난하던 과정 속에서 나는 새아빠가 극악무도하게 내 가족(엄마와 언니)을 괴롭히는 모습을 보았으며, 엄마 딸인 나에게 엄마를 중상모략하는 걸 보며 다시는 연락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법인 명의의 차를 타시던 엄마(법인 이사)를 도둑이라고 신고하여 경찰서에 출두하게 만든 다음, 조사에 임하는 동안 견인차로 차를 가져가는 모습은 가히 상상초월이었다. 도난당한 차량의 주인이라며 견인차를 불러온 사람은 남이 아니라 큰 오빠(넷째 자식)였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다. 나는 이제 그 악마들과 엮이고 싶지 않다.
자신의 엄마는 애틋해하면서 남의 엄마(나의 엄마)는 함부로 짓밟는 모습에 분노가 일었다. 저런 소인배를 나와 가족으로 엮어 버린 엄마의 결정도 용서할 수 없다(엄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변함없다). 그렇게 힘들었으면서 왜 같이 사셨냐 묻는 질문에 엄마가 "너희가 아빠라고 부르면서 좋아했잖아"라고 대답하시는 바람에, 나는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렸지만 이제는 안다. 정말 우리를 위해 온갖 일들을 참아내신 거라면 친아빠를 용서하고 받아주시는 게 맞았다. 내가 본 평생 동안 엄마는 오직 새아빠에게만 관대하고 허용적이었다. 다른 이들의 잘못에는 가차 없으셨다. 엄마가 지분을 주장할 수 있는 인생이 있다면 그건 새아빠의 인생뿐이다.
딸은 남자를 고르는 것에 있어 아빠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새아빠는 친아빠가 아니지만, 내가 자라는 동안 아버지 역할을 해주신 분이다. 덕분에 나는 잘난 척하는 남자, 센 척하는 남자, 욱 하는 남자, 말 많은 남자, 인기에 목말라하는 남자, 여자 좋아하는 남자는 사절이라고 정해두었다. 그런 기미가 조금만 보여도 딱 싫어졌다. 연애생활이 순탄했을 리 없다. 사람은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고 어느 정도의 결점은 누구나에게나 있는 건데, 나는 지뢰를 피해 가듯 접근해야 했으니 말이다.
전쟁 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랐기에 눈치를 많이 보는 아이들(나, 언니, 의붓남매들)에게 "그래도 덕분에 눈치는 빠르잖아?"라고 하시는 걸 보며 한동안 띵했다. 지금까지도 충격이다. 모든 게 지나가고 나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나를 돌아보니, 오랜 기간 사이비 종교시설에 붙잡혀있다 나온 기분이다. 심각한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 범인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심리 현상)을 겪었던 것 같다. 새아빠는 좋은 점이 많은 사람이지만, 가족 입장에서 보면 단점이 너무 커서 가릴 수 없는 사람이다. '좋은 사람'이라고 계속 가스라이팅 해오신 엄마도 사실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반복하여 되뇌었던 것 아닐까. 한 가지는 인정이다, 내가 이해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 된 것은 새아빠 덕분이 맞다. 따뜻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인생 최고 목표가 된 것도.
가족을 건드리는 건 만국공통 금기이건만 아주 오랫동안 우리 엄마와 언니를 괴롭힌 나쁜 사람, 마지막 대화에서 "너도 딱 엄마처럼 살아라" 악담하신 그분(이건 자기가 나쁜 사람이라는 걸 사실은 알고 있어 나오는 악담이다).
부디 꽃길만 걸으며 행복하시길!
다만 꼭 나와 언니, 엄마와는 다른 세상 속에서 행복하시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