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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이쥬 May 05. 2018

흔한 일상의 소중함

누리는 것에 감사하며 지금을 즐길 줄 아는 것

 한때는 일상, 쳇바퀴 도는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 뭔가 좀 특별하고 재미있게 매일을 보낼 수는 없는 걸까.


 늘 같은 시간에 일어나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출근했다. 마지막 버스에서 내려 세 번째 환승을 할 수도 있었지만 조금 빨리 도착하려고 콩나물시루에 재차 5분여를 갇히는 것보단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15분 정도 빠르게 걷는 아침을 좋아했다. 여러 회사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선 빌딩 숲으로 진입하는 육교를 건널 때면 나처럼 바삐 걷는 사람들이 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개미떼. 저 빌딩 숲 안에 무엇이 있어 아침마다 이 수많은 사람들이 내달리는지 쓴웃음이 나왔다. 나도 그 일부이면서도.


 롤러코스터처럼


 그래서일까, 에미레이트에 입사를 결정하고 설렘은 극에 달했다. 일상을 타파하고 다이내믹한 매일을 열어갈 스스로가 궁금했다. 더 이상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가 아니어도 될 듯했다. 실제 에미레이트가 열어준 새 삶은 정말 다른 도시, 다른 침대에서 눈을 떠, 창문을 열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는 마법 같은 나날들이었다. 새로운 곳에서 맞이하는 짧은 하루 혹은 이틀 동안, 나름의 흔적들을 도시에 새겨가며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듯한 즐거움에 빠져들었다.


 다만 탑승 기종으로 B777과 함께 A380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가장 작은 A330으로 배정됐던 처음 1년은 아쉬움이 많았다. 주로 턴어라운드가 많은 스케줄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로 인해 비즈니스 승진도 빨랐고, 승진 이후 A380으로 옮겨가 거의 매달 서울 비행도 하게 됐으니 지금은 전화위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때는 A380을 타는 크루들과 비교해 상대적 박탈감이 있었다. A380만 취항하는 노선(서울도 그중 하나)으로는 비행도 가지 못했다. 비슷한 시기 입사한 한국인 크루가 서울 비행을 다녀왔다는 말을 건너라도 들으면 절대 그럴 수 없던 나는 속으로 한참 부러워했다. 아무리 새로운 도시도 도시지만 정작 집은 못 가는 현실. 여러 사정들이 겹치며 나는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늦은 10개월째가 되어서야 집으로 휴가를 떠날 수 있었다. 이후 2, 3개월에 한 번 꼴로 집에 가게 되었지만 그 10개월 동안 겪은 감정 변화는 깊게 흔적을 남겨 조그만 자극에도 쉽사리 피어오르곤 했다.


 그래도 여전히 크루로서의 삶은 롤러코스터처럼 스릴 있었고 마하의 속도로 흘러갔다. 그 안에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발견했다. 세상 모든 일들이 그렇듯 장점이 있고 또 단점이 있다. 단점을 더 크게 보는 날이면 어쩌자고 이 먼 타국까지 와서 고생인가 싶다가도, 장점을 더 크게 보는 날이면 세상이 모두 아름다워 보여 신이 주신 이 기회에 감사하곤 했다. 하루하루를 대하는 나의 감정도 그렇게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쳤다.


일상을 그리워하다


 보통 크루들은 5일 연속 오프를 반기고 또 얻기를 원한다. 이 정도 오프면 짧게 여행을 다녀오거나, 집에 들를 수 있는 여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첫 5일 연속 오프는 안타깝게도 수습 기간(probation, 입사 후 첫 6개월의 기간)에 찾아왔다. 수습 기간 중에는 원칙적으로 오프 때 UAE 국경을 넘을 수 없고, 스케줄 스왑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꼼짝없이 두바이에 머물러야 했던 것이다. 하필이면 주변 친구들마저 다 비행 스케줄로 바빴다. 첫날, 이튿날..까지는 자고, 먹고, 몰 나들이를 다니며 보낼만했다. 사흘째부터 비어있는 시간이 매우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나흘, 닷새. 온몸이 배배 꼬일 만큼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였다.


 비행 전 쉬는 날의 대부분은 그야말로 본능에 충실하게 보내온 참이었다. 아무래도 캐빈크루 라이프스타일의 속성이 시차적응이나 피로의 누적을 빼고는 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쉬는 때면 자고, 먹고, TV를 챙겨보고. 그렇게 재충전된 에너지를 비행 가서 쏟아내곤 했다. 때문에 이렇게 길게 시간이 빌 때, 훌쩍 여행을 떠나는 것 말고 어떻게 하루를 채워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데이오프를 멋지게 활용해 보겠다는 포부는 늘 피로와 함께 묻혀가기 일쑤였다. 잠이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잠에 대한 집착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만 갔다. 분명히 친구들과 댄스 교실에 다니고, 악기를 익히고, 제2외국어를 배우자고 했는데. 우리집은 12층, 26, 27층으로 엘리베이터만 타도 짐과 수영장이 있는데, 그저 잠만 어마어마하게 잤고, 한국에 있는 그 어느 누구보다 TV를 더 챙겨봤다. 그러다 하루가 멍하니 가고 나면 자책하기 일쑤였다. 시간이 자유롭고 유동적이면 활용이 되려 효율적일 줄 알았는데 짜인 시간표보다 그게 훨씬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보통의 의지나 열정으로는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그저 보통보다도 못한 사람인지라 3년 동안 죽어가는 데이오프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고 지금도 너무나 부끄럽게 생각한다.


 화려하고 미래도시 같은 두바이지만, 내가 한국에서 주로 하던,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바람 쐬며 걸어볼 산책길이나, 자리 잡고 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소소한 카페나, 마실 가듯 가 책 몇 권을 보다 나올 도서관 나들이 등은 쉽지 않은 것이었다. 엄마와 하던 쇼핑 데이트도, 부르면 당장 뭉칠 친구들도, 애견인 돌돌이를 데리고 휘젓던 나지막한 뒷산도 없는 곳. 소박한 멋이나 복작복작한 맛은 없는 곳에 나는 그다지 정을 붙이지 못했다. 두 얼굴이라 느껴지거나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맴돌던 두바이는 내게 집이라 불릴 수 없었다. 그저 침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 도시에서 나는 비행하는 것 이외의 일상을 꾸려나가지 못했다. 그렇게 떠나고 싶다 노래를 불러놓고서는 이제는 날다 지쳐 정착을 꿈꾸는 발 없는 새가 된 기분이었다.


 주말을 계획하고 기다리며, 한 주를 버티는 힘이 됐던 시간들. 지루한 쳇바퀴만 일상인 줄 알았더니 거기에 소소하게 따르던 특별한 일상의 소중함은 몰랐던 것이다. 물론 그때처럼 비행 사이 데이오프들을 새로운 일상으로 채워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의 나는 더 이상 일상이라 부를만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고만 느꼈다. 특별하고 새로운 것들은 차고 넘치게 누리고 있는데 정작 일상은 사라졌다.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아, 나는 어쩌면 그토록 지루해하던 '그때 그 일상'을 그리워하고 있구나.


 돌아보면 나는 살면서 '쉼'을 제대로 누려본 적이 별로 없었다. 늘 바삐 무언가를 했어야만 했다. 아마 그래서 갑자기 뻥하니 뚫린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랐던 것 같다. 이쯤 되면 이것을, 저쯤 되면 저것을 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삶의 기대에 따라 무작정 내달리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쉰다는 것을 죄악시 해오기까지 했으니. 내 스타일대로 여가를 꾸려야 하는데 정작 나에 대해서는 잘 몰랐으니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할지를 몰랐다. 어쩌면 길잡이가 없이는 길도 걷지 못하는 눈뜬 봉사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약간의 고비를 넘기며 나는 책을 읽고 평소 관심 있어 하던 분야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읽어야 해서 읽던 전공서적이나 참고도서가 아니라, 오롯이 나의 의지로 읽어내리는 책들을 마주하며 여가시간의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일상을 되찾다


 인간이 참 간사하여 가지지 못한 것이 늘 샘나는 법이라더니,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다시 규칙이 있는 일상에 향수를 느꼈다. 롤러코스터처럼 자극으로 가득하지만 그렇기에 어쩌면 영원히 적응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생활이 더 이상 맞지 않는 옷처럼 느껴졌다. 아침에 눈 뜨고 밤에 잠든다는 당연한 일상의 법칙을 기준으로 일정한 생활 패턴을 되찾고 싶었다.


 새로운 일상을 살아가는 요즘, 그 어느 때보다 감사한 마음이다. 매일매일 계획에 따라 진보를 이뤄내는. 습관의 힘으로 꾸려가는. 변화는 생각보다 극적이지 않고 가랑비에 옷 젖듯 작은 실천의 쌓임으로 온다. 빼곡한 일상 사이사이 일탈과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시간들이 그래서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다. 텁텁한 건빵 사이 별사탕이 더 달콤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별사탕이 마구 쏟아지는 별천지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름의 극과 극을 오가며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그렇게 나는 나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흔하디 흔한 나의 어떤 것이 누군가에겐 탐나는 무엇일 수도 있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만큼 내 떡도 누군가에겐 커 보일 수 있음을. 내가 누리는 것에 감사하며 지금을 즐길 줄 아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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