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꼬인 비행의 열쇠 같은 존재
아무래도 서비스직에 종사하며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나와 상관없이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늘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아무리 힘든 비행이라도 그날 크루들이 좋으면 수월하다는 말. 캐빈크루 전용 바이블이 있다면 아마 제일 첫 번째 말씀이지 않을까 생각해 볼 정도다. 그만큼 진리다.
좋은 비행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 = 캐빈크루
처음 브리핑룸을 들어서면 그날 비행을 함께할 크루들을 만나게 된다. 3년간 비행을 세 번 이상 같이 해본 크루는 거의 없었다. 두 번 마주치면 인연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말인즉슨, 대부분 그날 처음 본 사람들이란 소리다.
경영학에 보면 '내부고객'이라는 표현이 있다. 가치생산에 직접 참여하는 고객을 내부고객이라 하는데, 다시 말해, 캐빈크루 그 자체, 이들이 그날의 업무를 시작하며 처음 만나는 나의 내부고객인 셈이다. 그날 크루들이 좋기를 당연히 기대해 보지만, 일단 나부터 모두에게 좋은 크루이길 바랐다. 다들 그 진리에 대해 알고 있으니 대부분은 표정이 밝고 이따금 중립적인 얼굴들을 보게 된다. 아주 드물게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크루들도 종종 마주치게 된다. 각자 개인사가 있으니, 누구에게나 그런 날들이 있게 마련인지라 최대한 부딪히지 않으려 하고, 혹은 기분을 맞춰주려 애써본다.
프로페셔널을 논할 때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고들 한다. 개인적인 일들이 업무에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지만, 만약 일의 속성이 전적으로 누군가를 지속적으로 마주쳐야 하고, 상대해야 하고, 게다가 그 사람들에게 용역을 제공하는 입장일 때는, 완전히 그 공(供)에만 집중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 다시 말해, 서비스직은 업무 자체가 개인의 감정의 영역과 뒤섞여 있는지라 무슨 로봇이 아닌 이상 전적으로 공과 사를 분리해 내기가 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기대가 높고 요구사항이 많은 까다로운 손님들을 대해야 할 때는 속으로 펄펄 끓어올라도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해야 하는 상상 이상의 인내심이 필요한 아주 극단적인 상황을 마주하게도 되니 말이다.
언젠가 무척 바삐 시간에 쫓기는 짧은 턴어라운드 비행을 한 적이 있었다. 그야말로 속도전이었던 이코노미 클래스였다. 카트를 끌고 재빠르게 서비스를 끝내야 하는 참인데, 계속해서 앞에서 부르고, 뒤에서 부르고. 온갖 요구가 쏟아지는 난리통인 데다 영어가 서툰 손님들이 많아 버벅거림이 더 길곤 했다. 그때 같이 카트를 더블엔딩(double-ending: 카트 하나를 두 사람이 양쪽에서 서비스하는 경우) 했던 크루가 죽이 척척 맞았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뭐가 그렇게 재밌었는지 시종일관 서로 농담하고 시답잖은 것에 깔깔대면서도 순식간에 구역을 훑어나갔다. 다른 크루들 얼굴에 지친 기색이 역력해져 갈 때에도 우리는 뭐가 좋은지 계속 웃고 있었으니, 그 밝은 에너지에 손님들도 웃을 정도였다. 그 비행이 레이오버 비행이 아닌 것이 어찌나 아쉽던지. 그녀와 함께 하는 그 정신없는 비행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이처럼 좋은 크루들이 함께 손발이 척척 맞는 팀워크가 좋은 비행이라면 그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이겨낼 수 있다. 서로 으쌰으쌰 응원해 주고, 좀 버거운 일이 있으면 같이 도와가며, 그런 날에는 더 이상 억지 자본주의 미소가 아니라 진짜 미소가 얼굴을 떠나질 않는다.
반대의 경우, 멀쩡한 비행조차 최악이 되기도 한다. 두바이에서 LA로 가는 장장 16시간의 긴 비행 동안, 갤리(galley: 비행기의 부엌)를 담당했던 크루가 정말 별로였었다. 일하기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비즈니스 클래스에서는 특히 갤리 담당이 일을 잘해주어야 수월한데, 이 친구는 아주 최소한의 일만 했다. 특히 그 친구가 쉬러 간 사이에 누구에게도 갤리 상황을 전달해 주지 않아 거의 혼돈이었다. 안 그래도 바쁘기로 악명 높고, 끝이 나지 않게 느껴지는 긴 비행이 더욱더 길게만 느껴졌다. 그냥 우리들이 좀 더 일한다 셈 치자 무시해 보려 노력했건만, 랜딩 직전 마지막 서비스 때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당시 내 담당 구역에 Jain Vegetarian 밀을 특별히 주문했던 손님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그 식사를 다른 일반 Vegetarian 손님에게 줘버린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알 바 아니라는 태도를 보였다. 모른 척 주면 되지 않느냐며 아무것도 아닌 일에 열 내는 인간 취급을 했다. 여기서 설명이 좀 필요할 텐데, Jain Vegetarian은 일반 Vegetarian과 달리 주로 인도 아대륙 지역에서 믿는 일종의 종교인 Jainism에 따라 형성된 문화와 철학을 기반으로, 완전한 채식주의 더하기 땅에서 나는 뿌리채소들도 금지된다. 양파나 마늘이 대표적인데 수확 과정에서 작은 벌레나 미생물을 다치게 할 우려가 있고, 뿌리를 먹어 버리기 때문에 식물 전체가 죽어버릴 수 있어 먹지 않는 것이다. 손님이 세 번의 식사 서비스 내내 이거 Jain Vegetarian 맞냐고 여러 번 확인했던지라 나는 더 화가 났다. 그날은 내가 비행하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싸운 날이 되었다.
이처럼 좋은 크루들은 좋은 비행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유난히 힘든 비행에 크루까지 온통 부정적이고 짜증스럽다면 지옥이 따로 없을 정도가 되니 말이다. 물론 손님들도 중요하다. 그런데 그렇다고 꼭 "좋은" 손님들이 있어야만 그날의 비행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크루들은 최소한 무난해야 한다. 게다가 사실 이 부분은 적어도 컨트롤이 가능한 영역처럼 느껴진다. 먼저 나부터. 좋은 크루이고자 하면 절반은 거두는 셈이니까. 요즘은 회사가 크루의 행복을 우선순위에서 꽤 낮춘 모양인데, 아마 나를 비롯 모든 크루들이 같은 생각일 것이다. 크루가 행복하지 않으면 행복한 손님도 존재할 수 없다.
태도가 만드는 한 끗 차이
사실 대부분의 외항사들은 거절이 필요할 때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오히려 애매한 약속을 한다든지 중의적인 표현을 했다가 곤란할 수가 있으니 의미는 정확히 전달되어야 한다. 특히나 비행이 짧아서 모든 서비스 시퀀스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마무리되어야 하는 때에는(편도 1, 2시간 이내의 비행들) 일의 우선순위에 따라 거절해야 하는 영역이 짙어진다. 하나하나 요청을 제대로 정중하게 밀어내지 못하면 우선순위가 흐트러지고 그렇게 되면 팀으로 끝내야 하는 서비스를 급격히 느려지게 하거나 혹은 다른 동료에게 더 많은 일을 전가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I can't promise you. If I have time, I'll get back to you."
"I'm sorry, we don't have time."
물론 'No'라고 단호하게 거절할 수는 없다. 완곡하게, 절대 약속을 하지는 않으면서, 노력하겠다는 말로 가능성이 낮음을 전달하도록 배운다. 같은 말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기에 최대한 친절하게 미안한 마음과 표정을 가득 담아 이야기하곤 한다. 이 지점에서 표현이 잘못되어 문제를 자초하는 크루들을 많이 보았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진리는 만국 공통 통하게 마련이다. 손님들도 마찬가지다. 일을 하다 보면 영어가 능숙한 손님들도 많지만, 영어가 서툰 손님들도 보게 된다. 하지만 말이 통하느냐 통하지 않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다. 캐빈크루로서 손님을 대하는 태도에 신경을 쓰지만, 거꾸로 손님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도 느낀다. 짧은 말과 굳은 표정으로 다그치듯 하거나 한눈에 보기에도 하대하는 느낌이 들면 그 손님에게는 문제를 피해 갈 만큼 딱 최소한의 서비스만 주고 싶어 진다. 그런데 작은 요청 하나에도 조심스러워하시고 미안해하시면서 우리를 존중하는 손님에게는 정말 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드리고 싶어 진다. Please와 Thank you가 부릴 수 있는 마법의 힘은 생각보다 엄청나다.
Make someone's day
승무원 준비생 시절에 굉장히 많이 했고 또 듣던 말이, Make someone's day라는 표현이다. 비행을 하며 초반에는 내가 누군가의 하루를 만드는 주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의 하루가 더 빛나는 경험으로 남는 경우가 많았다. 그게 서비스직을 하는 가장 큰 보람이 아닐까 싶다. 고작 주스 한 잔, 콜라 한 캔을 서빙했을 뿐인데 정말 고맙다, 고맙다 말을 듣다 보면 이게 뭐 별 것도 아닌데 싶다.
서비스직으로 오기 전에는 미소(smile)와 태도(attitude)의 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늘 어딘가 어둡다는 첫인상을 줬던 나이기에 이런 변화가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하기도 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은 내가 무척 달라졌다고 하고, 나 스스로도 사진 속 내 모습을 보면 이제 웃는 것은 전문가가 다 되었네 라고 느껴질 정도다. 다른 것들보다도 일을 하면서 배웠다 혹은 남았다 느껴지는 것이 그 부분이다. 웃고 지내다 보니 삶에 대한 태도까지 변화했다. 웃었을 때 느껴지는 실질적인 심리적 변화로부터 시작해서 이것도 곧 지나가겠지 하는 긍정적인 태도로 무장되어 온 과정이었다. 부정적이고 비판적에 날이 잔뜩 서 있었던 나였는데 지금은 세상 온화하고 유하고 낙천적이 되었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당신이 가진 태도는 어디서 어떤 차이를 만들고 있는가? 굳이 하는 일이 서비스직이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하루를 만들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 한 번쯤 더 미소 짓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려는 노력을 보태보면 어떨까. 어쩌면 나 자신에게 더 크게 돌아올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