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럽게 전혀 의도하지 않게
미국에 와서 짝꿍과 같이 지내기 시작했을 때, 짝꿍은 기존에 일하던 곳이 갑자기 문을 닫으면서 일을 쉬게 된 지 한 달째였다. 미국의 의료 제도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만, 수입이 끊어지면서 보험료를 내지 않아 보험 혜택도 중단되었다. 오랫동안 복용하던 약값을 보험 없이 감당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짝꿍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전혀 의도하지 않게, 기존에 갖고 있던 약을 임의로 잘라 복용량을 줄여가며 완전 중단 상태에 다다르게 되었다.
9년째 복용하던 약을 중단하고
예전에 잠시 LA에 비행을 와서 짝꿍을 만났을 때, 깜빡하고 약을 가져오지 않아서 매우 당황해하던 그를 기억한다. 병원에 전화해서 근처 약국으로 처방전을 보내줄 수 있는지 등등을 묻다 결국 응급 상황으로 해서 훨씬 비싸게 약을 구해다 먹어야 했다. 그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약에 저 정도로 의존적이어야 하다면 좀 끔찍하다. 꼭 약을 먹어야만 평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걸까? 그럼 엄청난 제약인데 약 없이 좋아지려고 노력은 할 수 없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과거 언젠가 그런 질문을 했던 것도 같다.
너무 늦었지만 '함께' 하려는 약속을 지키려 마침내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생각처럼 영주권 신청도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았고, 짝꿍도 일을 쉬고 있어 보장된 수입도 전무했다. 초기에는 실업급여와 내가 들고 온 돈에 일부 의존했지만 그 역시 한시적이었다. 벼랑 끝으로 몰아 대는 나의 성향상, 올 때 들고 온 돈도 많지 않았었다. 마침내 두 사람 입에 풀칠도 힘들게 되었을 때, 추가로 돈을 송금해 왔다. 그가 하고 있던 사이드잡을 함께 하고 있었지만, 전혀 지식이 없는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짝꿍은 극도의 우울과 무기력으로 미루고 회피하기 일쑤였기에 얼렁뚱땅 한 일로 쓸만한 수입을 창출해 내지 못했다. 같이 밤낮이 뒤집어졌다 또 뒤집어지는 생활을 반복했고, 짝꿍은 대부분 온라인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고 동시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던 나도 휴대폰을 쳐다보다 하루를 다 쓰곤 했다. 짝꿍은 약을 먹던 동안에도 내게 자살 충동을 동반하는 우울증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했는데, 약을 중단해야 하며 맞이한 상황은 기존보다 더 좋지 않았다. 그렇다. 그런 바닥의 상태에서 그는 약을 중단했다.
복용을 결정하는 것 역시 매우 어려운 일이고, 복용 이후 부작용과 효과 사이 저울질도 복잡하지만, 10여 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복용한 약을 중단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임을 직접 내 눈으로 보았다. 찌릿찌릿 감전당하는 느낌을 동반한 두통, 이유 모를 신체 통증들, 불면증을 포함한 불규칙적인 수면, 소화불량 및 잦은 설사 증상, 불안, 극도의 피로감까지 다 찾아왔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우울의 극대화로 인해 자살충동을 느끼는 것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서 옆에서 광대짓도 해보고 했지만 그런다고 좋아지는 기분이 아니었다. 균형 잡힌 식사를 마련해 주고 싶었지만 금전에 쪼들리던 때라 그마저도 쉽지 않았고, 일단 식욕 자체가 없다시피 한 짝꿍은 고기나 패스트푸드만 먹는 매우 불균형한 식습관을 지녀 기호를 맞춰주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둘 다 그냥 집안에서 갇혀있듯 지냈으니 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었다. 햇빛도, 신선한 공기도, 인간관계도.
복용 중단을 점진적으로 한다고 했지만 일종의 금단 현상을 피하지 못한 짝꿍의 상태에 나는 기름도 더 부었다. 극단적인 감정 변화를 특히 감당할 수 없었고, 나 역시도 내 삶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변화로 계속해서 불안정해져 갔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해하려는 입장에 서려고 했지만, 24시간 붙어있으며 인내심도 점차로 고갈되어 갔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너는 정말 하나도 좋아지지 않는구나 하는 좌절감 같은 것들이 터져 나온 것도 있었다. 여러 번 언쟁과 싸움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우울증을 앓는 사람에게 하면 안 된다는 것들도 다 했다. 도대체 이 부작용이라는 것은 언제 사라지는 것인지도 궁금했다. 다시 약을 복용해야만 좋아지는 것이라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에게 너무 가혹해 보인다.
약의 재복용과 그 부작용
감사하게도 일을 시작하게 되어 다시 의료보험을 살리는 과정에서 일단 급한 대로 pay doctor로부터 약을 받아왔다. 끊어낸 약을 다시 먹어야 하니 영 께름칙해했다. 보조적인 수단을 먼저 동원해 보려고 했지만 상황이 꽤나 긴급하여 어쩔 수 없이 약을 다시 복용하게 됐다. 5mg의 Paroxetine(SSRI 계열 우울증 약, 브랜드명 Paxil)과 Clonazepam(공황장애 약, 브랜드명 Klonopin)을 아침저녁으로 1mg 1정씩 먹기 시작했다. 원래는 30mg의 Paxil과 1mg*2의 Klonopin을 복용했었다. 중단 후 약을 다시 복용하더라도 다시 그 약이 안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주는 데에는 2, 3주가 걸린다고 한다.
약효가 발휘되기를 기다린 지 4주가 되어간다. 3주째에 Family doctor도 만나긴 했는데 정신과 의사의 개념은 아닌지라, 그다지 속 시원한 해답이나 위로가 될 만한 치료는 없었다. 5mg에서 10mg으로 늘려야 할까요? 하는 질문에도 Up to you.라고 할 뿐이다. 양을 늘리면 그만큼 더 힘들 수 있고, 기존 복용량이 효과가 있으려면 3주를 꼬박 보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늘리려면 다음 주 중 시도해 보라고. 대신 Paxil이 어느 정도 효과를 보이기 시작하면 Klonopin은 끊도록 환자들에게 권하는 편이라 했다. Paxil보다 좀더 빨리 작용하는 대신 약효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아서 지금 하루 2정씩 먹고 있는거고, 장기적으로는 Klonopin으로부터 먼저 벗어난 뒤에 Paxil 양을 줄여 나가 보자는 것이었다. 보다 근본적인 우울증 원인을 파헤쳐서 해결하려고 해야 한다고.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고, 정신과나 심리 상담을 받으려면 좋은 의사나 상담사를 찾아 다녀야 되고 게다가 역시 비용이 드는 영역이다. 좀 딴 말이지만 미국의 의료체계는 정말 암전이다. 그래도 의사가 어느 정도 끝까지 자기가 도움줄 수 있는 것들은 주겠다고 협조적인 태도를 보여줘서 고마웠다.
현재 끔찍한 부작용에 우울증은 되려 더 극대화 된 상태다. 짝꿍은 그냥 죽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사람이 살면서 절대 겪어서는 안될 것들이라고 표현했다. 초반에 심했던 손발로부터 전기가 오는듯한 타는 통증, 심한 두통 같은 것은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식욕이 전혀 없고, 1시간마다 깨는 불면증에, 무엇보다 불안 증세가 심할 때는 호흡이 불안정할 정도, 계속해서 자살 충동을 느끼고, 늘 곧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절망 속이라고 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고 나 역시 그런 짝꿍을 보며 꽤나 황폐화되어 있었다. 결국 짝꿍의 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긴 고민 끝에, 현재 유지하고 있던 사이드잡을 아예 접어버리기로 했다. 그 일 때문에 붙어있었지만 늘 별로였던 이 동네를 떠나 좀더 안락한 환경인 이 친구 아버지 집으로 이사를 결정했다. 이 사이드잡이 추가 수입 혹은 수입의 큰 부분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은 있지만 현재 짝꿍의 상태로는 절대 최상으로 꾸려갈 수 없을뿐더러 이 자체가 스트레스를 주는 측면이 있어서다. 이사를 하는 데에 여러 사람 손이 필요해 이사 작업에 착수한 지 대략 5일 정도가 되었다. 아마 다음 주 중이면 이곳을 떠나 새롭게 자리를 잡을 텐데 나는 개인적으로 많은 기대를 품고 있다.
반면에 짝꿍은 여전히 자신이 잘못된 결정을 한 것은 아닌지, 대안을 불태워 버린 것은 아닌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온통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게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싫어하는데 이젠 이 일을 당분간 계속해야 하니 숨막혀 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오랜 고민들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하다 죽는다는 등, 인간은 인간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진실을 보려 하지 않는다는 등의 말을 하며 지나간 많은 것들에 대한 후회와 자괴감에 휩싸여 있다. 희망이 없고, 세상에 품은 회의감만이 그에게 어둠을 드리울 뿐이다. 아무리 좋고 긍정적인 말을 해주어도 그런 생각의 흐름을 멈출 수는 없나보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좋아질 거라고 말한다. 우울증도 반드시 좋아질 거고, 더이상 마음이 괴롭지 않도록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말이다. 이렇게 너를 위해 애쓰는 우리가 있다고, 의미가 없으면 어떻냐고, 꼭 삶에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하냐고, 너만 좋아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이게 첫걸음이 될 것이고, 꾸준히 그의 우울증을 안정시킬 수 있도록 나를 비롯 모두가 애쓸 것이다.
우울증과 약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
우울증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짝꿍이 9년 넘게 복용했다는 우울증 치료제에 관한 매우 불편한 영향력을 보면서, 여러 곳에서 관련 검색이나 자료 조사들을 좀 더 해보았다. 여전히 알아보고 또 알아보는 중이다. 길을 찾았으면 하는 절박함으로 헤매고 있기도 하다.
이곳에 무슨 이야기를 적어보면 좋을지, 지나치게 개인적인 것들을 털어놓는 것은 아닌지 쓰다가도 주저되는 면이 있었다. 그렇지만 우울증에 대한 인식이 높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을 전달해 보는 방향이라면, 찾아본 몇 가지 흥미로운 기사들부터 소개해 보려 번역을 해보고 있는 중이다. 물론 지난 한 달간 심적으로 둘 다 너무 소진된 상태였고, 무엇보다 짝꿍이 잘못될까 봐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으며, 여러 해결 방안들을 생각하고 그러느라 글을 쓰러 올 여유조차 없었다. 다음 주 중에 이사를 하고 좀 정리가 되면 조금씩 풀어내 볼 수 있도록 해보련다.
나는 우울증도 아니고, 그렇기에 우울증에 대해서 100% 이해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짝꿍이 겪는 감정들을 이렇게 바라봐야만 하는 것이 더 고통스럽다. 우울증을 겪고 있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우울증인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런 상황이 온 것에 누구의 잘못도 없다고, 부디 자책하지 말라고, 우리는 길을 찾을 거라고, 당신은 누군가에게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라고, 내가 이 작은 지지를 보낸다고 말해주고 싶다.
"Hang in there, please. You are the most important person in my life. We will find a way out. Hope I can help getting you out from there. I love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