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와 전략 사이, 그 흐릿한 경계에서
“이건 법무 일이 아닙니다.”
현업담당자가 법무팀에 요청을 하면 종종 듣게 되는 답변일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 가끔 그런 이런 요청을 받게 됩니다.
“이거 혹시 법무팀에서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들여다보면 ESG 보고서나 공시 문안, 사내규정정비, 또는 전략 보고서 작성처럼 얼핏 보기엔 법과 어느 정도 관련 있는 것 같지만,실질적으로는 사업 운영이나 실무 전략에 가까운 일들입니다.
그럴 때면 법무팀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논의가 시작됩니다.
“이건 우리가 맡아야 할 일일까?”
“법무는 어디까지를 책임져야 하는 걸까?”
그리고 저 역시, 그 경계에서 여러 번 멈칫거리게 됩니다. 이 일이 정말 제 일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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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문지기’였습니다
사내변호사의 전통적인 역할은 ‘Gatekeeper’, 말 그대로 문지기였습니다.
계약서의 위험한 조항을 걸러내고, 법에 저촉되는 표현을 정리하며, 사업 방향이 문제가 될 수 있다면 “이건 어렵습니다”라고 정리하는 역할입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 기대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사업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움직이는 역할이 중요해졌기 때문입니다.
즉, 사내변호사의 역할이 ‘리스크를 막아주는 사람’에서 ‘비즈니스 초기부터 함께 고민하는 파트너’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규 서비스를 준비하는 팀과 협업할 때 이제는 단순히 약관이나 개인정보 처리방침만 검토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익 모델 안에서 놓치기 쉬운 법적 이슈, 사용자 경험과 연결된 규제 리스크 등을 함께 고민하는 상황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금융 규제 측면에서 민감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조는 사용자 동의 절차가 명확하게 설계돼야 오해를 줄일 수 있어요.”
이처럼 사내변호사는 이제 비즈니스 파트너로서 회사의 일에 참여하고, 법이 허용하는 선 안에서 가능한 방향을 함께 설계하는 역할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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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제 일이 아닌 것 같아요”라는 말의 이면
물론 모든 요청을 다 수용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계약 검토, 자문, 분쟁 대응 등 사내변호사 본연의 업무만으로도 하루가 빠듯한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가끔은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법무의 공식적인 역할 범위를 벗어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고민이 생길 수 있습니다.
혹시, '이것이 내 일이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 순간, 새로운 기회를 놓치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회사가 찾고 있는 것은
단순히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요청 안에는
사내변호사가 기여할 수 있는 전문성과 신뢰가 내포돼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건 단순히 ‘법무가 아닌 일’이 아니라,
‘법무가 해줄 수 있는 또 하나의 방식’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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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가 흐릿해지는 시대, 그래서 더 중요한 ‘자기 정의’
최근에는 기술과 사업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사내변호사의 역할도 함께 변화하고 있습니다.
신규 서비스를 검토하다 보면 IT팀, 기획팀, 마케팅팀, 그리고 법무팀이 한자리에 모여 개인정보, 광고, 약관, 운영 정책을 동시에 논의하게 됩니다.
그런 회의를 마치고 나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법률 검토일까, 아니면 전략 자문일까?”
이처럼 업무의 경계가 흐릿해질수록,더 중요해지는 건 ‘스스로의 정의’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규제 리스크를 기반으로, 조직의 전략적 판단을 돕는 사람.”
이런 정의안에서는 낯선 요청이나 경계 모호한 업무 속에서도 혼란이 줄어듭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법무의 역할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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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변호사의 일, 그 경계를 다시 그려봅니다
사내변호사는 본질적으로 ‘법률 자문’을 수행하는 직군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시대에 따라, 조직에 따라, 그리고 개인의 방향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단순히 문서를 검토하거나 리스크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 안에서 ‘가능한 길’을 열어주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경계가 불분명한 시대일수록 내 역할을 다시 정의하고, 조직 안에서 의미 있는 기여를 만들어가는 일.
그것이 지금,
사내변호사에게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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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 예고
Ep. 17. 실무만 하다 보면, 기회는 사라진다
– 단기 성과를 넘어 전략의 자리로 옮겨가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