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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표현 Sep 19. 2021

구두 한 짝

동화 다시 쓰기 2 - 신데렐라

 아무도 없는 동아리실 구석에 명품 구두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퇴근하면서 유리창 너머로 봤던 구두였다. 유명 브랜드의 로고가 떡하니 박혀있는 검정 구두. 금색 장식과 매끄러운 가죽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런 구두를 신을 만한 사람은 우리 동아리에서 민지가 유일했다.

 민지는 곧 들어갈 영화를 준비하면서 진우가 새로 뽑은 부원이었다. 그는 민지를 뽑은 이유를 ‘딱 봐도 돈이 많아 보여서’라고 말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농담이라며 낄낄거렸다. 진우는 민지가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 것이 느껴져서 뽑았다고 했다. 하지만 민지를 처음 본 순간, 그의 농담이 어쩌면 사실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두르고 있는 옷, 신발, 가방, 악세서리들은 모두 내가 일하면서 보던 사람들이 입을 만한, 비싼 것들이었다.

 민지의 구두에 손을 댄 것은 구두에 붙어 있는 반창고 때문이었다. 분홍색 바탕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반창고가 검은색 구두와 대비되어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구두에 뭐가 붙어 있는 것 같아서 떼어주려는 의도로 신발을 들었다.

 구두를 손에 넣고 나니 신어보고 싶었다. 가격을 보고 언젠가는 꼭 신어보겠다고 다짐했었던 구두. 잠시 고민했지만 나는 민지의 구두를 한쪽만 신어보았다. 이른 시간이었고 아무도 동아리실에 들어오지 않을 테니, 제자리에만 돌려놓으면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문 앞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돌리며 내 모습을 살펴보았다. 구두는 조금 꽉 끼는 감이 있었지만 꽤 근사했다. 나도 명품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내 모습에 한껏 취해 있을 무렵, 진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젯밤, 자기 멋대로 전화를 끊어놓고 아침이 돼서야 전화하는 꼴이 괘씸했다. 아침부터 진우와 말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진우는 문자를 보냈다.

 ‘곧 동아리실 도착. 만나서 이야기하자.’

 멀찍이서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들렸다. 진우가 오기 전에 동아리실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민지의 구두를 신고 있는 나를 진우가 보면 이상하게 볼 것 같아 황급히 구두를 벗었다. 구두 한쪽을 겨우 벗고 있는데 발걸음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나는 놀라서 내가 신고 온 신발을 마구 꾸겨신은 후, 계단으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진우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가방 안에는 필기구, 전공책, 파우치만이 들어 있어야 했다. 가방에 민지의 구두가 들어 있으면 안 될 일이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살펴봐도 민지의 구두가 내 가방 안에 있었다. 게다가 구두 한 짝만 덩그러니. 구두에는 아까 붙여있던 반창고가 없었다. 넣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로 후다닥 넣었으니, 가방에 넣으면서 어딘가에 흘린 듯했다. 누군가 다른 구두 한 짝을 발견하기 전에 이것을 돌려놓아야 했다.

 겨울방학이라 동아리실을 찾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내 착각이었다. 내가 동아리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명품 구두 분실 사태로 소란스러웠다. 부원들은 소파, 책상 등 가리지 않고 구석구석 뒤지고 있었다. 몇몇은 민지를 위로하고 있었고, 진우는 명품 구두의 행방을 부원들에게 추궁하는 중이었다.

 “민지야, 마지막으로 신고 있던 게 언제라고?” 

 진우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아까 오전이요.”

 진우는 민지의 대답을 듣고 ‘꼭두새벽부터 동아리실은 왜 온거야’라고 중얼거렸다. 우두커니 서 있는 민지의 손에는 구두의 나머지 한 짝이 들려있었다. 구두 안쪽에 새겨진 명품 브랜드 로고가 형광등 불빛에 반짝거렸다. 구두 한 짝을 보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동아리실을 떠도는 먼지들이 코를 간지럽혀 기침이 났다. 내 인기척에 민지는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쳤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민지의 눈빛에 나는 괜히 더 콜록거렸다.

 텅-!

 한참 동안 진행됐던 구두 찾기가 일제히 멈췄다. 명품 구두가 쓰레기통에 버려진 순간이었다.

 “제가 물건을 잘 못 챙긴 건데 저 때문에 다들 피해를 보고 계시네요. 더 이상 안 찾아 주셔도 될 것 같아요. 제 일에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고 정말 죄송합니다.”

 환기를 위해 열어뒀던 창문에서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먼지를 밀어냈지만, 여전히 공기는 텁텁했다. 훌쩍거리는 소리와 헛기침 소리가 먼지들과 함께 떠다닐 뿐, 한참 동안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래, 이만큼 했으면 됐지. 다 함께 쓰는 공간이니까 다들 개인 물건 간수 잘하자. 자, 이제 오늘 하기로 한 회의 준비하자.”

 진우가 목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분주히 움직엿다. 애써 가라앉았던 먼지들이 다시 훌훌 날렸고, 민지의 손은 부채질하느라 바빴다. 

 나는 사물함에서 운동화를 꺼냈다. 진우가 내게 처음 선물해준 운동화. 고된 촬영이 있을 때 신을 만큼 편한 운동화. 처음에는 분명 브랜드 로고가 반짝거렸는데, 오래 신은 탓에 로고는 희미해져 있었고 그 자리에는 진흙이 잔뜩 덮여있었다. 산행길 촬영 때 묻은 것이었다. 나는 흙을 툴툴 털어 민지 쪽으로 신발을 던졌다.

 “이거 신고 가. 이 추운 날 슬리퍼 신고 집에 갈 수는 없잖아.”

 잠깐 망설이는 듯했으나 민지는 냉큼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민지는 생각보다 잘 맞는다며 보조개가 들어가도록 웃어 보였다. 고마워하는 그녀를 보며 안도감이 들었지만, 운동화를 내려보던 민지의 표정, 잠깐 있었던 미간의 찡그림, 그게 마음에 걸렸다.

 회의 중에도 내 신경은 온통 민지의 명품 구두에 향해 있었다. 진우의 말을 거의 듣지 못해 그가 눈치를 줄 정도였다.

 “오늘 원래 동아리실 청소하는 날인데, 아까 구두 찾느라 다들 고생했으니까 오늘은 간단히 쓰레기통만 비우자.”

 귀에 쓰레기통이라는 단어가 꽂히자마자 나는 내가 버리겠다며 손을 번쩍 들었다. 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진우가 쳐다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나는 쓰레기통에서 민지의 구두를 꺼낼 수 있었다. 쓰레기통에서 꺼낸 구두는 여전히 반짝거렸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신발장에 신문지를 깔고 민지의 구두를 올려놓았다. 오늘따라 샤워를 하는 데 발밑에 물이 내려가지 않고 고여 있었다. 배수구가 또 막힌 모양이었다. 뒤엉킨 머리카락만 있던 곳에 눈에 익은 물건이 있었다. 반창고였다.

 머리에 붙어 있었나? 아님 옷에? 민지가 봤을까? 내가 가져간 걸 알까? 들킨 거면 어쩌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그래서 구두를 버린 걸까? 그 비싼 구두를? 수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내가 반창고와 머리카락을 들어내자 막혀 있던 물이 내려갔다.

 겨울바람이 더 매서워졌다. 나는 취업특강을 듣는다는 핑계로 진우에게 이번 촬영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어째선지 진우도 쉽게 알겠다고 말했다. 민지를 피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들어온 동아리실 사물함 안에는 못 보던 상자 하나가 들어 있었다. 상자 안에는 깨끗하게 세탁된 운동화가 들어 있었다. 작은 카드도 함께 있었다.     

 ‘유진 언니! 운동화 빌려주셔서 고마워요. 신발이 없어서 곤란했는데 언니 덕에 살았네요. 감사하다는 의미로 밥 사고 싶은데, 언제 한번 연락 주세요! 

PS. 사물함 비밀번호는 진우 오빠가 알려줬어요.’     

 ‘민지가’라는 문구 옆에는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광택이 나는 리본으로 장식된 상자. 그리고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 로고가 다 지워진 싸구려 운동화. 나는 운동화를 꺼내 신고 다니던 구두를 갈아신었다. 불편했던 신발을 갈아신으니 발이 한결 편안했다. 그뿐이었다.     


⁕     


 신고 나온 운동화가 말썽이었다. 여기저기 뛰어다녀야 하는 영화제 특성상 움직임이 편해야 하는데 발을 내딛을 때마다 찌릿거렸다. 그리고 영화제에서 나를 불편하게 하는 건 운동화뿐만이 아니었다. 

 진우를 처음 봤을 때, 내 머릿속에는 ‘친해지면 피곤한 스타일’이라는 경고문이 떴다. 진우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가득했고 다른 팀 봉사자들과도 금방 술 약속을 잡았다. 그와 엮이면 그 무리에 껴서 어울려야 할 것 같은 분위기. 내가 딱 질색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진우를 은근하게 피해 다녔다. 덕분에 나는 아픈 발을 이끌고 먼 길을 돌아갔다.

 그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봉사는 야외극장에서 하는 업무였다. 뜨거운 여름 해를 피해 야외극장은 주로 밤에 영화 상영을 시작했었는데, 자정이 넘어 운영해서인지 야외극장은 관객이 많지 않았다. 늦은 시간까지 일한다는 사실이 피곤했지만 많은 사람과 엮이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무엇보다 가만히 서서 마음껏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았다.

 하필 그날 진우와 같은 팀이였다. 그의 조잘거림 때문에 편하게 영화 보기는 글렀구나 싶었다. 땀 때문에 머리카락이 목에 덕지덕지 붙었다. 속옷이 다 젖을 정도로 땀이 나는 날씨였다. 낮에 쏟아진 비 때문에 피부가 미끈거렸다.

 진우는 원래 배정받은 봉사자가 사정이 생겨 일을 못 하게 됐는데 자신이 자원해서 대신 일을 하겠다고 했다는 둥, 원래 하기로 한 봉사자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는 둥 정말 쉴새 없이 조잘거렸다.

 “이 시간에 공포 영화 괜찮으세요?”

 영화가 시작하자 진우는 내게 물었다.

 “괜찮아요.”

 “무서운 거 잘 보시나 보다. 그럼 이 영화 보신 적 있어요?”

 진우는 휴대폰을 나에게 내밀었다. 내가 본 영화였다.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

 “이 감독 영화 좋아해요.”

 “저도요! 기괴하긴 하지만 그 감독의 표현방식이 재밌더라고요.”

 같은 감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으로 시작된 대화는 대부분 진우가 이야기하고 내가 호응하는 정도였다. 우리의 대화는 2시간이 넘는 장편영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끝나지 않았다.

 다른 봉사자들이 야외극장 봉사를 싫어한 덕분에 나와 진우는 영화제 기간 동안 매일 야외극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쉴새없이 떠들었다. 영화로 시작한 대화는 개인적인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진우와 나는 서로의 맛집들을 공유하며 언젠가 같이 가자고 약속했다. 시끄럽다고 생각했던 매미 울음소리가 어느샌가 감미롭게 들렸고, 나는 진우에 관한 여러 경고문의 엑스 표를 눌러 그것들을 모조리 닫았다.

 영화제는 막을 내렸지만, 우리의 관계는 이제 막을 올리기 시작했다. 진우와 나는 만날 때마다 영화를 봤다. 진우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면, 다음에는 내 취향의 영화를 봤다. 진우가 영화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하면 나는 가볍게 호응했다. 그러다 내가 내 생각을 이야기하면 진우의 목소리는 신난 아이같이 변했다.

 “동아리 재밌어?”

 언젠가 밥을 먹고 나서 내가 물었다.

 “난 영화 보는 것보다 만드는 게 더 재밌어.”

 진우는 영화를 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뛰게 만든다고 말했다.

 “누나는 영화 만드는 거 어떻게 생각해? 영화 좋아하잖아. 우리 같이 영화 만들자. 어때? 응?”

 언젠가는 꼭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나와 함께 만들어보고 싶다고 말하는 진우의 눈은 꼭 영사기 같았다. 그의 영사기가 앞으로 어떻게 반짝거릴지, 나 같은 사람도 그처럼 반짝거릴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그날 반짝거리는 것에 홀려 영화 동아리에 가입했다. 내 눈에 테이프가 끼워졌다. 테이프가 돌아가면서 소리를 냈다.

 매미 대신 귀뚜라미가 밤공기를 채우기 시작할 때쯤, 진우는 나에게 운동화를 선물했다. 전에도 진우는 자잘한 선물들을 많이 줬었지만, 각이 진 박스에 담아 ‘선물’이라고 티를 팍팍 내는 걸 내민 것은 처음이었다.

 “운동화네?”

 “지난번에 보니까 신발이 불편해 보여서 하나 샀어. 여름에 우리 같이 봉사했을 때 그때 봤지.”

 진우는 동아리 가입 선물이라고, 때가 타도 티가 안 나는 검은 운동화가 최고라는 말도 덧붙였다.

 나와 운동화는 무거운 카메라를 든 채로 눈 오는 오르막길을 걸었고, 배우 머리카락에 앉은 벚꽃잎을 떼어주기 위해 군중 사이를 뛰었다. 계곡 바위에서 조명을 잡고 있다가 쏟아지는 장맛비에 젖기도 했고, 소품이 될 은행잎을 줍기 위해 낙엽들을 비비적거리기도 했다. 편집실에서 영상을 편집하는 나와 함께 늦은 밤까지 작은 난로를 쬐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바쁜 나날 중 틈이 나면 시나리오를 썼다. 강의가 일찍 끝나면 강의실에 남아 시나리오를 썼다. 혼자 밥 먹을 때는 입을 오물거리며 노트에 대사를 적었다. 시간을 내어 진우와 서로의 시나리오를 봐주기도 했다. 내 영사기가 어느 때보다 반짝거리던 순간이었다.

 운동화를 신지 않을 때는 주로 구두를 신었다. 5cm 굽을 가진, 무늬가 없는 검은색 구두. 편하다고 해서 산 것이었지만, 구두는 여전히 불편했다. 구두를 신고 하루 종일 서 있어야 하는 백화점은 더운 날 추웠고, 추운 날 더운 곳이었다. 내가 일하던 라운지는 백화점 우수고객에 맞는 온도를 제공해야 했기에 내 의지로 온도를 조절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일이 덜 바쁠 때는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라운지에 방문한 사람들을 관찰했다. 이곳에서 커피를 마실 정도 되는 사람들은 어떤 것을 입고, 걸치는지 궁금했다. 티가 나면 안 됐기에 한 곳에 시선을 오래 두지는 않았다.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는 인터넷으로 그들의 명품을 검색해보곤 했다. 가끔 살만하다고 생각되는 가격의 명품을 발견하면 내 잔고를 살폈다. 비슷하다 생각했는데 숫자 뒤에 붙는 0의 개수가 달랐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언젠가 영화감독으로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 거라고, 부자가 될 거라고, 떵떵거리면서 살 거라고 다짐했다. 구두 속 발은 퉁퉁 부어있었다. 발이 너무 아팠다.

 집에 도착하면 상처 난 발에 반창고를 붙였다. 좁은 구두 안에서 발은 온종일 움츠리고 있었다. 오늘은 유독 아프더니 새끼발톱이 옆에 있는 발가락 살을 파고 들어 상처를 냈다. 구두에서는 고단한 냄새가 났다. 구두가 덜 조이도록 힘을 주어 볼을 늘려보았지만, 구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늘어나지 않는 구두를 신발장에 넣어버리고 진우가 선물한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그리고 진우가 있는 동아리실로 향했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신발장을 열어 구두가 잘 있는지 확인했다. 하. 저 구두를 볼 때마다 한숨만 나왔다. 그날은 신어보기까지 했으면서 그 뒤에는 손도 댈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운동화의 얼룩에 시선이 갔다. 민지의 구두가 닿지 않게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도서관의 공기가 숨이 막히도록 답답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는 게 힘들었고, 기업의 톱니바퀴가 되기 위한 공부가 하기 싫었다. ‘노력’을 운운하는 강사의 말이 지겨웠다. 듣고 있던 취업특강을 끄자 수정하던 글이 나왔다. 나의 이야기지만 나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 나의 삶을 시장의 입맛에 맞게 쓴 글.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조언한 대로 글을 수정했지만 어째선지 사회는 나를 사용하지 않았다. 노트북을 오래 보고 있어서인지 눈이 피곤했다. 나는 손으로 눈을 마사지했다. 창밖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 야외촬영이 있다고 들었는데. 나는 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촬영 잘하고 있어?”

 “지금 잠깐 쉬는 중. 누나는 도서관?”

 “응. 내일 서류 마감이라. 추운데 고생이 많네. 학교에서 찍는다고 했나?”

 멀리서 진우를 찾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어. 나 지금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 이따 전화할게.”

 나는 카페에 들려 진우가 좋아하는 커피를 샀다. 커피가 식지 않도록 발을 빠르게 옮겨 진우가 촬영하는 곳으로 향했다. 진우만 커피를 주는 것이 눈치가 보여 나는 멀찍이서 촬영을 구경했다. 진우는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모든 이들이 숨죽인 채 한 사람을 위해 힘쓰고 있었다. 민지였다. 배우 섭외가 힘들다고 하더니 결국 동아리 내에서 해결한 모양이었다. 대사를 하는 민지의 눈이 반짝거렸다. 곧 눈물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민지의 말이 입김과 함께 사라지자 진우의 컷 사인이 떨어졌다. 민지가 모니터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발을 동동거렸다. 진우가 민지에게 말을 건내자 민지가 웃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조금만 쉬고 한 번 더 가자!”

 진우가 크게 소리치자 민지가 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고는 다시 벤치에 앉았다. 촬영장을 진두지휘하는 진우가 있는 곳은 너무 멀었고,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괜히 말을 시키면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나는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전하지 못한 라떼가 점점 식어갔다. 어느 샌가 눈이 그쳤다. 차도 주변에 쌓인 눈은 검게 변해있었다. 나는 그 눈을 밟았다. 질척거렸다. 민지가 돌려준 운동화가 다시 더러워져 있었다.

 똑똑. 누군가 카운터 책상을 두드렸다. 진한 향수 냄새가 나를 덮쳤다. 

 “언니!”

 민지였다.

 “어... 안녕, 민지야.”

 “언니, 왜 연락 안 주셨어요. 저 기다렸는데.”

 민지의 눈썹이 한껏 내려가 있었다.

 “요즘 바빴어. 미안.”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만났으니까. 근데 언니, 도서관에서 일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멋쩍게 웃었다.

 “언니 저녁 먹었어요? 저녁 약속 없으면 저랑 같이 밥 먹으러 가요!”

 “나 1시간은 더 있어야 돼.”

 “그럼 기다릴게요. 저 어차피 대본도 외워야 하거든요.”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민지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쳐다봤다.

 “...그래, 그럼.”

 민지는 카운터 주변 소파에 앉아 나를 기다렸다. 민지는 손을 비비며 대본을 넘겼다. 아까 히터를 껐더니 추운 모양이었다. 나는 꺼뒀던 히터를 다시 틀었다. 도서관에 따뜻한 바람이 다시 불었다.

 나와 민지는 저녁 메뉴로 초밥을 골랐다. 민지는 다가오는 종업원에게 회 정식에 우동을 추가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곤 나에게 ‘괜찮죠?’라고 물었다. 둘이서 먹기에는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은 어때? 재밌어?”

 “네! 재밌어요! 아, 근데 오늘 너무 추운 거 있죠? 하루 종일 추위에 떨었더니 손발이 깨지는 줄 알았다니까요.”

 민지가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손으로 감쌌다.

 “오늘 저 칭찬 받았어요! 연기 잘한다고. 진우 오빠한테.”

 “아, 정말? 진우 칭찬 잘 안 하는데 진짜 잘했나보다.”

 민지는 진우가 어떤 부분이 좋다고 했는지, 어느 부분을 지적했는지 나에게 설명했다. 민지는 진우가 쓴 캐릭터가 너무 마음에 든다며 오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에서 칭찬을 받아 기쁘다고 덧붙였다. 말을 와다다 쏟아 내는 민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시나리오 읽어봤는데 네 이미지랑도 잘 어울리더라. 너한테 풋풋한 신입생 느낌 나니까. 진우가 배우를 참 잘 골랐어.”

 “어? 대학생 아닌데? 제가 맡은 건 고등학생이에요.”

 민지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까 눈물을 머금었던 그 눈이었다.

 “아니라고?”

 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멍하니 접시에 덜어둔 우동면을 잘랐다.

 “내가 착각했나봐. 진우가 시나리오를 여러 개 보내줬거든.”

 거짓말이었다. 진우가 보낸 시나리오는 하나였다. 진우가 읽어 봐달라고 해서 읽고 간단한 피드백도 했었다. 내가 착각했을 리가 없다. 시나리오를 갈아엎었나? 처음부터 다시 쓰기에는 시간이 촉박했을 텐데. 설정만 바꾼 건가? 진우가 준 시나리오 속 상황들은 설정만 바꾼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예전에 써둔 시나리오인가? 나랑 항상 시나리오 공유했었는데.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한참이나 이어졌다. 내가 고민하는 사이 접시 위 우동 면은 짧게 토막나 있었다. 그 뒤로 나와 민지는 대화 대신 먹는 것에 집중했다. 정식답게 음식은 계속해서 나왔고 우리가 앉은 상을 가득 채웠다. 나는 열심히 젓가락을 놀려 음식을 집어 먹었다. 역시 둘이 먹기엔 많은 양이었다. 속이 좋지 않았다.

 “잘 먹었어, 민지야. 커피라도 마실래?”

 “어쩌죠. 방금 촬영 뒤풀이한다고 오라고 연락 와서요.”

 “아, 그래?”

 “언니, 뒤풀이 같이 안 갈래요? 지금 동아리 사람들 다 있대요. 진우 오빠도 있고.”

 “아냐, 됐어. 나는 괜찮아. 나는 촬영에도 참여 안 했는걸. 그럼 나중에 연락해.”

 민지는 다음에 보자며 신나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민지에게 손을 흔들다 발걸음을 옮겼다. 민지는 술집이 줄줄이 있는 번화가로 나는 자취방이 있는 주택가로. 해가 져버린 골목길은 낮에 내린 눈 때문에 꽝꽝 얼어있었다. 나는 빙판 위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운동화에 찬기가 스며들었다.     


     

 아침부터 장맛비가 쏟아진 덕분에 걸을 때마다 운동화에서 물소리가 났다. 나오기 직전에 구두 대신 운동화로 갈아신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우는 쓰고 온 모자를 벗어 머리를 식혔다. 지난번 봤을 때보다 머리가 많이 자랐지만, 여전히 앞머리는 그의 눈썹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짧았다.

 “요즘 쓴 것 좀 보여줘 봐. 나 누나가 쓴 글 보고 싶어.”

 장난스러운 말투. 진우가 어깨를 살짝 올리며 기도하듯 양손을 잡았다. 내가 웃어야 하는 타이밍에 웃지 않자 진우의 두꺼운 눈썹이 씰룩거렸다.

 “사실 나 글 안 쓴지 좀 됐어.”

 “엥? 얼마 전까지 시나리오 쓰고 있다고 했잖아.”

 그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어려있었다. 나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서 입술만 들썩거렸다.

 “그럼 언제부터 안 쓴 거야. 설마 나 입대하고 한 번도 안 썼어? 아예? 하나도?”

 진우가 입대하면서 우리는 예전처럼 얼굴을 자주 보지 못했고 덕분에 누군가 거짓말을 해도 들킬 염려가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점을 이용해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진우에게 한 거짓말은 딱 하나. 꾸준히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 말한 것 뿐이었다.

 아예 안 쓴 것은 아니라고 말할까 잠시 생각했지만, 그럼 진우는 그거라도 보여 달라할 것이었다. 그럼 나는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겠지.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눈을 아래로 깔았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진우는 글을 쓰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라며 나를 다그쳤다.

 “그냥... 쓰고 싶은 이야기도 없고... 그리고...”

 “그리고?”

 “여유가 없었어.”

 “여유? 요즘 뭐 하는데?”

 내 일상은 진우가 모두 알고 있는 게 다였다. 오전에는 대학교 도서관에서 근로했고, 밤에는 치킨 집에서 일했다. 주말에는 백화점에 출근했다. 장맛비가 한창일 때는 여름 계절 학기를 들었고,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될 때쯤에는 종로에 있는 토익학원을 등록할 예정이었다.

 진우가 모르는 것도 있었다. 도서관에서 교수와 실랑이를 하다 교직원에게 호되게 혼이 난 것, 치킨을 튀기다 튄 기름이 팔에 상처를 남긴 것, 백화점 에어컨 바람이 너무 추워서 몸이 달달 떨릴 정도라는 것, 장맛비에 젖은 양말을 신은 채로 토익 문제를 풀어야 했던 것, 비싼 돈 주고 학원을 다녀도 점수가 제자리였던 것.

 “알잖아. 나 바쁜 거.”

 “알지. 아주 잘 알지. 근데 누나 그렇게 바빠도 어떻게든 시간 내서 쓰던 사람이었잖아.”

 “내가 글 안 쓴다고 너한테 혼나야 하니?”

 “꼬아서 듣지 좀 마. 그냥 물어보는 거잖아.”

 “그래서 말했잖아. 바빴다고. 글 쓸 시간을 못 낼만큼. 정신없이.”

 진우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에어컨의 찬바람이 목 뒤를 훑었다. 

 “아니, 그리고 내가 시나리오나 쓰면서 있을 처지야? 나는 너처럼 태평하게 꿈만 꾸면서 살 수가 없어. 시나리오가 아니라 자기소개서 같은 글을 써야 하는 시기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리고 뭐가 그렇게 급한데? 누나 아직 어려. 청춘이라고 청춘. 잠깐 꿈 좀 꾼다고 누가 잡아가?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한 거 아니잖아. 남들 하는 거 적당히 다 했잖아. 그럼 남은 시간에는 다른 거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어, 아니야. 네가 군대에 있으니까 잘 모르는 가 본데, 우리 이제는 먹고 살길 찾아야 해.”

 내가 비아냥거리자 진우는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노려봤다.

 “아,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겠네. 내 꿈은 회사에 취직해서 별 탈 없이 남들처럼 사는 거야. 됐니?”

 하. 진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너도 이제 정신 차리고 남들처럼 살아.”

 나는 말을 내뱉고 아차 싶어 황급히 진우의 표정을 살폈다. 진우는 입을 살짝 벌린 채 그저 나를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 깔고 양손으로 눈썹을 비볐다. 진우가 화가 나면 하는 습관 중 하나였다.

 내가 한 말은 진우가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었다. 그는 영화를 위해, 그러니까 자신의 꿈을 위해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았다. 진우는 사회가 만들어 둔 시간표에 맞춰 살지 않겠다며 입대를 계속해서 미뤘다. 그리고는 돌연 휴학을 선언했다. 진우는 학교라는 우물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공부했다. 짧은 시간 안에 자격증을 취득하게 해준다는 일타강사에게 수업을 듣는 대신 현직에서 일하고 있는 영화감독들의 수업을 찾아 들었다. 남들은 어학연수를 위해 찾는 나라를 다른 나라의 영화 현장을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행하기도 했다. 남들이 그에게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 평범하게 살라는 사람에게 진우는 ‘내 마음이고, 내 인생이다. 상관하지 말아라.’라고 당차게 말했다.

 나도 한때 진우의 말을 믿었다. 20대. 우리는 아직 젊었다. 어리니까 하고 싶은 걸 해도 된다고. 나도 그렇게 믿었기에 글을 썼고, 영화를 찍었다. 시나리오 공모전에 도전했고, 비록 작은 극장이었지만 내가 만든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진우와 함께 꿈을 꾸는 모습이 좋았다. 나도 꿈이라는 걸 꿔도 되는 사람이구나. 하면 할 수도 있겠구나. 나도 감독 같은 걸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들 배고픈 직업이라고 하지만 열심히 하다 보면 누군가가 내 노력을 알아줄 거야. 그럼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겠지. 먹고 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엄청난 사람이 될 줄 누가 알아. 힘든 건 과정의 일부일 뿐이야.

 하지만 또래 친구들은 나처럼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았다. 해야 하는 것들을 했다.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동아리 활동을 했고, 자격증을 땄다. 알고 지내던 동기들이 하나둘씩 인턴으로 일을 하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학교를 떠났다. 진우도 군대에 가면서 나 혼자 남게 되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건 나 혼자였다.

 “그래, 못 쓸 수 있다 치자. 그럼 나한테 못 썼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될 걸, 거짓말은 왜 한 거야?”

 처음부터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군대에서 뭘 하지 못하니 답답하다며 속상해하는 진우에게 나는 부원들이 만든 영화와 부원들의 사진들을 보내줬다. 진우는 언제나처럼 어떤 것이 좋았고 아쉬웠는지, 자신이 만들었다면 어떻게 만들었을지 줄줄이 읊었다. 그러다 진우는 말했다. 빨리 나가서 나와 함께하고 싶다고, 내가 쓴 글들을 보고 싶다고, 같은 목표를 가진 서로를 응원하고 싶다고. 진우의 말에 나는 이제 그럴 수 없다고 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같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말한 진우는 뭐라도 해야 겠다 했고, 나는 지지 않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나는 솔직해질 수 없었다. 진우에게도,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우리는 한참 실랑이를 이어가다 내가 거짓말한 것에 대해 사과하면서 싸움은 일단락됐다. 진우와 난 예전처럼 함께 영화를 봤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영화를 본 후 신나게 떠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타야 할 열차가 도착할 쯤, 진우가 할 말이 있는지 입을 우물거렸다.

 “뭐 할 말 있어?”

 진우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무슨 말들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진우의 말은 달려오는 지하철 소리에 묻혀 내게 닿지 않았다. 날 보는 진우의 눈은 여전히 반짝거렸다. 너의 영사기는 아직도 돌아가는 중이구나.

 축축한 운동화를 아무렇게나 놓고는 바로 샤워를 했다.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아까 공책에 표시한 것들을 참고해 자기소개서를 고쳐나갔다. 말리지 않은 머리에서 물이 떨어져 자국이 생겼다. 나는 휴지를 뽑아 종이를 벅벅 문댔다. 종이가 울었다.

 거짓말로 가득한 글을 닫아버리고 영화 파일을 열었다. 가장 눈물이 났던 영화를 골라 틀었다. 진우는 그냥 신파일 뿐이라고 혹평했고, 나는 감정에 충실한 것이라고 말했던 작품이었다. 어김없이 슬픈 장면이 나왔다. 주인공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눈을 꾹꾹 눌렀다. 울음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무언가를 잃은 자의 울음소리였다.     


⁕     


 “발 안 시려워?”

 “뛰어와서 괜찮아.”

 그리곤 진우는 내게 사과했다. 자기 꼴이 말이 아니라고. 헝클어진 머리. 뿌옇게 얼룩이 진 안경. 대충 입은 옷. 맨발로 신고 있는 슬리퍼. 진우는 패딩을 벗어 킁킁거렸다. 진우의 눈밑이 검었다. 동아리실에서 밤을 지새운 모양이었다.

 “아, 오늘도 예쁘네. 나 이러면 또 반한다니까?”

 진우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가 웃지 않자 진우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오늘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오늘처럼 면접을 보고 나서는 꼭 진우를 만났다. 깔끔한 머리. 단정한 정장. 앞날이 뾰족한 구두. 과하지 않도록 향수도 뿌렸다.

 “너나 나나 둘 다 피곤하니까 그냥 본론부터 말할게.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없어?”

 “숨기는 거? 에이. 내가 숨길 게 뭐 있어.”

 “시나리오.”

 “어?”

 “너 지금 촬영하고 있는 거. 나한테 보여준 시나리오랑 다르잖아. 아니야?”

 긴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입을 뗀 건 진우였다.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왜 그랬어?”

 “근데 똑같지는 않아. 대사도 고치고 설정도 수정했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왜 다른 시나리오를 보여준 거냐고, 왜 거짓말을 한 거냐고 물어본 건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일단 진우의 말을 기다렸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어...누나 아이디어 내가 써서 화내는 거 아니야?”

 진우의 하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너 설마.”

 불현듯 이야기 하나가 떠올랐다. 그걸 보여줬을 때 진우는 너무 좋다고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 생각해보니 내 시나리오 속 주인공은 민지가 설명한 캐릭터와 흡사했다. 심지어 전체적인 내용도.

 “똑같지는 않아. 그냥 누나 아이디어만 살짝 쓴 거야. 스토리 라인이랑 콘티같은 것도 내가 다 새로 만들었어.”

 “내 시나리오를 훔쳐갔다고.”

 “아냐야냐. 아이디어만 살짝, 아주 살짝 사용한 거라니까? 말도 안 하고 그런 건 진짜 미안. 누나 바빠서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어. 어차피 누나는 영화 만들 생각 없다며. 썩히긴 아깝잖아. 그래서 내가 좀 썼어. 시나리오 볼래? 파일 가지고 있거든. 진짜 하나도 안 비슷해. 살짝 인용한 정도야. 진짜로.”

 진우의 변명이 이어졌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디어를 훔쳐갔으니 화를 내야 했다.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왜 이렇게 당당하냐고 소리쳐야 했다. 나는 그저 멍하니 눈만 꿈뻑거렸다. 진우도 본 건가. 내 망가진 영사기를.

 “...우리 시간을 좀 가지자. 나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진우가 나에게 뭐라고 소리치는 듯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또각또각또각… 구두가 내는 소리만이 귓가를 울렸다.

 그렇게 일주일, 진우의 빈자리는 민지가 채웠다. 민지는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더니 기어이 나와 매번 같이 밥을 먹었다. 식사 후에 민지는 대본을 외웠고, 나는 자기소개서를 수정했다. 민지와 그렇게 매일 붙어 다녔다. 머리를 아프게 했던 민지의 향수 냄새가 익숙해질 때쯤 민지는 나에게 말을 완전히 놓았다.

 한 차례 눈이 오고 난 후, 날이 좀 풀리는 가 싶더니 오늘 또다시 눈이 내렸다. 눈은 곧 얼음이 되어 인적이 드문 길가를 빙판길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눈은 민지의 구두 굽이 완전히 부러질 정도로 민지를 넘어지게 했다. 내가 민지에게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굽이 있는 구두는 더 미끄럽다고 주의를 준 직후였다.

 “웃기다. 길에서 완전히 꽈당!”

 “넌 지금 웃음이 나오냐. 더 다친 곳은 없지?”

 민지의 무릎에 반창고를 붙여주고, 발목에 파스를 붙여주며 말했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보며 까르르 웃어댔다.

 “근데 너 저 구두 부러져서 어떡해? 비싼 거 아니야?”

 “맞아. 엄청 비싼 거야.”

 민지가 킥킥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도 민지를 따라 웃었지만, 민지처럼 해맑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내 거 빌려줄 테니까. 신고 가.”

 “언니, 그냥 나 여기서 자고 가면 안돼? 발목 아파서 못 걷겠단 말이야.”

 민지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거절하려는 찰나 민지는 기도하듯 손을 모아 잡으며 말을 덧붙였다.

 “언니, 제발. 나 진짜 아파서 그래. 응? 가뜩이나 밤눈도 어두운데, 나 또 넘어지면 어떡해. 이번에 넘어지면 진짜 골로 갈지도 몰라. 그리고 나 내일 촬영 아침 일찍 있어서 몇 시간 뒤에 또 학교 와야 한단 말이야. 응? 제발.”

 민지와 내가 잠을 같이 잘 정도로 친한 사이였던가를 고민하다가 불현듯 신발장에 넣어둔 민지의 구두가 생각이 났다. 나는 민지의 무릎에 붙인 반창고를 응시했다. 반창고에 비치는 피자국이 더 커져 있었다.

 “하루만이다?”

 민지는 기쁘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내가 옆집에 들릴 수 있다고 주의를 주자 민지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기쁜 듯 몸을 좌우로 흔들었다. 민지는 내가 갈아입을 옷을 줬을 때도, 새로운 칫솔을 꺼내줬을 때도 춤을 추듯 반응했다.

 “나 다른 사람 집에서 이렇게 편한 옷 입고, 노는 거 처음이다? 친구랑 같이 잠을 자는 것도 처음이야.”

 깜깜한 어둠 속에서 민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친구? 야, 나 너보다 나이 많거든?”

 “내 비밀 하나 말했으니까, 언니도 하나 말해줘. 솔직하게. 나한테만 말하고 싶은 비밀 같은 거.”

 민지의 말을 듣자마자 ‘네 구두 저기 저 신발장에 있어’라고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는 꺼낼 수가 없었다.

 “뭐 진우 오빠와의 러브스토리라던가. 뭐 그런 것도 재밌을 것 같아.”

 “비밀이라... 음... 지금 진우랑 일주일 동안 안 보고 있어.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아마 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내가 말하자마자 민지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왜?”

 “일이 있었어.”

 “무슨 일?”

 “비밀이야.”

 “뭐야 말해줘!”

 민지는 말해달라고 고집을 부리며 누워있는 나를 마구 흔들었다.

 “아, 알았어. 말해줄게. 진우가 나한테 잘못을 좀 했어.”

 “세상에.”

 “내 걸 훔쳐갔어. 거짓말도 하고.”

 “비싼 거야?”

 “값을 매길 수는 없어서 비싸다고는 못하겠네.”

 “그럼 소중한 거? 중요한 거?”

 나는 대답하지 않고 이불을 코까지 치켜올렸다.

 “그럼 어쩔 거야? 다시 돌려달라고 안 해?”

 “글쎄. 잘 모르겠어.”

 “그럼 내가 손 봐줄까? 내일 중간점검 겸 회의 있거든. 내가 할게. 복수.”

 “뭐, 촬영 못하겠다고 선언이라도 하게?”

 “비밀! 내일 보면 알 거야.”

 “됐다, 됐어. 잠이나 자.”


⁕     


 아침에 일어났을 때, 민지는 없고 메모만이 남아있었다. 자신이 어떤 복수를 할지 궁금하면 동아리실로 오라고 써있었다. 민지가 말한 ‘복수’가 무엇인지는 동아리실에 가자마자 알 수 있었다. 민지는 울고 있었고, 진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기가 그런 게 아니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머지 부원들은 진우와 민지를 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민지야, 나 아니야. 진짜 아니야! 나 아니라고!”

 “뭐가 아니라는 거예요? 증거도 나왔잖아요!”

 민지가 진우의 사물함을 가르치며 소리쳤다. 그곳에는 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민지의 구두였다. 우리 집 신발장에 들어 있어야 할 그 구두. 손이 덜덜 떨렸다. 저게 왜 저기에 있지?

 “나도 저게 왜 들어 있는지 모른다니까?”

 “훔쳐 갔으니까 들어있는 거겠죠!”

 진우는 계속 자기가 아니라고 소리쳤고, 민지는 구두를 사물함에서 꺼내 양손에 들었다. 민지가 구두에 발을 넣자 구두가 꼭 맞아 들었다. 누가 봐도 민지의 것이었다. 그걸 본 다른 부원들도 진우를 민지의 구두를 훔쳐 간 도둑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한 부원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진우오빠랑 더 이상 같이 못해요. 도둑이랑 어떻게 같이 일을 해요?”

 “민지야,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됐어요. 저 안 해요. 알아서들 하세요.”

 민지가 구두를 챙겨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내가 가서 이야기해볼게. 너는 여기 있어.”

 나는 민지를 쫓아가려는 진우에게 말하고 급히 민지를 따라갔다.

 “민지야!”

 민지가 나를 돌아봤다.

 “나랑 이야기 좀 해.”

 “그래. 근데 자리 좀 옮기자. 아마 여기서 하기에는 꺼림직한 이야기니까.”

 차가운 민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심장이 더 세게 뛰었다. 쿵광거리는 심장소리와 민지의 구두 소리가 머릿속을 휘 져었다. 나는 앞장서는 민지를 따라가며 손톱을 뜯었다.

 “그 구두가 왜 거기 있어? 진짜 진우가 훔친 거야?”

 “당연히 아니지. 누가 훔친 지는 언니가 더 잘 알지 않아?”

 다리가 덜덜 떨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시치미 그만 떼. 저 구두 오늘 아침에 언니네 집 신발장에서 가져온 거야.”

 민지가 알고 있었다. 내가 구두를 가져갔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언니가 훔쳐간 사람이라는 거.”

 대체 언제 들킨 거지? 그날 내가 동아리실 들어간 거 본 사람도 없는데. 구두에 대해서는 진우한테도 말 안 했는데. 어떻게 안거지?

 “그날 언니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반창고 보고 바로 알았어.”

 “그럼 왜...”

 “왜 말 안했냐고? 그냥 내 구두를 훔쳐 간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 궁금해서. 언니랑 친해지고 나서는 언니가 말해주길 바랐어. 솔직하게. 근데 언니 끝까지 말 안 하더라. 말할 수 있었잖아. 내가 어제 말하라고 판도 깔아줬잖아. 왜 말 안 했어? 대답해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민지가 가져온 구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탁탁탁.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지가 구두를 들어 소리를 내었다. 

 고개를 푹 숙이자 발이 보였다. 나는 아무것도 신지 않고 있었다. 운동화를 신을 정신도 없이 급하게 뛰어나왔으니까. 아, 운동화가 아니었나. 오늘 신고 온 건 구두였나.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찬 기운이 내 발을 감쌌다. 발이 무척 시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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