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표현 Aug 14. 2021

목소리

동화 다시 쓰기 1 - 인어공주

1.

 마렌을 다시 만난 건 사고 이후 9년 만이었다. 수조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마렌을 소년은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았다. 가끔 연구를 위해 사용될 뿐 몇 년이나 비어 있었던 수조였는데, 무언가 헤엄치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수조 안을 유영하는 마렌의 모습을 보고 알았다. 소년은 확신했다. 저 돌고래가 마렌이라는 것을. 마렌의 등에 있는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물방울 모양의 화상 자국. 꼭 얼마 안 된 상처 같았다.

 “다시 만난 소감이 어때?”

 여자가 소년에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소년이 버튼을 누르자 해석기에서 음성이 송출되었다. 여자는 많은 자료들을 통해 저 돌고래가 마렌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소년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해석기는 문장이 복잡할수록 오류가 생겼다. 그 오류를 다잡기 위해 또 설명을 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또 오류가 발생하고. 오류가 발생하는 것 같으면 여자는 해석기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소년의 침묵 덕인지 해석기를 교체한 지 2년이 넘어갔다. 그래서 심각한 오해가 아니면 소년은 최대한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그거 마렌도 하게 될 거야.”

 소년이 손가락으로 목에 있는 해석기를 가리켰다. 그리곤 ‘이거요?’라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그래. 그거! 해석기! 마렌도 이제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해석기만 있으면 너랑 마렌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인어공주에게 목소리를! 기대되지 않니?”

 여자는 두 손을 모아 쥐며 낭만적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여자가 눈짓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무언가를 적었다. 여자가 소년에게 마렌과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소식을 전할 때도, 소년이 여자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도 남자는 조용히 서서 여자의 말을 기록했다. 여자가 소년을 만날 땐 항상 남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여자의 말에 대꾸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소년은 남자도 자신과 같이 해석기가 필요한 사람인 줄 알았다. 그래서 어릴 때는 말을 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2.

 소년이 남자의 목소리를 들은 건 소년이 막 12살이 되었을 때쯤이었다. 그때 이 연구소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년은 모든 게 낯설고 신기했다. 이곳저곳을 쏘다니던 소년은 남자를 발견했다. 옆에는 여자도 함께 있었다.

 “대표님, 이건 아닌 것 같아요.”

 남자가 같은 말만 반복해서 소년은 그의 해석기가 고장 난 줄만 알았다. 그가 여자를 향해 소리치는 것을 보고 그의 목소리는 해석기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조용히 안 해? 뭐가 아닌데? 내가 지난번에도 말했지. 이건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잘하다가 갑자기 왜 이래? 너 혹시 누구 만났니?”

 “그런 거 아니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그래도 이건….”

 “아무 문제없어.”

 단호한 여자의 목소리. 남자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여자는 자신들을 보고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그녀는 굳어 있는 표정을 풀고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몸은 괜찮냐고. 불편한 것은 없냐고. 아까와는 사뭇 다른,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듯 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년은 궁금한 게 많아 이것저것 말을 해보려 해 봤지만, 해석기가 말을 듣지 않았다. 기계는 엉뚱한 말을 내보냈다.

 “어떤 거예요?”

 “응? 음, 혹시 방으로 돌아가는 길 말하는 거니? 같이 가줄게.”

 자, 어서 가자. 여자가 소년의 손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그땐 여자보다 몸집이 작아 쉽게 이끌렸다. 소년은 뒤를 돌아보며 남자의 모습을 살폈다.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그 뒤로 한참을 남자와 대화할 수 없었다. 여자 없이는 남자를 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남자의 목소리를 처음 듣고 아마도 2년쯤 지난 어느 날, 소년은 혼자서 빈 수조를 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소년이 그에게 가장 먼저 물어본 것은 이름도, 나이도 아닌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것이냐는 것이었다. 남자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자신을 ‘기록하는 자’ 일뿐이라고 설명했다.

 “어떤 걸요?”

 “너에 대한 것.”

 “대표님 말을 기록하는 거잖아요.”

 “그분 입에서 나오는 게 다 너에 관한 거야.”

 “거짓말.”

 소년은 해석기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고는 손을 흠칫 떨었다.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을 또 해석기에서 손을 떼지 않아 밖으로 송출되고만 것이다. 해석기를 사용한 지 3년이 다 되어 갔지만 손에 익지 않은 탓이었다.

 “그럼 그분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아요?”

 “너는 대표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를 구해준 분이잖아요. 모든 걸 잃은 저에게 모든 걸 준 사람. 고마운 분이죠.”

 남자는 소년의 음성을 듣고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했다. 남자의 발걸음이 어떤 문 앞에서 멈췄다. 남자가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 그냥 평범한 사무실이었다. 조금 특이한 것은 한쪽 벽에는 검은색 파일들이, 반대쪽 벽에는 노란색 파일들이 꽂혀 있다는 것이었다. 검은색 파일은 모두 짝수가, 노란색 파일에는 모두 홀수가 적혀 있었다. 남자는 검은색 파일이 보관되어 있는 책장에서 가장 맨 처음에 위치한 것과 그 옆에 위치한 파일을 꺼냈다. 반대편 책장 앞에서 남자는 조금은 오래 서 있었다. 그의 손이 맨 앞에 있는 파일과 그 옆에 있는 파일 사이를 오가다가 2번째 파일을 빼냈다. 그리곤 3번째로 꽂혀 있는 파일도 꺼냈다. 남자는 파일들을 소년에게 건넸다.

 “검은색부터 봐.”

 소년이 건네받은 파일 표지에는 숫자만 적혀 있을 뿐 다른 것은 적혀있지 않았다. 소년은 파일을 펼쳤다. 화재로 인해 요트 침몰. 탑승하고 있던 일가족 모두 실종. 수색 중 근처 해변가에서 화상을 입은 돌고래와 실종자 발견. 요트 사고 실종자로 확인. 생존자와 함께 탑승하고 있던 30대 여성과 30대 남성은 끝내 발견하지 못함. 소년의 사고를 기록한 보고서였다.

 “이게 왜요? 저도 사고에 대해서는 알아요.”

 “그다음 파일도 읽어봐.”

 다음 파일에는 회사가 소년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쓰여 있었다. 처음 파일처럼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소년은 사고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하지 못했지만, 사고 이후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기억했다.     

 소년이 정신을 차린 건 사고가 있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눈을 뜨자마자 본 사람은 여자였다. 여긴 어디이며, 당신은 누군지 물어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년이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알 수 없는 기구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소년을 여자는 알 수 없는 눈으로 봐라 보았다.

 “목소리. 아마 나오지 않을 거야.”

 여자가 말했다. 이제 11살이 된 소년이 감당하기에는 큰 고통들이었다. 여자는 괴로워하는 소년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사고에 대해 알려준 것도, 부모에 대해 이야기해준 것도 모두 여자였다. 그녀는 부모를 잃은 슬픔을 맘대로 토해낼 수 없는 소년을 대신해 울어주기도 하고, 실의에 빠져 식음을 전폐한 소년을 지극정성으로 돌보기도 했다. 어린 소년을 대신해 의사를 만나는 것도 여자였다. 여자가 자리를 비우는 순간은 거의 없었다. 가끔 찾아오는 누군가를 만나긴 했지만, 잠깐 만나고 다시 소년의 병실로 돌아왔다. 여자가 병실을 오랜 시간 비운 것은 딱 한 번이었다. 언젠가 병실로 사람들이 떼거지로 몰려왔을 때. 여자는 그 사람들에게 소년은 말을 할 수 없으니 자신과 이야기하자며 자리를 비웠다. 그때 여자는 반나절 가까이 병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소식을 전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밝았다. 희망.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가졌던 것. 사고 이후 처음 갖는 것이었다. 소년은 알겠다고 끄덕였고,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소년의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부모를 찾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더 큰 절망이 소년을 덮쳤다.

 “내가 도와줄게. 나라면 널 도와줄 수 있어. 내가 너의 목소리를 다시 찾아줄게.”

 목소리를 찾아준다. 그 말이 소년에게는 캄캄한 어둠 속 한 줄기 빛 같았다. 소년은 아무 의심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여자가 그때 소년을 데리고 간 곳이 지금 바로 이곳, 연구소였다. 연구소가 개발한 해석기 덕분에 소년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보았다. 소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소년에게 노란색 파일을 읽으라고 말했다. 노란색 파일은 검은색 파일보다 더 두꺼웠고 묵직했다.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읽어봐.”

 노란색 파일에는 스크랩된 기사들이 들어있었다. 소년은 그 안에 보관되어 있는 기사들을 보고 알았다. 자신이 엄청난 유명인사가 되어 있다는 것을.

 책장에 2번째로 꽂혀 있던 파일에는 첫 번째 검은색 파일에 적힌 것과 비슷했지만 소년이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달랐다. 몇 가지가 추가되어 있었다. 배 사고가 있었고, 그 옆에는 소년처럼 상처 가득한 돌고래가 있었음. 돌고래가 소년을 구해준 것으로 추측. 둘은 무사히 구조됨. 소년은 사고로 기억을 잃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 돌고래 또한 심각한 부상을 입음. 소년은 자신을 구해준 이를 oo회사의 대표로 알고 있음. 이에 책임감을 느낀 oo회사 대표, 소년과 돌고래가 치료받을 수 있도록 전액 지원. 목소리를 잃은 소년을 위해 평생 해석기 무상 지원. 소년과 같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이들을 위한 해석기 본격적으로 개발 시작 발표.

 그다음 노란색 파일 속 기사에는 소년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들이 가득했다. 처음 읽은 파일 속 기사들보다 기사의 수가 월등히 많았다. 모두에게 익숙한 동화 인어공주에 빗대어 쓴 기사들. 기사에 의하면 소년은 인어공주 속 왕자였다. 자신을 구해준 인어공주를 기억하지 못하고, 이웃나라 공주와 살아가는 왕자. 동화 인어공주와 달리 인어공주와 왕자 모두 목소리를 잃었다. 또한, 이 이야기에는 인어공주의 목소리를 빼앗은 마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왕자와 인어공주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는 공주만이 있을 뿐이었다. 기사 말미에는 여자의 말이 적혀 있었다. “소년이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동화처럼 새드엔딩이 되지 않도록 당사는 최선을 다할 것.”

 이 동화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듯했다. 인어공주와 왕자의 이야기가 낭만적이라며 감탄했으며, 공주의 선행에 박수를 보냈다. 동물단체는 돌고래의 이름을 공모했고, 사람들은 돌고래에게 ‘마렌’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마렌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기금 마련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기부에 참여했다. SNS에 유명 연예인들이 이 동화를 공유하자 기부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몇몇 정치인들은 앞으로 소년과 마렌과 같은 사례가 없어야 한다며 몇몇 법들을 발의했다. 대기업들은 해석기의 개발이 최대한 빨리 이뤄질 수 있도록 경제적, 기술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게 다 뭐예요?”

 해석기를 통해 나오는 기계적인 음성은 흔들림 없이 평온했다. 하지만 소년의 해석기는 같은 말을 반복해서 내뱉었다. 소년의 손에 들려 있는 파일이 덜덜 떨렸다.

 “내가 적은 대표님의 말들. 너의 관한 이야기들이지.”

 “이거 저한테 보여주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맞아. 보여주면 안 돼.”

 “근데 왜 보여주시는 건데요.”

 “파일이 어떤 식으로 작성되었는지 감이 오니?”

 소년은 모르겠다고 했다. 모르겠다고.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파일의 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자가 왜 이런 말들을 한 것인지, 남자가 왜 이것을 보여주는지, 보지 못한 파일들에는 어떤 말들이 적혀 있을지, 사무실에 꽂혀 있는 파일들에는 어떤 내용이 있을지, 아무것도. 해석기에서 나온 음성이 울렸다. 사무실, 남자의 마음, 그리고 소년의 몸속에서.     



3.

 그 후 며칠간 소년의 해석기는 조용했다. 몇몇 연구자들이 아픈 거 아니냐며 일부러 말을 붙일 정도였다. 여자 또한 걱정했다. 해석기가 고장 난 것 아니냐고. 해석기는 멀쩡해요. 소년이 해석기를 누르고 대답했다.

 여자가 별안간 들이닥쳐 소년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는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들뜬 숨을 삼켰다. 벌벌 떠는 것이 소년에게도 느껴졌다.

 “너, 얼마큼 알아?”

 소년이 이 연구실로 온 이래로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병실에서 자신에게 희망을 속삭이던 목소리도, 연구실에서 자신을 걱정하던 목소리도 아니었다. 남자와 실랑이를 벌이던 그때와 비슷했다. 소년이 얼굴을 찡그렸다. 소년은 대답하고 싶었지만, 여자가 어깨를 너무 꽉 잡고 있어서 해석기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소년이 입을 크게 움직여 아프다고 말하자 여자가 어깨에서 손을 뗐다. 여자의 손은 주먹을 꽉 쥐어 힘줄이 울퉁불퉁 튀어나와 있었다.

 “어떤 걸요?”

 “파일. 파일 봤잖아. 파일!”

 여자가 말을 더듬었다. 파일이라는 단어도 계속 반복해서 말했다. 소년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여자의 해석기가 망가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는 소년처럼 해석기를 사용해야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고장 난 것은 해석기가 아니었다.

 “네, 봤어요.”

 “봤어?”

 “네.”

 “어떤 파일 봤어? 기억나? 얼마나 본 거야? 끝까지 본 거니?”

 “모르겠어요. 기억 안 나요.”

 여자와 다르게 소년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정확히는 소년의 소리는 아니었다. 기계음 덕에 소년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숨길 수 있었다. 해석기 없이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자신도 여자처럼 말을 더듬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정말이니?”

 “네.”

 “정말이지.”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년의 눈을 응시했다. 여자가 소년을 그렇게 쳐다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자의 눈을 피하지 않으려 이를 꽉 깨물었다. 떨리는 턱을 숨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알았어. 오늘 대답하는 걸 보니 해석기는 멀쩡한 것 같네. 다행이야.”

 여자가 환하게 웃었다.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이었다. 소년은 온몸에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여자가 돌아가고 소년은 꼭 물속에 빠진 듯이 숨을 헐떡거렸다. 소년은 목을 죄어 오는 느낌에 목을 움켜쥐었다. 해석기가 만져졌다. 해석기를 빼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해석기는 소년의 목에서 빠지지 않았다.     


4.

 파일에 대해 물었을 때처럼, 여자는 갑자기 소년 앞에 나타났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남자와 함께 소년을 만나러 왔다는 것이었다. 남자는 소년을 보지 않으려는 듯 땅만 보고 있었다. 여자는 소년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숨기고 있는 진실을 이야기해줘야 할 것 같다며 여태 숨겨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널 위해서였어. 사고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네가 너무 힘들어하길래 사고에 대해 자세히 말해줄 수 없었어.”

 남자는 손에 쥐고 있던 손수건을 건넸다.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여자는 한참을 훌쩍였다. 그리곤 말했다. 진실이라는 것들을. 소년이 그 사무실에서 보았던 일부를.

 “마렌이라는 돌고래가 있어. 그 돌고래가 너를 구해준 거야. 나는 그냥 너를 돌본 거고, 너의 생명을 구한 건 마렌이야. 마렌도 부상이 심해서 너처럼 치료를 받았어. 마렌이 치료를 받다 잘못될 수도 있어서…. 너에게 다 말했다가 마렌이 죽어버리면 네가 너무 슬퍼할 것 같아서 말하지 못한 거야.”

 “진짜요?”

 해석기를 눌러 대답했다. 기계적인 음성이었다.

 “다행히 마렌은 이제 건강하다고 하더라고. 너처럼 말이야.”

 여자는 마렌의 치료가 끝났고, 이제 자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소년은 열심히 대답했다. 네. 네. 네.

 “마렌이 자연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번 만나보지 않을래?”

 소년은 해석기에서 손을 떼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는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소년은 해석기의 버튼을 눌렀다.

 “아니요. 만나지 않을래요.”

 남자의 시선이 소년을 향했다.

 “왜?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지 않아요. 기억에도 없는 걸요.”

 “그래도 만나봐야 하지 않을까? 자연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야. 한번 만나보자.”

 “힘들 거예요. 보고 나면.”

 소년의 거절에도 여자는 계속해서 권했다. 소년은 계속 거절했다. 무섭다고도 하고, 사고에 관한 건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도 하고, 생각만 해도 괴롭다고 했다.

 “일단 알겠어. 그래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해줘. 마렌이 바다로 돌아가는 거 최대한 미뤄달라고 할게.”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항상 감사해요.”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여자는 남자와 함께 찾아와 소년에게 말했다. 마렌을 만나보자고. 하지만 소년은 말했다. 만나고 싶지 않아요. 단호한 소년의 태도 때문인지 여자는 마렌과의 만남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대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렌은 자연으로 돌아갔어. 이제 행복하게 잘 살 거야. 너처럼 말이야.     



5.

 마렌의 소식을 들은 것은 여자가 ‘진실’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5년이 지난 후였다. 여자는 마렌이 바다에서 적응하는 것에 실패했고, 지금 육지로 다시 돌아오는 중이라고 했다.

 “아마도 마렌은 바다에서 사는 게 힘들었나 봐….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는데, 듣기로는 마렌의 상처 때문이래.”

 “상처요?”

 “또 다친 건 아니고, 9년 전에 사고 말이야. 그때 다친 거. 너처럼 아직 후유증을 갖고 있었대.”

 “네.”

 “새로운 소식이 들려오면 너에게 알려줄게.”

 “네, 감사합니다. 대표님.”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은색 파일을 소년 주변에 놓으며 말했다. 마렌이 이 연구실로 오게 되었다고, 만나기 전에 파일을 읽어보라고.

 “이거 제가 봐도 되는 내용인 거죠?”

 “대표님 지시로 온 거야. 마렌을 만나기 전까지 다 읽어봐. 사진도 있으니까 잘 봐 두고.”

 “외워야 하는 건가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누군가가 오는군요.”

 소년이 해석기를 매만지며 말했다. 소년의 해석기는 9년 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긴 시간 동안 소년은 몇 차례 검사와 치료도 받았다. 많은 노력에도 소년의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소년에게 치료 대신 해석기에 완전히 의존하는 것이 어떠냐고 권했다. 소년은 그러겠다고 했다. 그 이후 소년의 해석기는 더 자주 교체되었다. 연구가 원활하게 진행되면서 해석기에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어 교체되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소년의 목이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턱에는 수염이 삐죽 자라났고, 매끈했던 목에는 큰 굴곡이 생겨났다. 여자와 연구진들은 소년의 변화에 맞게 해석기를 보완해나갔다. 크기를 키우고, 아이 같던 음성도 굵고 낮은 목소리로 변경했다.

 소년의 해석기가 점점 진짜 목소리 같아질 무렵 여자는 소년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남자가 소년에게 파일을 건넸다. 검은색 파일이었다. 그 안에는 질문과 답변이 적혀 있었다. 여자는 그걸 그대로 외워서 말하면 된다고 했다. 소년은 여자의 말대로 했다.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하고, 자신을 소개. 정해진 질문과 정해진 대답을 하면 사람들은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 모든 과정을 여자와 남자가 지켜봤다.

 어느 날 소년은 갑자기 파일에 적힌 대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하고 싶은 말들을 했다. 특별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는 순종적으로 따랐지만 자신도 이제 스스로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으니까. 그런 소년을 보며 여자는 당황했고, 소년을 만나고 싶어 하던 사람들과의 만남을 성급하게 종료시켰다.

 “왜 적힌 대로 말 안 해? 혹시 양이 많아서 못 외운 거니?”

 “아뇨. 다 외웠어요.”

 “근데 왜 다르게 말하는 거지? 내가 분명히 그대로 말하면 된다고 했잖아.”

 “저도 이제 혼자 할 수 있어요. 저 사람들도 제가 그냥 말하는 걸 더 좋아할 거예요.”

 “그래도 파일에 적힌 대로 말해줬으면 좋겠네. 그렇게 해줄 수 있지?”

여자와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평소 같으면 여자의 눈을 피했을 소년이었지만, 어째선지 소년은 여자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할 수 없다는 의미니?”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여자가 혼잣말을 했다. 그러고는 남자와 함께 어디론가 향했다. 그리고 며칠 후 소년의 해석기는 교체되었다. 소년이 평소처럼 버튼을 누르기 위해 해석기를 만지작거렸지만, 그 어디에도 버튼은 없었다. 그 해석기를 한 채로 소년은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소년이 말하지 않아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년의 시선이 여자의 손으로 향했다. 여자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소년의 해석기가 작동했다. 사람들과의 만남이 끝나고 나서도 소년은 그 해석기를 차고 한참을 지내야 했다. 소년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었다. 해석기가 아니면 소통할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다. 소년은 답답해도 참았다. 여자가 해석기를 교체해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참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자는 해석기를 교체해주지 않았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소년이었다. 소년은 여자에게 무릎을 꿇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여자는 자비롭게 웃으며 소년을 일으켰다. 그래. 돌려줄게. 너의 목소리를.     



6.

 마렌이 연구소로 온 이후 소년은 매일 마렌을 만났다. 여자에게 들은 것처럼 마렌도 해석기를 착용하고 있었다. 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다른 돌고래와 소통할 수 없었다는 것이 여자의 설명이었다.

 너 사고에 대해 기억해? 정말 나를 구한 거야? 왜? 너 나 알아? 사고 전에 우리가 만난 적 있어? 내가 그때 혹시 널 구해줬었니?

 밖 생활은 어땠어? 말을 못 하고 살았으면 어떻게 살았니? 말을 못 해도 살 수 있는 거야?

 수조는 답답하지 않아? 해석기는 편해?

 말할 수 있게 되면 무슨 말이 제일 하고 싶어?

 너 해석기가 쓰고 싶어?

 대답해줘.

 마렌은 수조 안을 무기력하게 빙빙 돌고 있었다. 소년은 해석기를 누르지 않았다. 여자가 들을 테니까. 그래서 소년의 목소리는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그저 소년의 몸 안에서 울릴 뿐이었다.

 여자는 마렌의 수조 앞에 매일 앉아있는 소년을 보며 말했다. 그렇게 보고 싶냐고. 지금 너와 마렌이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고 있다고. 머지않아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여자는 물속에서는 소리가 잘 안 들려서 다른 방법으로 대화할 수 있도록 연구 중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수조 벽을 따라 그냥 왔다 갔다 하던 마렌이 수조 전체를 헤엄치며 활발하게 움직였다. 연구진들이 해석기 업그레이드를 위해 해석기를 뺀 날이었다. 그날 소년도 같은 이유로 해석기를 착용하지 않았다. 소년은 해석기가 없는 마렌이 꼭 웃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해석기가 없으면 아무 말도 못 하면서.

 여자와 연구진이 보완한 해석기를 가져왔다. 사람들이 다가와 소년이 해석기를 착용하는 것을 도와줬다. 여자가 손짓하자 장비를 갖춘 사람들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마렌은 사람들을 피해 이리저리 도망쳤다. 한 사람이 어떤 도구로 마렌을 붙잡았다. 마렌은 몸부림쳤다. 마렌의 몸에 해석기가 장착되었다.

 여자는 훈련을 할 것이라고 했다.

 “훈련이요?”

 “마렌이 저 해석기를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네가 좀 도와줘야 할 것 같아.”

 “제가요?”

 “응. 너만 할 수 있는 일이거든.”

 “제가 뭘 하면 되는데요?”

 “별 건 아니고, 마렌과 이야기를 하면 돼. 해석기로. 물속에서.”

 여자가 말하는 훈련이라는 것은 실험이기도 했다. 해석기가 물에서 잘 작동하는지, 동물과 사람이 해석기로 대화가 가능한지를 알아보는.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는 소년이 물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소년은 사고 이후로 한 번도 물속으로 들어간 적이 없었다. 목소리를 빼앗아간 마녀의 품으로 가는 길을 여자가 안내했다.

 마렌이 있는 큰 수조에 들어가기 전에 얕은 물에서 소년은 물에 들어가는 것을 연습했다. 물에서 해석기를 켜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 모습을 여자가 지켜봤다. 몸을 감싸는 수압이 소름 끼치게 싫었지만 소년은 참아냈다. 여자의 기대 때문도 있었지만, 소년은 물속에서 마렌을 만나보고 싶었다. 마렌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열심히 연습한 덕에 소년은 깊은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이 가능해졌다. 여자는 기뻐했다. 그리고 남자에게 무어라 말을 했다. 소년은 듣지 못했지만, 알 수 있었다. 남자가 검은색 파일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소년의 다음 훈련 장소는 마렌이 들어 있는 수조였다. 마렌의 수조는 여태 들어갔던 어떤 수조보다 깊고 커 보였다. 여자의 신호에 소년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물거품들이 소년을 감쌌다. 물속에서 마렌이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조 밖에는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는 눈을 반짝이며 손짓하고 있었다. 어서 무슨 말이라도 해봐.

 소년이 인사했다. 안녕.

 마렌이 소년을 쳐다봤다. 소년이 다시 인사했다. 안녕. 반가워.

 마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점점 숨이 찼다. 여자는 더 말을 해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소년이 다시 말을 걸어봤지만 마렌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저 물속을 돌아다녔다. 소년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채 물 밖으로 나왔다.

 훈련은 계속되었다. 마렌은 소년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소년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 여자는 그 모습을 보고 마렌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여자의 말을 들은 소년은 겁이 났다. 소년이 여자의 소매를 붙잡았다. 하지만 소년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7.

 여자가 말한 방법은 별다른 건 아니었다. 여자는 돌고래 전문가를 데리고 왔다. 덕분에 마렌은 소년에게 공격성을 띄지는 않았다. 훈련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소년은 마렌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안녕.

 마렌의 해석기도 반응했다. 안녕.

 그 모습을 보며 여자는 박수를 쳤다. 소년에게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아마 여자는 수조 밖에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너무 감동적이야. 인어공주와 왕자가 드디어 대화를 하다니!’

 마렌의 해석기가 다시 반응했다. 넌 누구야?

 소년이 대답하려는 순간 마렌이 다시 말했다. 무서워. 무서워. 아파. 여긴 어디야? 무서워. 아파. 이건 뭐야? 넌 뭐야? 무서워. 아파. 아파. 너무 아파. 돌아갈래. 혼자는 싫어. 무서워.

 소년은 황급히 수조 밖을 봤다. 다행히 여자는 마렌의 말들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소년은 숨이 차서 물 밖으로 올라왔다. 소년은 마렌의 말들이 여자 귀에 들어가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마렌의 반응을 눈치챘다. 여자는 수많은 연구진과 돌고래 전문가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녀의 분노가 물속 안에서도 느껴졌다. 계속되는 훈련에도 마렌의 반응은 비슷했다. 여자는 해석기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마렌과 소년의 해석기를 수거해갔다.

 해석기를 돌려준 건 여자나 다른 연구진이 아니었다. 남자 혼자 들어와서 소년의 해석기 착용을 도왔다. 여자의 행방을 묻자 남자는 일이 많아 그걸 준비하러 갔다고 설명했다.

 “당분간은 훈련하지 않아도 될 거야.”

 “왜요?”

 “일단은 그렇게만 알고 있어. 자세한 건 대표님이 설명해주시겠지.”

 “네.”

 “자, 그리고 이거.”

 남자가 노란색 파일을 건넸다.

 “이거 제가 봐도 되는 거 맞죠?”

 “맞아. 일단 여기 들어있는 기사들 읽어봐. 다음에 만나면 연습해야 하는 자료들을 보여줄게.”

 “네.”

 파일 속에는 기사들이 들어있었다. 마렌과 소년이 해석기를 착용하고 있는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드디어 성사된 인어공주와 왕자의 만남. 그들의 대화는?’ 그리고 연구실의 장소와 언제 어떤 식으로 행사가 진행되는지가 쓰여 있었다. 그 기사에 적혀 있는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여자와 남자가 찾아와 검은색 파일을 전했다.          



8.

 소년은 연구소에 이렇게까지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을 처음 보았다. 심호흡을 하는 소년에게 여자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그리고 밝게 파이팅을 외치며 응원했다. 사람들은 여자의 안내에 따라 연구소를 둘러보고 소년과 마렌이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남자가 여자에게 검은색 파일을 전했다. 여자가 마이크에 대고 그걸 읽으며 설명했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여자가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 후 사람들은 동화 인어공주와 소년과 마렌의 사고를 잘 섞은 이야기를 감상했다.

 소년에게 신호가 떨어졌다. 소년은 신호에 따라 물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준비했던 대사를 했다. 안녕. 마렌도 인사했다. 안녕. 그리고 대화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소년은 점점 이상함을 느꼈다. 마렌의 상태가 이상했다. 소년은 물 밖에 있는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는 빨리 진행하라고 손짓했다. 소년이 말하고 마렌이 말할 차례가 되었다. 마렌의 해석기에서 불빛이 일더니 마렌이 크게 몸부림쳤다. 마렌의 진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파. 아파. 너무 아파. 싫어. 아파. 그만해. 아파. 싫어. 아파. 그만해. 제발. 죽을 것 같아. 그만.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여자는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열심히 눌렀지만, 마렌의 해석기는 멈추지 않았다. 여자는 단상 위에 올라가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사람들의 목소리를 멈추지 못했다.

 쿵. 쿵. 쿵. 쿵. 쿵. 쿵.

 마렌이 수조를 들이박았다. 사람들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가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연구진들이 무언가를 가져왔지만 소용없는 모양이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소년은 멍하니 마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수조에 마렌의 몸이 계속 부딪혔다. 소년의 눈에 마렌의 화상 자국이 들어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마렌의 화상 자국이 처음 봤을 때와는 달라져 있다는 것을. 수조 안에 있는 돌고래는 마렌이 아니라는 것을.

 수조의 유리가 점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유리가 깨지며 물이 새자 여자와 나머지 사람들도 밖으로 도망갔다. 소년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무리에는 남자도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 수조가 있는 방을 나가는 사람이었다. 남자와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손에 들고 있는 파일을 힘껏 흔들었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파일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사무실로 가! 사무실로! 소년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두꺼운 문을 완전히 닫고 그 방을 나갔다.

 그리고 유리가 완전히 깨지며 물이 쏟아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소년은 물살에 떠밀려 이곳저곳에 부딪혔다. 유리의 파편이 소년의 가슴을 찔렀다. 마렌은 정신을 잃은 것인지 힘 없이 둥둥 떠 있었다. 소년은 벽을 기어 올라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그 방 밖으로 나가는 데 성공했다.

 소년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터벅터벅 걸었다. 지금은 저 물들이 연구소에 다른 곳까지는 흘러나오지 않았지만 언제 터져 나와 소년을 덮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계속 걸었다. 몸이 무겁고, 어지러웠다. 소년이 걸음을 멈춘 곳은 사무실 앞이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남자가 열어둔 듯했다. 남자의 말대로 소년은 그 사무실로 들어갔다. 소년은 책장에 꽂힌 파일들을 모조리 꺼냈다. 검은색 노란색 가릴 것 없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소년은 그 파일 위를 엉금엉금 기어 다니며 손에 잡히는 것을 읽었다. 검은색, 검은색, 노란색, 검은색, 노란색, 검은색, 검은색, 검은색, 검은색….

 소년의 손이 덜덜 떨렸다.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파일들은 말해주고 있었다. 소년이 알고 있는 진실이라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라는 것을, 그마저도 누군가가 꾸며낸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보고 싶은 대로 만들어낸 동화와 달리 소년이 살아왔던 삶 속에는 마녀가 존재했다. 인어공주와 왕자의 목소리를 빼앗은 마녀.

 소년이 파일 위로 누웠다. 소년의 가슴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 피가 파일들을 적셨다. 동화 인어공주가 어떻게 되더라. 소년은 웃었다. 계속 웃었다. 동화가 소년은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해석기를 힘주어 끊어냈다. 소년의 목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모두 거짓이었구나. 정말, 모든 것이.”

 소년이 말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구두 한 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